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리스트' 쥐고 권력암투

검찰·국정원·민주당 "죽여야 산다" 이전투구

연일 불거지고 있는 각종‘게이트’관련 의혹들의 확산 이면에 여권 내부의 권력암투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가 잇따라 흘러 나오면서 여권의 상처도 더욱 깊어지고 있다.

이 같은 권력암투설은 좀처럼 확인되지도 않고 본인들도 극력 부인하고 있으나 여권내 여러 세력들간의 반목, 갈등 양상과 맞물리면서 상당히 그럴 듯하게 유포되고 있는 실정이다.


검찰ㆍ국정원 알력

권력암투설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검찰과 국정원의 알력이 사건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구체적으로는 ‘진승현 게이트’에 대한 수사가 일단락됐다가 최근 재수사를 벌이게 되면서 검찰과 국정원 사이에 쌓였던 앙금들이 폭발했다는 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국정원의 김은성 전 2차장이 진승현 게이트를 무마하기위해 활발이 움직였다는 점이 사실로 판명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설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즉 재수사를 할 수 없게 된 검찰이 내부 정보를 흘리면서 김은성 전 2차장에 대해 압박을 가했고 여기에 반발한 김 전 차장이 반격을 가하는 과정에서 정치권 연루 사실이 드러났다고 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김 전 차장은 낙마할 수 밖에 없었고 진승현 전 MCI 코리아 부회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사법처리가 불가피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른바 진승현의 로비대상이 된 정치권 인사들을 망라했다는 ‘김은성 리스트’도 이 권력암투설의 한 지류에 해당한다. 김 전 차장은 검찰의 재수사를 막기 위한 ‘위협용’으로 정치인 명단을 만들었으나 이 리스트의 존재가 새로운 논란거리가 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이 리스트와 관련된 여러 가지 해석 가운데 하나다.

김 전 차장은 검찰에 출두하기 직전 “그런 것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고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함으로써 여운을 남겼다. 리스트가 정말 있다면 그 폭발력은 상당할 수밖에 없고 검찰도 상황을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까지 수사 결과가 엉뚱한 방향으로 튈 수도 있다.

국정원 내에서 김 전차장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암투가 벌어져 그것이 검찰 재수사로까지 게이트 의혹이 번진 빌미가 됐다는 설도 국정원-검찰 갈등설과 함께 나오고 있다.


핵심부로까지 번진 ‘음모론’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신광옥 전 법무차관의 구속과 관련해 흘러 나오고 있는 설은 검찰 내부의 암투설이다. 이 암투설의 요체는 신승남 검찰총장과 신광옥 전 차관과의 이른바‘신-신 갈등’이다.

신 총장은 국회에서 자신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무산되기는 했으나 치명적인 권위의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그가 살아나갈 길은 ‘뭔가일을 크게 벌리는 수 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이 암투설과 관련이 있다.

즉 신 총장은 정치권이 연루된 대형 사건을 진두지휘하며 원칙에 입각한 철저함을 보이면서 야당의 표적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민주당내부에서 상당한 우려의 목소리가 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 관계자는 “솔직히 얘기해서 신 총장을 만들고 지키기 위한 여권의 노력은 다 알려진 사실인데 이제 와서 혼자 살자고 사건을 키워 간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여기에 신 전 차관이 차기 총장으로 지목되기도 하고 지난번 신 총장 임명 과정에서 신 전 차관이 경합을 벌였다는 미확인 설이 흘러 나오면서 신-신 갈등설은 더 그럴듯하게 포장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권력기관간, 또는 권력기관 내부의 권력암투설이 민주당 내의 각 정파간 권력암투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 점입가경이다. 민주당 내부의 권력암투설에서는 김홍일 의원등 김대중 대통령 아들의 이름까지 오르내린다.

이를테면 김 의원측이 게이트 연루 의혹에서 발을 빼기 위해 특정세력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음모설을 제기했다는 주장이나 김 의원이 권노갑 전 최고위원측과 게이트 의혹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서로 반목하고 있다는 설 등이 그것이다.


민주당 정파간 파워게임

동교동계 신ㆍ구파간의 권력암투설도 그럴 듯한 구석이 있다. 한때 여의도 국회 주변에 진승현씨로부터 돈을 받은 정치인의 이름이 실린 ‘괴 리스트’가 돌아 다닌 적이 있다. 이 괴 리스트에는 한나라당 의원들도 올라 있고 민주당 정치인들의 이름도 적혀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여기에 거명된 민주당 정치인 중에는 권노갑 전 최고위원측과 가까운 인사들이 집중적으로 나열돼 있다.

그래서 이 리스트를 두고 동교동계 신파가 그 동안의 세력다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포시킨 것이라는 거친 목소리가 나왔고 동교동계 신파 쪽에서는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라는 강력 부인의 얘기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밑도 끝도 없는 권력암투설이 여권에 특히 위험해 보이는 이유는 그 대부분이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세력을 쳐야 한다”는 계산법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또 내년 대권 후보 경쟁에서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여권 내부의 이전투구가 이번 게이트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는 쪽으로 몰아가려 한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이 같은 암투설에 대해서 여권은 “여권에 상처를 입히기 위해 야당측에서 의도적으로 부풀려 흘리는 얘기들”이라고 일축한다. 또 권노갑 전 최고위원, 김홍일 의원은 물론 동교동계 신파 쪽에서도 여당 내부의 갈등설을 일관되고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

다만 이 같은 상황과 관련해 민주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이미 여권 내부에 균열이 가 있는 상황에서 제기되고 있는 권력암투설이 그럴 듯하게 들린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면서“이러한 균열을 서둘러 봉합하지 않으면 앞으로 또 어디에서 새로운 문제가 돌출할 지 알 수 없다”며 한숨을 내 쉬었다.

이런 여권의 고민에 대해 한나라당은 물론 즐기는 입장이다. 한나라당 권철현 대변인이 “썩기는 다 썩었는데, 누가 덜 썩었느냐를 두고 서로 싸우는 형국”이라고 꼬집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고태성 정치부기자

입력시간 2001/12/28 11:23


고태성 정치부 tsg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