대전 정부청사 입주 3년 '명과 암'

하위직원 "정들면 고향", 높은양반 "벽지 아닌 벽지"

“아침 밥상을 구경 못한지 어느새 3년이 훌쩍 넘었네요.”

1998년 8월부터 대전에서 홀아비 생활을 시작한 산림청 국유림관리국 최종수국장은 아침 끼니를 거르며 하루를 연다. 그는 점심자리 때면 동료들로부터 늘 눈총의 대상이다. 허기를 견디며 오전 일과를 마친 그의 숟가락 놀림이 워낙 잽싼데다 식사량도 언제나 대식가 수준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이젠 한달에 몇차례 수원 집에 들려도 아침을 먹지 못합니다. 속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요.”

산림청을 비롯한 9개 청이 정부대전청사로 옮긴지 3년여. 그러나 청사속을 들여다보면 아직도 가정을 서울에 남겨둔 채 ‘이중생활’의 고달픔을 삭이는 이들이 숱하다. 6급이하 하위직원들은 대부분 지난 3년새 대전으로 속속 이주해 ‘대전사람’으로 적응하는 추세다.

이들은 대부분 청사까지 걸어서 5분이 채 안걸리는 인접 아파트에 둥지를 틀었다. 출퇴근 전쟁이 없어 그만큼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고, 관할 부처 등 상급기관과 떨어져 가끔은 업무상 심적 여유도 느끼며 지낼 수 있다.

이처럼 생활 방식이 제각각이면서 여가를 보내는 행태에 따라 ‘배터리족’ ‘캥거루족’ ‘니나노족’ 등 신조어가 나돌고 있다.

틈틈이 외국어학원이나 테니스 강습 등에 참여해 재충전에 열중하는 배터리족을 비롯, 주말은 물론평일에도 종종 서울로 향하는 캥거루족과 밤이면 지인들과 술을 나누며 객고를 달래는 니나노족이 등장했다.


서울-대전 오가며 길바닥서 시간 허비

대전청사 입주 3년을 넘기면서 이중살림 고수파와 청산파가 서로 다른 대전생활사를 엮어내고 있다.

50줄을 넘나드는 국장급 이상 관료를 비롯한 간부들 태반은 아직도 대전 생활자체를 글자 그대로 ‘벽지 아닌 벽지’ 근무로 인식하고 있다. 경제적인 부담, 업무의 고단함, 인사상 소외감….

산림청의 경우 국장 4명 가운데 3명이 홀아비 신세의 고달픔을 맛보고 있다. 최 국장이 별거를 선택한 사정은 아내의 직장과 자식 교육 때문. 금쪽 같은 봉급을 쪼개 이중살림을 하는 현실도 그렇지만 중앙무대를 벗어나면서 가족과 친구를 잊고 지내야 하는 숙명이 달갑지 않다.

그런데다 업무처리는 길거리에서 시작해 길거리로 끝난다고 해야 할 정도로 비능률의 연속이다.

그는 매주 최소 2회 이상 상경한다. 소소한 업무협의라도 대면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의 행정문화 탓에 툭하면 상급부처를 방문해야 하는 실정이다. 국회라도 열리는 달이면 그의 상경횟수는 부지기 수로 불어난다. 직원을 지치게 해 능률을 떨어뜨리고 재원은 재원대로 낭비하고 있다는 비판이 무성하다.

청장들의 상경 빈도는 더욱 심하다. 행사까지 서울 중심이다보니 일요일을 제외한주 6일 가운데 4일씩이나 대전을 비우는 청장이 수두룩하다.

두아들의 교육 문제 때문에 3년 넘게 홀아비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통계청 이동명 기획과장은 “공직자이기 때문에 경제적 부담이나 불편은 감수할 수 있다”며 “하지만 서울 출장중심으로 매사를 처리하는 행정의 비효율은 국가적인 낭비”라고 지적했다.

서울-대전을 오가다 하루 해가 저물고 있다는 ‘자조’는 대전청사의 공통어가 되어 버렸다.

조달청 직장협의회장을 맡고 있는 물자관리과 신동준 주사는 “대전청사는 정책입안 기관이기보다는 집행부서인데도 업무협의니 예산협조니 하며 걸핏하면 직원이 상경하는 풍조가 번져 국회라도 열리면 청사 업무는 마비 지경”이라고 비판했다.

