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들여다보기] 2002라는 숫자에 거는 새해

2002년이다. 새천년을 맞이한다고 들떴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두번 해를 넘겨 새로 맞이한 해가 2002년 임오년이다.

2002년은 숫자상으로 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해이다. 앞으로 읽어도 2002년이고 뒤로읽어도 2002년이다. 아마도 우리세대에서는 다시 이런 해를 맞이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1991년도 이러한 해였다.

어릴 때 영어 참고서를 뒤지다 보면 영어 단어 중에 앞으로 읽으나 뒤로 읽으나 같은 단어나 문장 찾기 등이 심심풀이 퀴즈로 나오곤 했다.

앞으로 보나 뒤로 보아도 같은 숫자는 수학적으로도 매우 흥미 있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아무런 숫자나 택해서 이를 역순으로 쓴 다음, 두 숫자를 더하면 바로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똑같은 숫자를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12를 선택하였다고 하자. 12를 역순으로 쓰면 21이 되는데 12와 21을 더하면 33, 즉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같은 33이라는 숫자가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금년은 숫자만으로 보면 양극단이 합쳐서 조화를 이루는 한해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미국에서 한국에 계시는 어른들에게 인사를 올리다 보니 전해에 세배를 하는 셈이 된다. 꼬마들이 전화통을 붙잡고 “할아버지 할머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는 것을 보면 저만한 나이 때면 할아버지 할머니께 한참 응석을 부릴 땐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부모님을 모시고 지내지 못하는 아쉬운 마음을 삭이기 어렵다.

어차피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똑같은 하루인데 공연히 인간들이 새해다 전해다 만들어서 앞뒤를 갈라놓는 어리석음에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하는 밤이다.

미국의 New Year's Eve는 커다란 행사이다. 대개의 경우 가족들이 함께 모여 자정을 기해 샴페인을 터뜨리고 새해가 밝아오는 것을 환영한다. 동네마다 혹은 집집마다 폭죽을 터뜨리기도 하고 각 도시마다 축제 분위기에 빠진다.

그러나 금년에는 콜로라도의 덴버를 포함한 20여 곳 이상에서 이런 행사가 취소되었다. 911 테러이후 침체된 경기와 테러의 위험이 주요한 원인이라고 한다.

이 행사 중에서도 가장 관심을 끄는 곳이 바로 뉴욕 타임 스퀘어의 새해맞이 행사이다. 그러나 50만여 명이 참가했다고 하는 이번 행사도 과거와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모든 장식이 성조기를 상징하는 붉은색, 흰색 그리고 푸른색으로 바뀌었고, 경찰 병력 수가 예년의 두배로 늘었다.

6개월 전부터 예약해야 하는 호텔의 새해맞이 패키지 관광이 금년에는 쉽게 그것도 더 싼값에 구할 수 있는가 하면, 높은 건물에는 경찰 저격수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사람들 손에는 맥주 캔 대신에 촛불이 들려 있었으며, 추운 날씨를 탓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금속 탐지기 검사를 하는 것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밖으로 보다는 안으로 새해를 맞이하려 하는 것이 예년과 달라진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2002년 새해를 미국인들은 좀더 진지하게 맑은 정신으로 맞이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9월 11일 뉴욕의 세계 무역센터와 워싱턴의 펜타곤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애국심으로 새해를 준비하면서 한아름 가득 찬 파란 달을 보면서 아침을 맞은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일년 총 국민 생산이 하루 이틀 퍼붓는 폭탄값도 안된다는 나라와 싸움을 한다면서 미국의 오만함과 자의성을 비난할 수도 있다. 서구문명 우월주의에 바탕한 제국주의적 행패라고 볼 수도 있다. 이유도 모르고 폭격을 받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한편 911 테러로 그을린 건물의 잔해를 지나면서 감당할 수 없는 냄새를 맡아왔던 사람들은 역시 테러와의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

마치 12와 21의 관계 같은 것이다. 그러하지만 굳이 헤겔의 변증법을 빌지 않더라도 2002년과 같은 아름다운 숫자는 서로 정반대로 씌어진 숫자들의 합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2002년 올해는 뭔가 더 좋은 일이 많이 생기는 해가 될 것 같다.

박해찬 미 HOWREY SIMON ARNOLD & WIHTE 변호사

입력시간 2002/01/0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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