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거침없는 '돌'에 끌려가는 이창호

이창호의 '미완성의 승리- V100'(28)

제2국은 이튿날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다. 국제대회 사상 연 이틀 대회를 치르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것도 이세돌에게는 행운이다. 잠시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또 한판을 마주쳐야 하니 이창호로서는 고육지계다.

상대가 누구인지, 자신이 어제 바둑에서는 왜 졌는지 좀 추스르고 나가야 하건만 '패자(敗者) 이창호'에겐 그 시간마저도 운 때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세돌은 1국 때나 똑 같았다. 천진난만하여 간혹 웃음이 흘러나오면, 사람들이 많으니 웃어서는 안 되겠다는 듯 피식거리기를 수차례. 이세돌에게는 주위의 시선이 즐겁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창호의 얼굴과 몸은 아래로 아래로 하염없이 숙여지고 있었다.

이창호가 첫 판을 진 것이 과연 얼마 만이던가. 아마 98년 마샤오춘(馬曉春)에게 진 이후로 처음이 아닌가 싶다. 99년 춘란배 결승에서 사상 처음으로 준우승에 머물던 때에도 첫 판은 이기고 들어갔다.

이세돌로서는 흑을 들었으니 이판 마저 이기면 정말이지 타이틀이 수중에 들어오는 것을 감지 할 수 있다.

첫 수를 잠시 뜸들이던 이세돌은 이미 어젯밤 포석에 대한 구상을 끝낸 탓인지 선뜻 선뜻 손이 나간다. 밀어붙이기 정석을 시도하여 거의 4분의 1을 정석으로 깔아버린다. 국면을 축소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밀어붙이기 정석은 요즘 초 유행을 하는 포석으로 공부가 되어있지 않으면 곤란하다. 거의 50수 가까이 끝나자 검토실의 중론은 흑이 활발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세돌이 좋다는 얘기. 정석 도중 이창호의 과격한 수가 한번 등장했는데 그 한 줄 위로 두어야 했던 것을 비슷하다고 본 것이 화근이었다. 그래서 초반은 흑의 리드 속에 진행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창호에게서나 검토실에서나 어떤 초조감같은 것은 없었다. 이창호가 워낙 후방전이강하고 또 이세돌도 속기파인지라 어떤 실수의 개연성을 배제 못하는 그런 심정이었다. 다만 흑이 또 앞서있다고 해도 그 차이는 대단한 것이 못된다는 측면이다.

그런데 왜 앞서는 것이 무조건 좋으냐 하면 뒤지고 있는상대는 그 차이를 부풀려서 한참 뒤지고 있는 것으로 오판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데에 있다. 즉 그 이후의 반면 운영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형세판단의 귀재'라는 이창호도 불리함 앞에서는 흔들리는 것일까.

실리를 야금야금 챙겨가던 이세돌은 중반이후 갑자기 상변에 뛰어든다. 그 상변이란 것이 주변에 아직도 흑이나 백이나 못살아있는 형국에서 또 뛰어든 것이다. 따라서 이세돌은 그 침입수는 단박에 검토실에서 무리수라는 판명을 받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대목에서부터 이세돌의 놀라운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창호도 하는 수없이 쌍점을 두어 연결해 가는 것은 막아놓고 전투에 임한다. 이것은 이창호가 아무리 전투를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검토실은 '흑의 무리한 싸움'이라고 결론 짓고 있었다. 그러나 이세돌은 뜻밖에 승부호흡을 보여준다. 웬만한 기사 같으면 몇 시간도 부족할 승부처에서 수읽기가 완전히 끝났다는 듯 뜻밖에 노타임 행진을 벌이는 것이다. 그에 따라 이창호도 손 따라 두어가고. '뚝딱 뚝딱 뚝딱….'

여기서 이창호가 흔들렸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새까만 후배가 감히 나를 상대로…, 뚜벅뚜벅 두어올 때는 뭔가 있다. 아, 뭐가 있을까?' 이창호는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문제는 생각을 하는 동안 손길을 멈춘 것이 아니라 따라가면서 생각을 한 것이다. 손 따라 다닌 것이다.


[뉴스화제]



·이창호 9단 2001년 최우수기사로 선정

이창호 9단이 2001년도 최우수기사로 복귀했다. 12월 21일 한국기원 이사장실에서 개최된 2001바둑문화상선정식에서 이창호 9단은 선정위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최우수기사로 선정되었다.

이창호 9단은 제4회 응씨배, 제5회 LG배 세계기왕전 등 2개 국제기전 우승, 한국바둑사상 최초의 연간 우승상금 10억 및 개인통산 100타이틀 돌파 등의 활약으로 높은 점수를 받아 MVP에 올랐다.

한편 이 9단은 95년부터 99년까지 최우수기사상을 5회연속 수상했으며, 지난해에는 이세돌 3단이 최우수기사로 선정됐었다.

* 다음은 각 부문 수상자 명단.

최우수기사상 : 이창호 9단 우수기사상 : 조훈현 9단 감투상 : 서능욱 9단 신예기사상 : 박영훈 2단 여류기사상 : 루이 나이웨이(芮乃偉) 9단 아마추어기사상 : 하성봉 아마7단 연승상 : 이창호 9단(17연승) 다승상 : 조한승 5단(56승)

진재호 바둑평론가

입력시간 2002/01/02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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