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뒤집는 '적과의 동침'

하이닉스-마이크론 제휴 추진, D램업계 대지진 예고

하이닉스반도체와 미국의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전략적 제휴 협상에 들어갔다.

세계 2위 D램업체인 마이크론과 3위 하이닉스의 제휴 추진 발표는 반도체 업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두 회사의 제휴 추진 소식이 발표되면서 반도체 관련 주식은 폭등을 거듭했고 D램 가격도 강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반도체경기가 조기에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의 협상에 대해서도 다양한 시각과 분석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마이크론이 하이닉스를 인수합병할 것인지,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선에서 밀월관계를 맺을 것인지, 제휴협상을 통해 감산을 유도하기 위한 것인지등.

하지만 두 회사가 최악의 경영상황에 빠진 만큼 어떤 식으로든 탈출구를 마련할것이라는 데는 많은 전문가들이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새로운 D램 시장질서, 삼성 압도할 규모

두 회사의 D램 시장점유율은 지난해말 기준으로 35.7%에 달한다. 1위 업체인 삼성전자는 지난해말 21% 정도에 불과했던 시장점유율을 최근 30%까지 늘렸지만 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이 힘을 모으면 삼성을 압도할 수 있는 규모가 되는 셈이다.

두 회사의 제휴가 성공할 경우, 세계 D램시장은 삼성전자 대 하이닉스-마이크론의 2강 체제가 만들어진다. 하이닉스-마이크론 그룹은 생산규모는 물론 기술력에서도 삼성에 뒤지지 않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마이크론은 세계 전사업장에 0.13미크론급의 미세가공기술을 적용하기 시작, 삼성전자에 비해 한 발 빠른 투자를 단행해왔다. 하이닉스와 기술협력을 도모하면 삼성전자에 뒤져있는 각종 기술을 순식간에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현재 합병을 추진중인 인피니온과 도시바의 협상 결과도 주목거리다. 이들 회사는 연말까지 협상을 지속, 새로운 단일법인을 만들어내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의 제휴 추진으로 인피니온과 도시바는 더욱 쫓기는 신세가 됐다. 이미 혼자의 힘으로 이번 반도체 불황을 이겨내기는 힘들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두 그룹의 협상은 반도체 질서를 아주 단순화 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기존의 5대 기업이 3개로 줄어들게 되는 것은 물론 거대 공룡으로 재탄생하면서 이미 합병에 성공한 일본의 엘피다를 제외한 군소업체들의 입지를 더욱 위축시킬 전망이다.

타이완의 윈본드 일렉트로닉스는 D램 라인의 절반을 플래시 메모리로 전환하고 있으며 밴가드 인터내셔널은 D램 사업에서 벗어나 파운드리(수탁가공)업체로 거듭나겠다고 밝혔다. 난야 테크놀로지와 파워칩 세미컨덕터도 생산라인을 비메모리 제품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기술로 승부한다”

삼성전자는 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의 제휴 추진에 대해 공식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 내부에서는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기술력에서 앞서는 만큼 큰 걱정은 없다”고 강조하면서도 두 회사의 제휴가 반도체 시장과 삼성전자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 하이닉스반도체가 미국의 마이크론테크놀로지와 제휴를 추진함으로써 세계 반도체시장이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시장재편의 급물살을 탈 것으로 전망된다. 미 아이다호주에 있는 마이크론사 공장모습.

삼성전자는 지난해부터 독주체제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왔다. 지난해말 64메가비트 D램을 128메가로 급속하게 전환하면서 군소업체를 따돌린 데 이어 다시 128메가에서 256메가로 주력제품을 바꾸고 있어 경쟁업체들의 추격의지를 꺾고 있다.

더구나 차세대 반도체로 부상하고 있는 더블데이터레이트(DDRㆍ기존 D램에 비해 속도가 2배 빠른 반도체) D램에 대한 소리없는 투자를 단행, 50%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시장선점에 성공했다.

최근에는 512메가 제품 양산기술과 300mm(12인치) 웨이퍼 가공기술을 확보, 내년 대대적인 공세를 할 태세다.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삼성은 차세대 기술에 대한 앞선 투자와 신제품을 지속적으로 개발, 시장을 만들어나가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며“범용 제품이 아닌 주문형 고부가 제품 위주의 생산구조를 만들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제휴방식 결혼이냐, 동거냐

반도체 업계 안팎에서 이번 제휴협상을 보는 관점은 크게 두가지로 갈라진다.

우선 멀지않은 시기에 협상이 타결돼 어떤 방식으로든 제휴를 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 같은 분석에는 본격적인 협상에 앞서 이미 두 회사가 원칙적인 틀을 만들어놓았으며 세부적인 의견을 조절하는 일만 남았다고 보는 시각이 깔려있다.

이 같은 시각에 힘을 싣고 있는 분석가들은 두 회사의 제휴방식이 ‘결혼’이냐, ‘동거’냐를 두고 설전을 벌이고 있다.

전병서 대우증권 애널리스트는 “마이크론이 지분 맞교환을 통해 하이닉스의 지분을 인수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전 애널리스트는 “98년 마이크론이 현금지불 없이 주식과 전환사채(CB) 발행으로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의 반도체사업을 인수했다”며 “하이닉스에 대해서도 현금지불보다 는 신주발행방식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비교적 느슨한 관계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미국의 시장조사기관인 프로비지오는 “마이크론은 하이닉스를 인수하기보다 제휴를 통해 아시아시장에서의 입지를 구축하는 한편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확보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프로비지오는 “하이닉스가 엄청난 부채를 가지고 있어 마이크론은 이를 떠안지 않을 것”이라며 “전략적 제휴만으로도 유력한 경쟁자를 없애고 저임금의 아시아시장에 진입하는 효과를 볼수 있다”고 덧붙였다.


연말까지 가닥잡힐 듯

다른 한 편에서는 두 회사의 협상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두 회사는 국내외 주주, 종업원, 채권단, 정부 등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다 반도체 산업이 가지는 경제에서의 비중이 워낙 크기 때문에 짧은 시간내에 합의를 이끌어내기에는 걸림돌이 많다는 지적이다.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마이크론과 하이닉스는 기본적으로 경쟁관계”라며 “두 회사의 공동이익을 위해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은 크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두 회사가 공동감산 등에도 쉽게 합의하기 힘들 정도로 미묘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협상은장기화 될 가능성도 많다”고 강조했다.

다양한 전망에도 불구, 아직 제휴 성사 가능성을 점치는 것은 조급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협상이 시작된 만큼 두 회사가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고 사업장을 실사하는 정도의 일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박종섭 하이닉스 사장은 “연말까지 전략적 제휴를 계속 추진할 것인지 중단할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이 최악의 불황탈출을 위해 비장의 카드를 꺼내어 놓은 만큼두 회사가 만들어낼 결과는 국내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에 큰 파장을 가져올 것만은 확실하다.

조영주 서울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입력시간 2001/12/12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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