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택배업 1세대 박영기 사장

"정글의 법칙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25년전 겨울을 박영기(61) 사장은 잊지 못한다.

새벽 5시부터 이튿날 밤 2시까지 하루 서너시간 새우잠을 자며 트럭을 몰던 기억.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남편을 잠시나마 보려고 집이 있는 성남에서 세곡동까지 반은 걸어서, 반은 버스를 타고 나와 영하 10도 얼음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매일같이 기다리던 아내.

그 손에 들려있던 도시락. 그 후 20여년이 지나 어엿한 자신의 회사를 거느린 사장이 되어있지만, 여전히 세상은 만만치않다.

“살기가 이렇게까지 어려울 줄은 몰랐습니다. 요즘은 돈 많은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은 무슨 복이 있어서 저렇게 돈이 많을까 하는 생각부터 듭니다.”

택배사업 1세대. 현장 배달 트럭기사로부터 출발해 현재 보거종합물류주식회사 사장이자 ‘동서일개미’ 영업소장으로 1인2역을 뛰는, 오로지 배송사업 하나에 평생을 걸어온 사람.

이력만 따져도 진작에 성공했어야 할 원년 멤버지만, 오히려 갈수록 첩첩산중이다. 6, 7년전부터 이어진 대기업들의 공세에다 IMF 여파로 올여름도 힘겹게 보냈다. 자본주의의 무자비한 생리를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다.

그의 방법이 잘못 됐을까? 고지식할만큼 원칙을 지켜왔다. 아무리 아쉬워도 은행 빚 한번 빌어쓰지 않았다. 사업가들의 ‘교양필수’가 된 골프도 반나절이나 걸리는 시간이 아까와 다녀보지 못했다. 금리에 밝은 승부사들이 수도 없이 등장하고 몰락하는 동안, 그는 소심할만큼 자기 분수만 지켰다.


열다섯살부터 고학, 고등학교 마쳐

학창시절 친구들은 지금도 그에게 ‘넌 이병철보다 더 부자가될 줄 알았다’고 말한다. 장사라면 어릴때부터 잔뼈가 굵었다.

대구에서 태어나 시장에서 잡화점을 꾸리시던 아버지를 어린나이에 여의었다. 6남매중 셋째, 학비 한푼 얻을 수 없는 상황에서 요즘 돈으로 5,000원쯤 친척에게 빌려 간단한 필기구 등을 팔며 돈을 벌었다. 열다섯살 무렵이었다.

“장사가 꽤 잘 됐어요. 어린 나이에 돈을 벌러 다니는게 안돼보여서 그런지, 다들 잘 사주셨거든요. 나중엔 다른 주문까지 받으면서 시계나 고급 안경 등 품목도 늘어났지요.

처음엔 좀 부끄럽기도 했지만, 장사가 잘 되니까 너무 재미있더라구요. 나중엔 소문을 들은 친구 어머니들이 자기 아들에게도 장사를 좀 가르쳐달라고 부탁까지 하시는 일도 많았습니다.”

덕분에 자력으로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장사하랴 공부하랴, 힘겨운 나날이었다. 1970년대 초반엔 주위 사람의 권유로 소화설비 사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소화기 판매는 물론, 직접 열관리 기사 자격증까지 딴 뒤 하청을 맡아 시공한 정부공사도 여럿이다.

그러나 적지않은 자본이 소요되는 사업이다보니 역부족, 결국 얼마뒤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운수업에 나섰다.

1976년, 현재 동서일개미의 전신인 ‘유진통상’의 배달기사로 취직해 하루 450km씩 꼬박 6년을 뛰었다. 주로 의류제품을 전문으로 백화점이나 의류업체 대리점에 배송해주는 일이었는데, 당시로선 파격적인 서비스 내용이었다.

한번 부치면 며칠씩이나 걸려 도착하는 당시의 우편 시스템, 그렇지 않으면 맡길 때든 찾을 때든 소비자들이 직접 발품을 팔아야하는 정기화물 업체 몇개가 고작인 시절이었다.

당일 배송은 기본, 배달기사들의 땀과 책임감이 담보였다. 연중무휴, 새벽 5시에 일어나 짐을 옮겨싣기 시작하면 7시에 주어진 코스를 향해 출발, 이천, 여주를 거쳐 천안,온양, 평택, 수원 등 거미줄처럼 짜인 일정대로 배달지역을 다 돌고나면 밤 9시반이 되었다.