게다가 일반 행사까지 대외 홍보를 노려 무조건 서울에서 하고 보자는 경향 때문에 나랏돈을 이중으로 낭비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인사철이면 밀려드는 소외감도 그들에겐 기운 빠지는 일이다. 어느새 대전청사가 ‘정부의 섬’같은 존재로 내몰려 낙하산 인사의 단골 상대로 전락했다고 자탄하고 있다.

지난 4월 차관급 21명을 교체한 정부인사의 경우 14명이 내부승진했지만 대전청사 외청장 7명은 모두 배제됐다. 배려는 커녕 되레 정종환 철도청장 등 3개 청장이 낙마하는 비운을 맞자 ‘외청 푸대접론’을 거론하면 불만을 터뜨렸다.

이런 자탄에 갇혀 사는 그들에겐 교육 여건, 의료 서비스, 문화 혜택이 서울보다 못하다는 인식까지 얹혀진 ‘서울 시대’의 향수가 짙게 배어있다.


서울생활 과감히 청산, 쾌적한 삶 즐기기

그러나 이중생활을 과감히 청산하고 대전에서 새살림을 꾸린 한켠에선 ‘자족’이 낳은 딴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그들은 지방생활의 여유로움 한가지만으로도 새로운 행복을 찾고 있다. 업무의 고단함이나 문화 생활의 한계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대신 쾌적한 삶 자체를 즐기려 애쓰고 있다.

관세청 조사감시과 박상덕 관세조사담당은 대전찬가를 부르며 살 정도로 빠르게 정착했다.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인근 금산 서대산 자락에서 흙을 일군다.

서울에선 꿈도 꾸지 못한 주말농장을 가꾸면서 대전의 행복을 흠뻑 맛보고 있다. 그의 이런 생활은 청내 동료 10여명이 가세한 ‘흙사모(흙을 사랑하는 모임)’ 결성으로 이어졌다.

“흙과 햇볕이 아이들에게 산교육을 해주고 심신의 건강도 채워주는 이런 기쁨은 오로지 대전생활 덕분이지요.” 그는 “감자와 배추 등을 수확해 아파트 이웃들과 함께 나누며 정을 주고받는 보람은 우리가족만의 행복”이라고 자랑했다.

이런 여유는 직원간에 주경야독을 통한 박사학위 취득 열풍으로도 승화하고 있다. 특허청에서만 14명이 재직중 학위를 받았고 철도청 산림청 조달청 등 각 청마다 박사 공무원이 잇따라 배출되고 있다.

3년전 세살배기 딸을 안고 아내와 함께 대전에 정착한 통계청 예산계 김태준 주사는 수도권 ‘지옥철’에서 탈출한 기쁨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그는 중학교 교사인 아내도 운좋게 대전 전입에 성공해 이젠 완전히 대전사람으로 거듭났다.

그는 서울 대구 등지에 흩어져 사는 7형제가 대전에서 자주 만나 웃음꽃을 피울 때면 대전 정착의 보람을 새삼 느낀다고 뿌듯해한다.

그는 “아이들이 자라면 교육 문제 때문에 고민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먼훗날 일”이라며 “걸어서 출퇴근하고 주말이면 근교 산과 바다로 여행을 다닐 수 있는 대전생활이 너무도좋다”고 말했다.


3900여명 근무, 정착까지는 아직 먼 길

대전청사내 9개 외청에 근무하는 공무원 3,900명 가운데 온 가족이 이주한 경우는 72.3%인 2,820명. 나머지 1,080명은 대전서 홀로 지내거나(980명) 수도권에서 출퇴근(100명)하고 있다. 가족이주를 선택하지 않은 공무원이 2년전 958명에 비해 122명이나 늘었다.

총사업비 4,160억원에다 이전비만 76억원을 쏟아부은 정부대전청사. 아직은 서울과 대전 모두로부터 한발짝 떨어져 있다는 고립감에 휘말려 있다. 시대변화에 걸맞게 정보화 지방화 물살을 헤치고 나서려는 의지가 미약하고, 분산의 잇점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안팎으로 받고 있다.

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한 선도적 역할 수행, 균등한 지역발전 도모, 행정효율을 높여 기능 극대화 등 거창한 목표를 실감하기에는 이르다.

90년 9월 청단위 중앙행정기관의 대전이전 계획이 확정된 지 11년, 실제 입주한 만 3년이 지났으나 당초 정부가 기대한 정착단계에 이르기 까지는 아직도 길이 먼 듯 한다.

최정복 사회부기자

입력시간 2001/11/21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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