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야학] 꿈과 배움이 영그는 곳 '신림동 남부교육센터'

까막눈 할머니가 쓰는 '희망일기'

쉬는 시간이다. 백승상(18)군이 의자에 걸터 앉아, 여기 와서 배운 기타를 뚱땅거린다.

올해를 마감할 자체 공연 ‘남부인의 밤’에서 뽐낼 솜씨를 수업 틈틈이 갈고 닦아 둬야 한다. “저더러 ‘야학 죽돌이’래요.” 틈만 나면 야학에 와서 죽친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다니던 공고를 그만 두고 이곳을 스스로 찾아 왔다.


꿈을 이어주는 ‘꿈꾸는 아이들의 학교’

서울 관악구 신림 12동 736의 20 ‘남부교육센터’(3층). 우리 시대 야학의 의미와 방향을 선진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이다.

노동 야학(노야)이나 검정고시 야학(검야)이라는 기존이미지에서 탈피, 야학 공간이 지역 주민 모두를 위한 재교육 센터로 거듭나고 있다는 사실을 웅변하는 현장이다. 이곳서 피어나는 꿈과 희망은 질경이보다 더 질기다.

11월까지만 해도 ‘남부야학’으로 불리던 곳이다. 1975년부터는 남부 고등 공민학교로 불리웠던 이곳은 애초 1973년 난곡(신림7동) 지역에서 관악청소년실업학교로 출발했다.

승상군은 ‘꿈꾸는 아이들의 학교’라는 대체 학교에 열심히 다니고 있다. 하루 대부분을 여기서 보낸다. 매일 오후 2~5시 열리는 수업이 즐겁다.

특히 수요일은 오후 2시~3시20분 과학 1과목만 들으면 인근 신림고 운동장에서 신나는 체육 시간이 기다리는 날이다.

컴퓨터 7대가 준비된 컴퓨터실도 백군 등에게 소중한 공간. 석달 전 50만원에 사 들인 조립품이다. 중도 탈락생들에게 배움의 꿈을 이어주는 프로그램 ‘꿈꾸는 아이들’은 지난 9월 이곳이 서울의 34개 야학 최초로 시행했다.

“제도권 교육이 싫어 스스로 뛰쳐 나온 아이들을 위한 또 다른 학교입니다.” 교장 천성호(31)씨의 말이다. 월~금 오후 2시~3시20분 교사와 함께 국어, 영어, 과학, 철학, 수학 등 과목을 공부한다.

검정 고시를 위한 이론 수업이다. 이들 과목으로 이뤄진 1교시가 끝나면 3시30분~5시까지 실습 시간. 체육, 생활기술, 자치회의, 문화활동 등으로 이뤄져 있다. 지금은 자퇴 청소년 12명이 수업중이다.

“이제 야학은 지역 주민을 위한 교육 센터로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천 교장이 우리 시대 야학의 또 다른 위상을 압축한다.

야학이 법령상으로는 ‘비인정 학력 시설’ , 즉 아직 비공식부문에 묶여 있는 현실이지만 해낼 수 있는 부분은 많다는 대범함이 읽힌다. 마치 사투(사상 투쟁)라도 벌이듯, 노야(노동 야학)와 검야(검정고시야학)로 대별되던 70~80년대의 야학상을 벗자는 것.


지역주민을 위한 재교육센터로 탈바꿈

지역 주민 교육에도 청소년 교육 만큼의 힘을 쏟는 이유다. 서양사(화요일), 컴퓨터(목요일) 외에도 한글, 한문 등 생활과 직결된 강좌가 바로 중장년을 위한 것. 대학생 교사가 중심인 여타 과목과는 달리, 컴퓨터 강사는 진보넷(www.jinbonet.net에서 파견된 전문 강사다.

특히 전쟁통에 학교는 제대로 구경도 못 해 본 장년층을 위한 한글 교실에는 웃지못 할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중장년 학생들은 여기 오는 걸 주위에서 알까봐 일단은 쉬쉬 하죠. 야학 다니는 사실이 알려지면 서예나 영어 배우러 온다고들 해요.” 교사들이 전한다.

“난 늦은 줄 알고 헐레벌떡 왔네.” 초로의 아주머니가 오후 7시를 10분 남겨 두고 3층을 한달음에 올라온듯 숨을 몰아 쉬며 들어 온다. 즐거운 한글 수업 시간을 놓칠 수 없어서다. 아주머니 수강생은 11명.

“한글을 배워 갖고 성경을 읽고 싶어예.” 영덕 출신 김하기(67ㆍ신림 11동) 할머니. ‘여자는 배우면 난리난다’는 조부 때문에 학교 근처에는 얼씬도 못 했던 회한의 세월이 주름살마다 배어 난다. 남편은 기약없이 몸져 누워 있고 자녀들 마저 출가한 지금, 배우는 큰 즐거움이 있어 지금은 웃을 수 있다.


