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최영희

목소리만큼 예쁜 얼굴과 가수, 영화배우, 탤런트, MC, DJ 등 다재다능한 활동으로 60년대말 대중들을 사로잡았던 최영희. 연세대에서 작곡을 전공하던 여대생의 대중가수로의 외도는 당시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유유상종이랄까. 음대 출신 조영남과는 찰떡음악커플로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시켰다. 훅 불면 날아갈 듯 가녀린 몸매였지만 그녀가 들려준 예쁘고 청순한 보컬은 뭇 남성팬들의 보호본능까지 일으킬 만큼 매력적이었다.

또 장안이 온통 사이키델릭음악으로 진동하며 빠져들고 있을 때 오히려 정통 스탠더드 포크, 팝송으로 정면승부를 걸었을 만큼 음악적 소신도 강했다. 최영희는 그저 노래만 잘했던 가수라기보다는 작곡은 물론 피아노, 바이올린, 기타등을 직접 연주하며 노래에 음악적 열정을 담아냈던 대중가수였다.

게다가 뛰어난 연기력으로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점령했던 만능 엔터테이너로 '연예계를 통틀어 가장 교양있는 여성'으로 살아남아있다.

1948년 서울 충무로에서 피아노상 <음악사>를 경영했던 부친 최성두씨의 2남4녀중 막내로 태어나 곱게 자란 최영희. 삼촌은 최고의 레코드 녹음기사로 이름을 날리던 최성락씨다. 음악적 환경에서 성장하여 남산초등학교때부터는 KBS어린이 합창단, 무용특별활동을 했을뿐만 아니라 전교 어린이학생회장을 맡기도 한 영특한 아이였다.

예능뿐만 아니라 학업성적도 뛰어나 이화여중시절엔 전국 영어웅변대회에서 2위로 입상하고 이화여고로 진학해서는 음악부장을 맡으며 합창단 지휘를 하기도 했다.

중학시절부터 시작한 바이올린뿐만 아니라 피아노, 기타 연주에 <어린시절>이란 노래작곡까지 자유자재로 해낸 최영희는 여고3학년때는 MRA한국대표로 일본을 다녀올 만큼 활동적인 소녀였다. 이 당시 즐겨듣던 노래는 개성이 강했던 레이 찰스, 벨라폰테, 넷킹콜, 존 바에즈 등의 팝송이었다.

연세대 작곡과에 입학하면서 68년 동양TV '청춘잼버리'출연을 계기로 대중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욕심많은 최영희는 연기활동과 더불어 은은하고 달콤한 스탠다드 팝송과 포크송을 부르며 가수활동도 병행했다.

순수음악도의 대중가수로의 변신은 장안의 관심만큼이나 집안의 찬반양론을 불러왔다. 어머니와 형제들의 완강한 반대를 아버지의 절대적인 지지로 넘을 수 있었다.

"순수음악만큼 대중음악도 깊이가 있을 거예요. 저는 대중가요도 예술이라고 못박을 수 있지만...되도록 통속적이고 저속한 면만은 탈피하여 진짜음악을 하려 합니다." 최영희가 가수데뷔를 하면서 밝힌 포부다.

데뷔곡은 가장 좋아했던 가수 넷킹콜의 팝송곡인 '모나리자'. 이후 충무로와 명동에서 조영남 등과 어울리며 본격적으로 포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 당시 장안의 참새들은 늘 붙어 다니는 두사람의열애설을 퍼트렸다.

최영희는 '이성으로서의 애정이 아닌 우정'임을 강조했지만 조영남의 첫사랑으로 그녀를 기억하는 팬들은 많다.

또한 신중현이 음악감독을 맡으며 청소년층에게 인기를 끌었던 음악영화 <푸른사과>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하며 영화배우로도 첫발을 디디며 팔방미인의 면모를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맑고 시원한 목소리로 들려준 노래는 <작별>과 외국번안곡 <하얀집>.

69년 신학기를 맞으며 휴학을 했다. "스승인 나운영 선생님을 저버릴 수 없었지만 예능계통은 혼자 공부해도 될 것 같았고 어려서부터 하고 싶었던 창작공부를 해보고 싶었다"는 이유였지만 본격적으로 대중예술을 하고픈 갈증을 풀기위해 내린 결단이었다.

최영희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며 이봉조의 창작곡들을 즐겨불렀다. 베테랑 작곡가인 이봉조가 작편곡을 해준 그녀의 독집음반 <최영희 애창곡집-신세기.가12254.69년8월17일>은 당시 온나라를 온통 뒤덮었던 사이키델릭에 반발하여 기획한 스탠더드팝송 형식의 음반.

수록된 10곡중 <너만을 위하여>등 6곡의 창작곡은 이봉조악단이 세션을 맡았고 최대 히트곡인 <잃어버린 사랑> 등 4곡의 외국번안곡은 최영희가 직접 기타를 울리며 노래한 무드곡들이다. 머플러를 멋들어지게 두른 음반자켓은 69년3월 한국일보사에서 발행한 <주간여성> 표지사진이었다.

음반발표후 대중들의 사랑을 한껏 받은 최영희는 드라마 <너무 하셨어> <마지막 낙엽>의 여주인공으로 주제가를 부르는 등 인기방송프로 <원 투 드리 고> <쇼쇼쇼> <백화가요쇼>에 주요게스트로 나서며 자신의 곡명을 딴 TBC라디오프로 <너만을 위하여>의 DJ까지 맡으며 내재된 끼를 한껏 펼쳐보였다.

대중예술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자 70년 신학기때 미련없이 3학년으로 복학, 피아노 실기에 전념하며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같은 소품들을 작곡했다. 때마침 모든 가족들은 하와이로 이민을 떠나 홀로 한국에 남아 학업을 마쳤다.

대학졸업후 일본 상지대 출신 교포 신세환과 결혼하며 미국으로 떠나기전 73년6월 은퇴작품으로 KBS TV드라마 '은하의 계절'에 출연하기도 했다.

60년대말 보수적 사회환경속에서 순수음악을 전공하던 여학생이 자신이 꿈꾸던 대중예술을 위해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감행한 변신은 신선했다. 인기절정의 순간에 흔들림없이 본연의 학생신분으로 돌아가버린 그녀의 모습은 인기만을 위해 노래하는 가수들이 넘쳐나는 요즘 더욱더 아름답고 진한 여운을 안겨주고 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2/01/04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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