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20세기 부흥운동으로 후끈

라남의 봉화… 강성부흥 위한 운동으로 규정, 과학기술과는 거리감

연말을 맞은 북한은 ‘라남의 봉화’라는 다소 생소한 슬로건에 한껏 들떠 있다. 공장ㆍ기업소, 협동농장 마다 이 슬로건을 실천에 옮기자는 궐기모임으로 들썩이고 있다.

북한 언론들은 ‘역사적 사변’인이 기치를 더욱 높이 받들자고 연일 촉구하고 있다. 광범위하게 조직된 ‘기동예술선전대’들도 전례없이 활발한 예술활동으로 분위기를 띄우고 있고, 시인들은 새로운 슬로건을 찬양하느라 여념이 없다.

‘라남의 봉화’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8월 러시아 공식 방문을 마친 직후 현지 지도한 라남탄광기계연합기업소(함북청진 라남구역ㆍ이하 라남 탄광) 노동자들의 투쟁기풍을 전 사회에 일반화하자는 구호이다.

이 슬로건은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이 지난 달 22 일장문의 사설을 통해 “전당, 전국, 전민을 새 세기 강성부흥을 위한 총진격으로 부르는 새로운 비약과 혁신의 봉화”로 규정하면서, 국가적 목표가 됐다.

겉으로 보기에는 ‘라남의 봉화’가 제기된 후 북한 사회는 전반적으로 역동적기운이 넘치고 있다. 북한 언론에 따르면 내각의 국가계획위원회와 경공업성 일꾼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라남의 봉화’정신을 계승해 올해 당면한 경제 과업들을 무조건 관철한다는 결의에 차 있다.

물론 북한이 ‘봉화’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맨처음 치켜든 창조적이며 혁신적인 발기나 새로운 운동의 시작’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살려, 특정 지역의 수범사례를 일시에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고자 하는 선동적 의미가 내포돼 있다.

라남탄광을 따라 배우라

봉화의 발원지인 라남 탄광은 북한 간부들의 견학으로 쉴 틈이 없다. 지방 간부들이 대거 이 기업소를 찾은 데이어 최근에는 홍성남 내각 총리,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 중앙 간부들도 방문, 봉화를 본받자고 결의했다.

김정일의 현지 지도직후인 9월에는 제대군인 500명이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이 기업소에 추가 배치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설립된 라남 탄광은 잇따른 확장공사를 거쳐 종업원 4,000여명이 일하는, 건평 1만9,000㎡의 특급 기업소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이 기업소는 연간 연간 40여대의 광산ㆍ채굴기계와 250여대의 일반 산업기계를 생산해 동해안 지역의 광산이나 탄광에 공급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북한식 과학기술의 의미

‘라남의 봉화’는 과학기술 개발을 통해 경제를 일으켜 세우자는 일종의 부흥 운동이다.

노동신문이 주민들에게 본보기로 삼으라고 요구한 내용은 ▲완강한 실천력 ▲끊임없는사색을 통한 과학기술 개발 ▲유휴자재 활용 ▲열정적이고 진취적인 사업기풍 ▲적극적인 실리추구 등이다.

언뜻 보기에는 근검절약과 성실, 기술개발로 이익을 극대화하자는, 70년대 남한의 새마을 운동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라남의 봉화’가 요구한 과학기술은 21세기가 지향하는 과학과는 거리가 있다. 라남 탄광에는 아직도1950년대 구소련 등으로부터 도입한 기계들이 마치 새것처럼 돌아가고 있다.

‘라남의 봉화’는 바로 이것을 본받자는 운동이다. 전 김일성종합대 정치경제학부 교수였던 조명철(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 박사는 “북한의 산업이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30%에 불과한 공장가 동률을 높이는 것”이라면서 “‘라남의 봉화’는 곧 고장난 장비에 기름칠을 해 다시 돌려보자는 운동”이라고 말했다.


김정일의세 번째 봉화

‘라남의 봉화’는첫 ‘봉화’는 아니다. 김정일은 북한 경제가 밑바닥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1998년 3월 함북 김책시의 성진제강연합기업소를 시찰한 후 이 공장의 자력갱생 의지를 전국으로 확산하기 위해 ‘성강의 봉화’를 제시했다.

1950년대 중반 김일성이 남포시의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를 찾아 ‘천리마 운동’을 주창한 것과 같이, 철강산업에서 경제회생의 원동력을 모색한 것이다.

‘성강의 봉화’를통해 “북한 경제가 바닥을 쳤다”는 외부의 분석이 나온 가운데, 김정일은 지난해 1월 평북 신의주시에 있는 락원기계연합소를 시찰한 뒤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강성대국의 과업을 수행하려면 락원의 정신과 기풍이 필요하다”면서‘락원의 봉화’를 들고 나왔다.


화려한 2002년?

김정일이 ‘라남의 봉화’를 들고나온 이유는 그런대로 자명해 보인다. 전인민의 노력동원을 통해올해의 경제과업들을 실적위주로 완결하겠다는 것이다.

노동신문은 “라남의 봉화는 사생결단의 각오로 당이준 과업을 무조건 끝까지 해내는 결사관철의 정신”이라며 생산 목표달성에 매진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김정일은 이를바탕으로 내년에 예정된 ‘국가적거사’인 김일성 90회생일(4월15일)과 김정일 60회생일(2월16일), 조선인민군창건70주년(4월25일)을 화려하게 맞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결국 ‘성강의 봉화’와 ‘락원의 봉화’가 ‘고난의 행군’으로 일컬어지는 정치ㆍ경제적 시련극복을 강조하기 위한 슬로건이었다면, ‘라남의봉화’는 ‘강성대국’에 적극 나서겠다는 메시지인 셈이다.

‘라남의 봉화’는 사상동원이기도 하다. 북한은 이 운동을 통해 외부사조의 유입으로 인한 사상적 일탈을 막기 위해 주민 단속에 주력하고 있다.

북한언론이 최근 ‘자본주의침투=제국주의약탈’로 등식화하고 ‘자본주의 올가미설’,‘마약설’등을 강도높게 주창하는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와함께 북한은 6차남북장관급회담결렬 이후 그동안 자제해왔던 대남비난을 재개했다. 통일부당국자는 “‘라남의봉화’는 미국의 대테러 전쟁 후 심화하는 국제적 고립을 대내적 충성경쟁을 통해 극복하겠다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북한언론이 ‘라남의봉화’가 김정일의 ‘명철한 판단, 대담한 결단’으로 시작됐다면서 김정일찬양에 열을 올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봉화의 한계

그러나 북한식 노력동원은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다. ‘라남의 봉화’가 표방한 1차목표가 생산정상화이지만, 북한 혼자의 힘으로는 공장을 만가동(滿稼動)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은 노후설비를 재가동하기 위해 부품 등을 수입해야 하는데, 외화가 없다”고 말했다.

북한은 특히 ‘외부의 수혈’이 없이는 전력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형편이다. ‘혈맹’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으로 북한상품의 경쟁력이 점점 추락하고 중국의 대북지원도 줄어들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북한주민들은 이래저래 경제성 희박한 구호에 동원되고 있는 셈이다.

이동준 정치부기자

입력시간 2001/12/28 13:23


이동준 정치부 dj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