은행잎을 ‘믄행입’으로 써도 마냥 흐뭇

“8ㆍ15, 6ㆍ25탓에 못 배운 사람들 얼마나 많은데…. 장님들 눈뜨게 해주시는 선생님이 너무 고맙지요.” 글자를 몰라 은행가서 제일 답답하다는 이하강(59)할머니.

함께 글공부 하던 할머니들은 “글공부 선생님은 장님을 눈뜨게 하는 분”이라는 말을 신호로, 교실은 갑자기 공치사장이 됐다.“글 배우고 싶어도, 자식 부끄러워 말도 못 했다”는 푸념까지. 초등학교 1학년용 노트에 연필을 꾹꾹 눌러, 한 자 한 자 즈려 밟아간다.

“‘싶’은 어떤 말에 쓰죠?” 조금 생각하던 할머니 학생들, “쉽다” “신발” 등 생각나는 대로 떠드는 모양이 꼭 초등학교 신입생이다. 교사는 잘 안다. 이 시간의 배움이 시간이자, 한풀이 마당이라는 것을. 내친 김에 그가 칠판에다 쓰고 읽는다. ‘막걸리 마시고 싶다’고.

이 말에 교실은 다시 즐거운 소란통. “우리아저씨는 내가 막걸리 먹고 싶다고 쓴 거 보면 사 와.” 이 말을 누군가 받아치는데, “도망갈까봐.” 이래서 한글 수업은 다시 웃음 바다. 그러나 그 와중의 할머니 어느 누구도 공책에다 꾹꾹 눌러 쓰는 조막손짓을 멈추지 않는다.

“아까, 내가 잎이라고 쓰긴 썼는데 어떻게 쓰더라?” ‘은행잎’이란 단어를 ‘믄행입’이라고 써둔 어느 할머니 학생의 중얼댐에 누군가 킥킥 웃는다. 아예 초등학교 1학년 교실의 분위기다.


교사와 학생이 수평적 관계

1973년 빈민촌이던 난곡 지역(신림7동)에서 ‘관악청소년실업학교’로 문을 열었던 이곳은 1975년 서울시교위 인가로 ‘남부고등공민학교’로 변신한 이래, 지난 3월 현재 위치로 옮겼다.

현재 교사 29명(야학 10명, 꿈꾸는 학교 9명, 한글 교실 4명, 교육중인 신입 교사 6명)에, 학생 57명(야학 18명, 한글 교실 25명, 꿈꾸는 학교 14명).

여기서는 가르치는 사람을 가리켜 교사라는 권위적 이름 대신 강학이라는, 수평적 호칭으로 부른다.

6월부터 한글 과목을 맡고 있는 강학 최경란(23ㆍ서울대역사교육4)씨는 “수업이 없는 저녁 시간에도 여기 와서 학생들과 게임을 하며 함께 있는다”며“잘 데 없는 애들은 자취방에 데려가 재워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야학특유의 자율적이고 가족적인 분위기는 대안 교육에 관심을 둔 학생들의 관심사”라고 전했다.

이제 곧 제 27회 ‘남부인의 밤’이된다. TV 개그 프로 ‘봉숭아 학당’을 함께 패러디한 코믹 코너, 노래 자랑 등 인근 주민과 함께 하는 순서가 3시간 동안 한보따리다. 교사와 학생 등 80여명의 식구들이 마음 놓고 신나게노는 날이다. 22일 오후 7시 남부교육센터 옆 에어로빅 센터.

이곳을 비롯, 서울 시내 30여 야학의 올 세밑은 매우 기억에 남을 시간이 된다. 인기 연예인들의 공연 선물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소외 청소년 교육과 문화 공간 마련을 위한 릴레이 공연’.

30일 오후 4시와 7시 30분에는 경희대 평화의 전당에서 추억의 ‘봉숭아학당’ 팀이 나와, 추억의 풍경을 되살려 낸다.

제야의 두 콘서트 역시 같은 취지다. 김건모(31일오후 10시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ㆍ조관우( ″ 경희대 평화의전당) 콘서트가 그것. 이들 무대는 신진 공연 기획사 체인지 21(대표 이강명)의 기획 작품이다.

현재 남부교육센터의 보유액은 전세금 1,000만원이 전부. 매월 보증금 30만원을 비롯, 교재제작비, 도서구입비, 난방비 등 한달에 100만원으로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지금 가장 현실적인 목표는 전세금 4,500만원을 확보, 40평짜리 건물로 옮기는 일.

이번 공연 수익금중 2,000만원을 따로 떼내, 신림동에 25평의 청소년 교육ㆍ문화 공간을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세워 둔 체인지 21의 복안이 큰 힘이 될 것 같다. 대안 교육 기관인 서울 당산동 하자센터도 이 취지에 공감, 1,000만원을 지원키로 합의한 상태다.(02)855-2550.

장병욱 주간한국부기자

입력시간 2001/12/28 13:41


장병욱 주간한국부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