꾸벅꾸벅 졸다가 자정쯤 되면 다시 식품류를 옮겨 싣고 밤거리를 달렸다. 완전히 손을 털고 나면 새벽 2시, 트럭이나 컨테이너 박스에서 서너시간쯤 웅크리고 자다보면 금새 이튿날 아침이 닥쳐왔다.

식사는 주로 빵과 우유, 별거 아닌 별거 가족이 돼 버린 그를 위해 아내가 정성껏싸준 도시락도 미처 먹을 시간이 없어 남겨가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날 서울로 돌아오는 영동고속도로에서 잠시 눈을 붙인 뒤 일어나보니 주위에 자신이 흘린 코피가 발밑까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이러다 죽겠다’ 싶은 생각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일을 계기로 회사에서도 얼마뒤 지역별로 분할해 영업소를 운영하는 시스템으로 선회했지만, 어쨌거나 그간의 기록만으로도 그는 전무후무한 ‘철인 기사’ 였다. 와중에도 결근이나 지각 한번 없었던 성실파였다.

“저희는 의류만 전문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생물을 취급하는 택배사들보다는 다소 편한 점도 있지만,어쨌든 항상 시간에 쫓기다보니 늘잠이 부족한데다 처음엔 배달처 위치를 몰라 지도를 보고도 헤매는 등 고생도 많았습니다.

한번은 평소처럼 트럭에 짐을 산처럼 싣고 한창 달려가는데 갑자기 느낌에 뭔가 휙 날아간 것 같은 겁니다. 차에서 내려 확인해봐도 별 이상이 없어 그냥 갈까 하다가 그래도 자꾸만 찜찜해 왔던 길을 되돌아가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100여미터전쯤 논바닥에 손바닥만한 의류 한무더기가 굴러 떨어져 있더군요.

떨어지는걸 본 것도 아닌데, 하도 오래 일하다보니 저절로 ‘감’이 생긴겁니다. 이제껏 수십년 이 일을 하면서도 간혹 물품갯수를 잘못 세서분실처리된 것 말고는 한번도 물건을 잃어버린 적도,배달을 못한 것도 없습니다.”

영업소장이 된 뒤엔 현장 배송의 고달픔과는 또다른 영업전선의 애환도 새롭게 겪었다. 남몰래 눈물을 흘린 적도 많고, 그 모든 힘든 순간마다 ‘어쨌거나 이 일로 내가 먹고 산다’는 생각으로 넘겨왔다. 덕분에 한창때는 670여개의 업체와 계약을 맺을 만큼 잘 나갔던 영업소였다.


“택배업 난립은 서로를 죽이는 일”

그러나 상황이 바뀐 것은 1990년대 초반. 한진, 현대 등 대기업들이 대거 택배시장으로 몰려들면서 중소기업들의 입지가 위협받기 시작했다. 쌓아온 전통과 신뢰도 막강한 자본력 앞에선 무기력했다.

대기업쪽에선 파격적인 가격인하로 손님을 끌어당겼고, 빼앗긴 수요 회복에 끝내 성공하지 못한 중소업체들은 하나둘문을 닫기 시작했다.

이같이 상황이 나쁜 것은 결과적으로 누구도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박 사장의 판단은 그렇다. 기본적인 수익도 보장되지 않는 가격인하는 중소기업만이 아니라 장기적으론 대기업 자신도 공멸시킬 수 밖에 없다.

소비자 역시 잠재적 피해자다. 지나치게 낮은 가격은 결국 서비스질의 하락을 가져온다. 사실상 이미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겁니다. 지나치게 가격을 낮추다보니 값을 깎은 그들 자신도 결국엔막대한 손해를 보고 있지 않습니까. 과거 600억원이나 투자해 대대적으로 나섰던 모 특송업체가 IMF직후 결국 문을 닫게 된 이유도 결국엔 그들 스스로도 더 이상 수익계산을 맞출 수 없어 접어버린 겁니다.

값이 얼마나 심하게 떨어졌냐면 예를들어 옛날에 5,000원 받던 것이 지금은 3,000원, 또는 2,500원 정도까지 떨어졌습니다. 그 사이 유가며 인건비가 오른 것만도 얼마인데, 옛날보다 더 받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과거보다 더 헐값까지 내려가다니 이런 장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는 어느 기업도 살아남을수 없을 겁니다.”

