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 급물살, 일본은 "배 째라"

달러당 140엔까지는 방치 전망, 아시아 각국 환율인하경제 부를수도

한승수 외교통상부 장관은 지난달 27일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 신문과의 회견에서 급물살을 타고 있는 엔저에 대해 강한 우려를 표했다.

그는 일본 당국이 엔저를 용인하고 있어 달러당 145엔까지도 엔화가 떨어질 수 있다면서 이를 그대로 방치하면 중국 위안화에 대한 평가 절하 압력이 커지는 등 아시아통화의 평가 절하 경쟁을 부른다고 경고했다.

이어 엔저가 일본 경제에 커다란 효과를 미치지 못하는 반면 아시아 각국의 정치ㆍ경제 양면에 충격을 던진다며 일본 정부는 엔저보다는 구조개혁을 앞당겨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우리 산업계가 자동차, 조선, 전자·전기, 기계, 철강 등 주요 분야에서 일본과 치열한 수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엔저의 악영향을 감안하면 통상 주무장관의 당연한 반응이다. 또 일본 당국이 엔저를 묵인하고 있다는 인식도 옳다.


일본경제 회복기까지 하락계속될 듯

그러나 시장에서의 수요·공급이 통화 가치를 결정하는 변동환율제하에서 당국의 의지가 통화 가치에 미치는 영향에는 한계가 있다.

현재 진행중인 엔화 약세에서 일본 당국의 용인 태도는 부수적 요인에 그칠 뿐이다. 더욱이 일본 당국만이 아니라 주요 선진국이 모두 엔저를 용인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엔저 흐름을 되돌리기는 어렵다.

따라서 일본 정부에 대해 엔저 저지를 촉구하는 것보다는 ‘1달러= 140엔’ 수준의 엔저를 상정, 수출 경쟁력 유지 대책을 세우는 것이 정책 대안으로서는 보다 실현가능성이 크다.

엔화는 12월25일 달러당 130엔대로 하락하면서 경종을 울렸다. 새해 들어 도쿄 외환시장이 처음 문을 연 4일에도 달러당 131엔대에 거래됐다. 이대로라면 2001 회계연도 결산기인 3월말에는 달러당 135~140엔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관측이 무성하다.

현재의 엔저는 무엇보다일본 경제의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했다. 일본의 경기 침체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장기 경기 곡선은 90년대 이래 꾸준히 내리막길을 걸어 왔다.

그러나 엔화 가치는 단기 경기 곡선과 겹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일본의 단기 경기는 2000년 10월을 고비로 하강 국면으로 접어 들었고 아직 골이 어딘지를 모르는 상황이다.

2000년 10월까지 달러당 105~110엔에 머물렀던 엔화도 2000년 11월부터 하락세에 접어 들어 12월말에는달러당 120엔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지난 1년간 작은 등락을 거듭하면서도 전체적으로 하락세에서 벗어나지 못해 달러당 130엔선을 돌파했다.

일본경제가 현재의 침체 국면에서 회복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은 대체로 올 가을 이후로 관측되고 있다. 따라서 그때까지 엔화의 하락은 피하기 어렵다.

이런 전망은 엔화의 실질 구매력에서도 확인된다. 95년 4월 엔화는 달러당 79.95엔이라는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때를 기준으로 삼으면 현재까지 엔화는 60% 이상의 평가 절하를 겪은 셈이다.

그런데도 95년을 100으로 한 소비자 물가지수는 현재 95까지 내려와 있어 구매력에 여유가 있다. 물가하락과 경기 후퇴가 꼬리를 무는 현재의 디플레이션 악순환이 이어지는 한 엔화에 대한 평가는 높아지기 어렵다.

한편 일본의 금리는 오랫동안 실질 연 0%에 머물러 왔다. 금리가 통화 가치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수준으로도 엔화는 수요를 유인할 힘이 없다.

또 고전적으로 통화 가치를 결정하는 주요인으로 여겨져 온 무역거래를 감안하면 엔화의 가치 하락 여지는 여전하다. 주요 무역 상대국의 통화에 대한 엔화 환율을 무역 규모로 나누어 가중 평균한엔화의 실효 가치(95년=100)는 현재 98을 밑돌고 있다.

그러니 “현재의 엔저는 일본 경제의 기초 조건을 반영한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일본당국의 설명이 허언이 아니다.

