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두편의 ‘나의 아버지’

2002년 지방선거나 대통령 선거에 여성 후보들이 많이 등장 할 것 같다. 어떤의미에서건 한나라당 박근혜 부총재의 당내경선 출마는 뜻이 있다.

좀 엉뚱하지만 이런때에 2001년 12월 7일 여연구(전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가 쓴 ‘나의 아버지 여운형’이 책으로 나왔다.

이어 12월 20일에는 리민(李敏)이 쓴 ‘나의 아버지 모택동’이 중국에서 나온지 1년만에 번역되어 출판됐다. 만약박 부총재가 당후보가 아니고도 출마한다면 ‘나의 아버지 박정희’를 책으로 갖고 나오면 어떨까.

여연구의 ‘나의 어버지’와 리민의 ‘나의 아버지’는 한민족의 지도자였던 아버지를 다룬 공통성에 비해 너무 색다르다.

여운형은 통일을 꿈꿨지만 이를 달성하지 못하고 1947년 8월 서울에서 암살된 건국준비위원장이었던 한국의 한 아버지. 모택동은 49년 10월부터 76년 9월까지 중국을 다스린 ‘마오 주석’으로 불린 중국의 한 아버지.

아버지라는 단어는 같아도 이들을 사랑한 딸들의 아버지에 대한 회상, 정치적 관찰, 존경, 비판, 변호는 폭과 깊이가 다르다. 다만 두 아버지가 일부에서 잘못 이해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잡겠다는 효심은 같지만.

여연구는 1927년 상하이에서 아버지가 임정과 관계없이 중도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할 때 태어났다. 그녀가 3살때 여운형은 일본 헌병에 체포됐고 1930년대 보통학교(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중앙일보 사장으로, 체육회 회장으로, 손기정 베를린 마라톤 우승 일장기 말살사건 주도자로, 최린 이광수 등을 배반자 변절자로 규탄하는 국내에서 가장 이름높은 독립운동가였다.

여연구가 보통학교 3학년때 남산의 신궁에 소풍놀이를 갖다가 쓴 작문을 보고 아버지는 “그래 일본이 번영할 것과 황군의 승리를 빌었단 말이냐”고 물었다. 딸이 선생이 그렇게 쓰도록 했다고 하자 여운형은 어린딸에서 “글을 언제고 솔직하게 써야 한다. 네 생각을 그대로 써라. 점수를 덜 받고 선생이 벌을 세우면 서지 말고 그냥 오너라”고 가르켰다.

이런 엄한 아버지도 딸의 기억에 의하면 인정어린 아버지이기도 했다. 고등여학교에 다닐 때 스케이트 선수였던 딸이 시합에 나가면 체육회장인 그가 직접 와 딸의 스케이트화 끈을 매주기도 했다.

이에 비해 모택동의 딸 리민이 기억하는 스케이트에 얽힌 기억은 또다른 것이다. 1937년 연안에서 태어난 리민은 마오의 두번째 부인인 허쯔첸(賀自珍ㆍ1909-84)사이에 본 첫딸. 모스크바에서 어머니와 함께 있다가 1949년에야 장칭(康淸)이 부인이 되어있는 중남해(중국의 청와대)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모택동은 43살이나 되어 징깡산 게릴라 시대의 여장부였던 허와의 사이에 난 이딸을 무척 사랑했다. 그러나 색다르게 어린 딸을 다루었다.

중남해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게 하면서 그는 한번도 끈을 매어 준 적이 없었다. 스케이트를 타면서 20여번 이상 엉덩방아를 찟고 14살이 되어서야 겨우 일어서서 얼음을 지칠 때까지 회갑 직전의 늙은 아버지는 지켜만 보았다.

그러나 1954년 어느날 리민이 중학생때였다. 1938년 소련으로 떠난 후 남편을 보지못한 허쯔첸이 옛 남편 마오 주석의 라디오 시정연설을 듣다가 병석에 누웠다는 이모가 쓴 편지가 중남해에 있는 딸에게 전해졌다.

딸은 아버지에게이 편지를 전했다. 리민은 기록하고 있다.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나도 마음이 아파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엄마의 병 때문에 상심하고 있었으며 줄곧 엄마를 그리워 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딸은 그 자신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사랑의 다리 역할을 해야함을 깨달았다. 그러기 위해서는질투심 많은 새 어머니 장칭에게 수모를 당하더라도 이를 아버지에게 고자질 하지 말아야 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이 아버지는 사랑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여연구와 리민 사이에는 10년 이란 연령차이가 있다. 식민지에의 해방을 진보적 민주주의를 통해 이루려는 아버지(여운형), 이를 공산주의 무력투쟁으로 이루려는 아버지(모택동)의 딸이라는 차이가 뚜렷하다.

그래서인지 여연구의 ‘아버지’에는 정치비평가적 시각, 이데올로기적 인식이 깊다. 그녀에게는 여운형이 46년 9월에 맡긴 김일성이란 새로운 아버지가 북한에 생겼다. ‘나의 아버지’의 상당부분은 32년 여운형이 감옥에서 나온 이후 김일성의 빨치산 활동에 관심을 가졌으며 점차적으로 좌경화했다는 기술이 차지하고 있다.

특히 36년 보천보 사건후 비밀리에 김일성이 빨치산 활동을 벌였던 백두산을 찾아가 “백두산에서 비쳐오는 눈부신 광망을 보셨다”고 적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공산주의 이념을 신봉하고 지향했다”고도 적고 있다.

여연구가 91년 11월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이란 주제의 세미나에 참석하러 서울에 왔을 때다.

우이동 아버지 묘소를 참배하며 속으로 울부짖었다. “어느 누가 아버지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습니까. 어느 놈이 내 나라를 이꼴로 만들었습니까. 아 원통하고 절통합니다.” 그녀의 책에는 이승만, 장택상, 김구, 박헌영이 ‘어느놈’으로 암시되어 있다. 그러나 ‘마오 주석’의 딸 리민은 소설가 적으로 아버지를 봤다. “모택동은 나의 아버지며 동지이며 스승이며 나는 아버지의 딸이며 무엇보다 아버지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어린 어른이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2002/01/02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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