4년전인 1997년 자신의 회사를 설립한 것도 이 ‘무차별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한 나름의 고육지책이었다.

택배시장의 틈새를 노렸다. 단순한 배송작업만이 아니라 의뢰받은 제품에 택(tag)을 부착해 배달하는 등 부가적인 서비스까지 패키지로 처리해주는 복합적 배송업체다. 이 역시 경쟁은 만만치 않다.

설립당시부터 이미 기존의 동종 업체들이 있었고, 최근엔 더욱 숫자가 늘어 시장이 비좁다. 이것도 거의 맨손으로 일군 회사다. 영업소장으로 뛰던 중, 그의 아이디어를 들은 거래 업체들이 ‘조금씩 물량을 주며 도와줄테니 남의 돈 빌리지 말고 한번 직접 시작해 보라’고 권했다.

지입차량 2대, 자투리처럼 나눠서 구한 땅 100평, 6명의 직원으로 시작한 살림이 이젠 부지 400평,배송차량 16대, 직원 30여명 규모까지 자랐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유산이라도 있길 하나, 이만큼 오는 것도 무척 힘들었습니다. 솔직히, 가끔은 누가 나를 조금만 뒤를 받춰줘도 지금보다 훨씬 크게 일어설텐데,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없지 않습니다.

사실 이 회사도 기존 직장이 잘 됐으면 굳이 따로 만들지 않았을 겁니다. 워낙 젊어서부터 일신을 바쳐 온 곳이라 진작 전성기때 그만둬야지했던 것도 지금까지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남아있는건데,최근엔 갈수록 상황이 어려워지니 할수없이 내 생존을 위해 회사를 만든겁니다. 다행히 이젠 고비가 있을 때마다 서로 보완적인 역할로 힘이 됩니다.”

새 회사를 만들고도 어려움이 많았다. 작지만 조금씩 성실히 벌어나가겠다는 생각 그대로 초창기 1억원쯤 돈이 모일때까진 제법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불어닥친 IMF 구조조정바람, 그때 퇴사한 이들이 만든 동종 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늘면서 생존싸움은 또 불이 붙었다. 한동안 직원들 월급을 제때 주지 못할만큼 어려운 때도 있었다.

올 여름만해도 한 거래업체가 빠져나가는 바람에 적지않은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포자기할 사장은 더욱 아니다.


확실한 서비스가 최고의 경쟁력

“그래도 희망은 있습니다. 처음엔 싼 값 때문에 대기업쪽으로 넘어갔던 거래업체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젠 우리에게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업무에 부하가 걸릴 정도입니다.

모 피혁업체만 해도 우리보다 1,000원이나 낮은 가격에 다른 업체로 거래를 옮겼다가 결국 그쪽에서도 적자 때문에 손을 들자 다시 우릴 찾아온 겁니다. 나중엔 물품을 갖고 가도 안받아주는 이유, 소비자 불만이 늘어나는 것도 이런 무차별 경쟁 때문에 벌어지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차라리 정당한 가격을 받고, 확실하게 서비스하는 것이 올바른 경쟁력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또 그렇게 살 길을 찾아나갈 겁니다.”

올해는 혹독했지만 내년엔 10여개 업체의 계약이 기다리고 있어 연말을 맞는 마음이 어둡지만은 않다. 체급도, 예의도 따지지 않는 무한경쟁시대, 사실 박 사장처럼 힘겨운 이들이 어디 한둘이랴.

그래도 수많은 벤처의 별들이 요란하게 뜨고 지는 요즘, 그만큼 욕심을 비우고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어쨌거나 부자다.

“생각하면 답답하지만, 너무 욕심내지만 않으면 사실 크게 조급할 것도 없습니다. 빚지며 살지도 않았고, 지금도 남한테 돈 빌리러 갈 정도는 아니니까, 이 정도만으로도 나는 잘 하고 있는거다, 내 삶은 만족스러운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올해보다는 내년이 나을 것이고, 이렇게 가다보면 결국 빛을 볼 날도 있지 않겠습니까.”

"정글의 법칙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입력시간 2001/12/17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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