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죽지는 않겠다"

게이트 연루이혹 실세들 암투設, '죽이기 게임' 수면위로

최근 일련의 게이트와 관련된 인사들의 입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음모’다. 어떤 인사는 ‘혼자 죽지는 않는다’는 말까지 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들 인사들이 대부분 권력기관들의 실세였던 탓에 ‘음모’라는 단어는 자연스럽게 ‘암투’로 연결된다.

검찰의 ‘진승현 게이트’ 재수사가 진행되면서 청와대 민정수석실, 국가정보원, 검찰 등 사정기관 고위관계자들간의 암투가 차츰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해 8~12월 검찰의 진승현씨에 대한 내사 및 수사 때 물밑에서 은밀하게 작용했던 ‘생존게임’이 한국일보의 ‘진승현 게이트 배후 몸통은 김은성 국가정보원2차장’(11월13일자)이라는 보도 이후 수면 위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신광옥 전 법무차관의 거액 수뢰설이 보도된 것도 재직 당시 업무상 취득한 ‘고급 정보’를 무기로 한 권력자간의 갈등이 배경이라는 관측이다.


신(愼)-신(辛) 암투설

우선 신 전 차관의 검찰 소환을 앞두고 정치권과 검찰 내에서는 신승남 검찰총장과 신 전 차관과의 갈등설이 점차 확산되는 분위기다.

진원지는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고 있으나 박순용 전 검찰총장의 임기 만료 직전 차기 검찰총수 자리를 놓고 은밀히 진행되었다가 올 9월 ‘이용호 게이트’ 당시 신 총장의 동생인 승환(48)씨 연루설이 불거지면서 본격화했다는 게 정설이다.

당시 정치권과 검찰 일각에서는 승환씨의 연루설이 민정수석이었던 신 전 차관이 친정이던 법무차관으로 돌아간 직후 터진 일이라는 점에 주목, 신 전 차관쪽에서 외부에 흘렸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 일로 신 총장은 탄핵위기에 몰렸다가 가까스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탄핵정국 속에서 두 사람의 갈등은 첨예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정당국 관계자들에 따르면 신 전 차관이 탄핵위기에 몰린 신 총장을 보호하려기 보다는 오히려 정치인들에게 “신 총장은 정책판단 능력이 부족하다”며 은근히 신 총장의 낙마를 부채질하는 듯한 발언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치인들 사이에서 “신 차관이 너무 욕심을 내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는 소리가 있었다는 게 정치권 주변의 전언이다.

이 같은 정황 때문에 신 전 차관의 수뢰의혹 보도가 나오자 그 진원지로 신 총장이 가장 먼저 의심을받았다는 후문이다.

신 총장과 신 전 차관 모두 암투설을 강력 부인하고 있지만 신 전 차관의 수뢰설 보도에 대해 검찰이 공식 대응을 하지 않은데다 신 총장이 확인을 요청하는 기자들에게 확인도 부인도 않는 반응을 보인 점 등을 들어 정치권과 검찰 내에서는 ‘신(愼)-신(辛) 갈등’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신 총장은 최근 측근에게 “내가 신 전 차관의 연루설을 흘릴 사람으로 보이느냐”며 “나는 절대아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의 한 관계자도 “검찰 수사팀이 브리핑 형식으로 검찰 내부 고위 인사의 수뢰 혐의를 발표할 수는 없는 일아니냐”며 “신 총장 보다는 수사상 필요에 의해 신 전 차관의 수뢰설이 내부에서 흘러나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검찰 내부에서는 광주일고 선후배로 ‘형님-아우’ 사이인 신 전 차관과 김대웅 서울지검장의 관계를 주목하고 있다. 경위야 어찌됐든 신 전 차관을 수사할 수 밖에 없는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인상보다는 언론이 제기한 의혹을 따라간다는 형식을 취하지 않았겠느냐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


신(辛)-김(金) 암투설

또 신 전 차관과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과의 암투 가능성도 주목되고 있다. 지난해 진씨에 대한 검찰내사전까지만 해도 신 전 차관과 김 전 차장은 각각 민정수석과 국정원 2차장으로 민감한 사안을 긴밀하게 협조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진씨에 대한 검찰 수사과정에서 김 전 차장의 진씨 구명로비 연루 의혹이 보도되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차장은 진씨를 어떻게든 불구속으로 처리, 사건의 표면화를 막으려는 입장이었던 반면 신 전 차관은 구속수사가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기울어 갈등이 증폭됐다는 것이다.

사정당국 관계자들은 “김 전 차장의 구명로비 연루 의혹이 불거진 직후 신 전 차관에게서 구속 불가피설이 나오자 김 전 차장은 ‘정권을 유지하려면 필요한일인데 신 수석이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있다’며 신 전 차관을 공공연히 비난했다”고 전했다.

공식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김 전 차장은 심복인정성홍 전 국정원 경제과장을 시켜 신 전 차관과 검찰 고위간부의 ‘뒤’를 상당히 깊숙이 캐고 다녔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검찰 내부에서 신 전 차관 수뢰설의 진원지로 김 전 차장을 지목하는 듯한 발언이 나오는 이유도 이같은 배경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 전 차장은 최근 검찰 수사에 반발, “혼자 죽지는 않겠다”며 여권 실세와 검찰 고위 관계자들을 향하는 듯한 발언을 하고 있어 김 전 차장의 소환 조사를 계기로 ‘진 게이트’는 예상 외의 ‘핵폭탄급 파장’을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판도라의 상자 열릴까

정치권과 사정당국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를 종합해보면 김 전 차장은 당시 진승현 정현준씨 등 ‘젊은 벤처기업가’의 돈을 끌어들여 정치자금 등으로 활용했고 금감원이나 검찰에 이들 벤처기업가들의 범법행위가 드러나지 않도록 청와대 민정수석실 검찰 금감원의 고위 간부들에게 막후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정원 감찰실이 올해 초 MCI코리아 회장 김재환씨 폭행사건과 내부 간부들의 ‘진 게이트’ 연루 의혹을 조사하고 나섰을 때 김 전 차장과 정 전 과장이 감찰실 고위 관계자와 생존을 건 암투를 벌인 것도 ‘거대한 비리 구조’의 은폐를 위해서였다.

따라서 김 전 차장이 검찰에서 함께 ‘궂은 일’을 하며 손을 맞췄던 권력기관 실세들과 진씨 돈을 받은 정ㆍ관계 인사들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할 경우 정국을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을 ‘판도라의 상자’가 될 것임이 틀림 없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신 전 차관이나 돈을 받은 여ㆍ야 의원들은 ‘깃털’에 불과할 것이란 관측과 함께 ‘거물’이 걸려들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검찰 내부에서도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구속된 YS정권 말기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며 진 게이트 재수사로 권력 실세가 사법처리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 새나오고 있다.

사정기관 관계자는 “업무상 핵심적이고도 민감한 정보를 얻을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던 이들 사정기관 고위 관계자들의 물고 물리는 치열한 암투로 권력에 의해 은폐됐던 ‘진 게이트’의 진실이 전부 드러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설명> 신광옥 전차관의 검찰 소환을 앞두고 신승남 검찰총장(가운데)과의 갈등설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정진황 사회부기자

입력시간 2001/12/23 15:08


정진황 사회부 jhchu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