물론 시장이 늘 합리성을 지향한다는 시장 원리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실제 단기 시장에서는 구조적 요인보다 심리적 요인이 판을 좌우하는 예가 많다. 일본 당국이 잇따라 엔저용인 자세를 보이고 나서는 것도 시장 심리를 겨냥한 명백한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


디플레이션 국면 벗어나기 위한 정책

현재의 엔저 급물살은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재무성 재무관이 지난달 10일 “최근의 엔저는 경제의 기초 조건으로 보아 지나친 엔고가 수정되는 과정일 뿐”이라고 발언한것이 도화선이 됐다.

시오카와 마사주로(鹽川正十郞) 재무장관도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그는 지난달 13일 “엔화는 고평가돼 있으며 저평가 방향으로의 유도를 고려해야 한다”는 발언에 이어 21일 “엔화의 가치하락은 결코 부자연스럽지 않다”, 25일 “엔저가 조금 더 진행되더라도 적정 수준”이라고 연발탄을 쏘았다.

자민당 지도부도 지난달 27일 “달러당 140엔 정도는 허용 범위일 것”이라며 “더러 달러당 150엔대를 거론하는 사람도 있다”고 밝히고 나섰다.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경제·재정 담당 장관이나 야나기사와 하쿠오(柳澤伯夫) 금융담당 장관도 보조를 맞추었다.

일본 경제의 최대위험 요소인 동시에 세계 경제의 시한폭탄이기도 한 현재의 디플레이션 국면을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정책 대안으로 엔저를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엔저는 수입 물가의 상승과 수출기업의 수익 개선이라는 이중의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10%의 엔저는 제조업의 기업 수익을 5% 개선시키고, 소비자 물가지수를 0.3% 끌어 올린다는 계산도 나와 있다.

미국 등 주요 선진국도 이를 용인하고 있다. 장기 호황에 따른 거품이 꺼지기 시작한 미국으로서는 달러화의 가치 하락에 의한 해외 자금의 유출을 막아 경제 연착륙에 성공해야할 과제를 안고 있다.

유러화의 본격적 통용에 들어 간 유럽도 유러의 저평가는 원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세계 2위 규모의 일본 경제의 침체가 계속될 경우 세계 경제가 함께 휘청거릴 수 있다는 ‘일본발 세계경제 위기론’이 일본의 엔저 용인을 지지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달 18일 “설사 엔저를 부르는 한이 있더라도 일층의 양적 금융완화를 통해 디플레이션을 막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엔저 유도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온 일본은행도 지난달 19일 추가 금융완화를 단행, 시중의 엔화 공급을 크게 늘려 가고 있다.

일본과 주요 선진국의 이런 태도는 엔화가 더욱 떨어지리라는 전망을 시장에 심었다. 전통적으로 환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선물로 엔화를 확보했던 일본의 수출 기업조차 엔화확보를 포기, 엔저 흐름을 막을 모든 장치가 사라진 상태다.


해외자본 '일본 팔자'등 위험성 많아

다만 급속한 엔저에 대한 경계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경계론은 아직 기세는 약하지만 엔저 흐름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유일한 장치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엔저 경계론은 엔저의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며 오히려 파멸적인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는 데 착목하고 있다.

실제로 엔저에도 불구하고 최대 수혜자여야 할 첨단 기업의 주가는 여전히 하락세를 거듭하고 있다. 생산 거점의 활발한 해외 이전으로 수출 기업의 수입 비율이 늘어남에 따라 과거에 비해 엔저의 효과가 한정적이다.

반면 엔저가 외화를 기준으로 본 일본 주식·채권 가격의 하락이라는 점에서 해외 자본의 ‘일본 팔자’를 부를 위험이 있다. 97~98년의 금융위기 당시 해외 자금의유출을 예로 들어 시장에 엔과 주식, 채권이 동시에 떨어지는 ‘트리플 하락’이 나타나면 해외 자금이 빠르게 이탈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지난해 일본주식시장에서 거래액 기준으로는 해외 투자자들의 비중이 50%를 넘어섰다. ‘일본 팔자’에 따른 주가 하락은 기업의 평가손을 불러 수익을 더욱 악화시키고, 다시 주가와 엔화 가치를 떨어뜨린다.

전문가들은 그 분기점이‘1달러=140엔’선이 될 것으로 예측한다. 일단 엔화가 달러당 135엔에 접근하면 ‘엔저 위기론’이 대두하고, 그 이상으로 하락하면 본격적인 논쟁과 함께 시장의 치열한 공방전이 빚어질 것이란 전망이다.

도쿄=황영식특파원

입력시간 2002/01/09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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