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여는 사람들](31) 한국과학기술원 물리학과 신승철 교수(下)

"과학자의 첫째 덕목은 치열한 노력"

80년대 초 미국 명문 사학인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던 신승철 교수는 최종관문인 학위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벽에 부딪혀 실의에 빠졌다.

신 교수는 당시 납(Pb)과 비스무스(Bi)로 구성된 다층박막의 초전도현상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었다. 연구목적은 다층박막에 의해 비스무스의 구조를 바꾸어 초전도현상이 일어나는 온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1년쯤 연구를 하던 그는 납과 비스무스는 상온에서 확산현상을 일으켜 다층박막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이 두 금속으로 이루어진 다층박막의 초전도현상에 대한 연구도 여의치 않다고 판단해 논문지도 교수인 존 힐리어드 교수를 찾아갔다.

재료과학분야의 거장으로 꼽히던 힐리어드 교수는 연구 중간과정에 관여하거나 조언을 하지 않고 좋은 결과가 있어야 지도를 해주는 스타일이어서 신 교수처럼 한국형 주입식 교육이 몸에 밴 한국인 출신에겐 부담스러운 ‘사부’였다.

“힐리어드 교수에게 연구과제의 불가능성을 설명했지만 문전박대만 당했습니다. 연구에 관한 한 마디의 조언은 없고 내가 실험이 서툴러서 그렇다며 계속 더 연구해보라고 했습니다.

여러 번 찾아가서 하소연을 하자 힐리어드 교수는 박사학위에 대한 정의를 내려주면서 엄하게 훈계를 했습니다. 박사학위란 이제까지 남들이 하지 못한일을 스스로 찾아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고요. 그 순간 힐리어드 교수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기가 불가능할 것 같다는 절망감이 엄습했습니다.”


포기직전에 새로운 연구테마로 돌파구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미국 유학이후 그는 밤낮없이 공부하던 연구실을 나가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머리만 쥐어뜯고 있었다. 박사학위 논문은 여려 명이 심사해 학위수여 여부를 결정하지만 논문지도 교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지도교수의 ‘노(No)’ 는 곧 학위 취득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다.

헌신적으로 뒷바라지를 해준 아내와 당시 한 살을 갓 넘긴 딸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곤 했다. 경기고, 서울대(공대응용응용물리학과), 한국과학원(현 한국과학기술원ㆍ물리학 석사), 한국표준연구원(병역특례) 등 한국에서 승승장구하며 엘리트코스를 걸어온 그였기에 충격은 더 컸다.

심지어 입학허가의 유효기간이 남아있던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장학금 가능성을 알아보는 등 학교를 옮기는 방안도 생각했다.

이 때 그에게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당신은 해낼 수 있다”는 아내의 위안과 격려였다. 아내의 격려는 “여기서 적응하지 못하고 물러나면 다른 대학에서도 성공할 보장이 없으니 여기서 끝까지 해보자”라는 의욕을 돋아나게 했다.

과감하게 지도교수가 요구한 연구테마를 포기하고 대신 새 테마를 결사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테마 헌팅에 나선지 1개월. 당시까지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반도체와 반금속 다층박막이 떠올랐다. 지도교수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다른실험실에서 박막제조 물질을 빌려서 시료를 만들었다.

시료의 성공여부를 X선 회절기로 검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10분. 그러나 신 교수에게 이 10분은 마치 몇 시간처럼 길고 초조한 순간이었다.

힐리어드 교수에게 달려간 그는 대뜸 시료의 구조분석 결과를 내밀었다. ‘내가 지시한 재질의 결과냐’고 묻는 힐리어드 교수에게 그는 ‘내가 처음으로 만든 신소재’라고 흥분된 어조로 대답했다. 회심의 미소까지 지을 수 있었다.

이후 그의 유학생활은 탄탄대로였다. 7편의 실험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했고, 박사학위논문심사도 여유있게 통과했다. 그를 한때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냈던 힐리어드 교수도 “당신 같이 우수한 학생을 지도할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고 축하했고, 그는 “혹독하게 훈련시킨 결과”라며 화답할 수 있었다.


주위만류 뿌리치고 한국행

그는 1989년 중요한 결정을 한다. 박사학위를 받은 뒤 곧바로 이스트만코닥연구소에 입사해 5년간 일하면서 상당한 기반을 잡았기 때문에 선뜻 한국행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미국에서 실무경험을 쌓은뒤 귀국해 고국의 대학 교수로서 교육과 연구를 한다는 것이 당초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리도 잡히고 백인과의 경쟁에서 자신감도 생기면서 미국에 주저앉아 버릴까 하는 마음이 문득문득 들기도 했습니다. 연구소에서 일한지 3년 정도 지나니까 연구하던 광메모리 분야에서 연구소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저의 연구결과가 부각되기 시작해 국제학회에서 초청강연도 여러 차례 하고, 이 분야의 양대 국제학술회의의 조직위원으로 활동할 정도가 됐으니까요.”

그러나 그는 “조만간 실장으로 승진시켜 주겠다”, “휴직으로 처리할 테니 언제든지 돌아와도 좋다”, “돌아가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는 회사측의 적극적인 만류와 미국에 더 머물자는 가족들의 바람을 물리친채 연구소에 사표를 제출하고 연봉이 3분의 1 수준에 불과한 KAIST 교수로 부임했다.

더 나아가 귀국하자마자 상당수 사람들이 편법을 써서라도 가지고 싶어하는 미국 영주권까지 미국 대사관에 반납해버렸다. 미국에 대한 미련의 싹을 아예 잘라버린 것이다.

“한국과학원 졸업생들은 고국의 과학기술 분야 발전을 위해 미력이나마 기여함으로써 보은해야겠다는 책임감이 있습니다.

과학원은 제가 대학을 졸업할 때쯤 대통령 특별법으로 설립됐는데 병역특례와 등록금 전액면제, 학자금 지원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그래서 한국고아원이란 말도 있었죠. 국가가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고 공부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한국에서 교수를 하겠다는 당초 계획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뭐라 할까 고국에진 신세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국제학술지에 끊임없이 논문게재

신 교수는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많이 게재하기로 정평이 있다. 최근 들어서도 99년 13편, 2000년 22편, 20001년에 25편을 단독 또는 스핀정보물질연구단의 공동연구로 유명 학술지에 ‘출격’시켰다.

그가 꼽는 비결은 크게 5가지.

‘열심히 연구하고, 가급적 이슈가 될만한 최근의 문제를 연구한다. 논리적으로 접근하고 좋은 연구 툴(tool)을 사용한다. 그리고 결과를 잘 요리한다. 여기서 말하는 요리는 논문집필을 의미한다.

논문제목은 5초짜리 광고, 초록은 30초짜리 광고라는 자세를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학술지 심사위원은 많은 논문을 살펴야 하기 때문에 제목과 초록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5대 비결중에서도 ‘열심히’를 가장 중요한 대목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놀면서 연구도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며 “과학자가 연구를 소홀히 하는 순간 이미 과학자로서 자격을 상실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국의 명문사학인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도 수십 건을 제안해 한건 정도 지원받을 수 있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고, 정상급연구자도 주말까지 연구실에 나와 불철주야 연구해야 정상을 유지할 수 있다”며 “어떤면에선 우리가 미국보다 외부의 지원을 받기가 쉬운 편이므로 연구비와 지원 부족을 탓하기에 앞서 연구자 스스로 더욱 치열하게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철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1/12/28 16:08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