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질서 달러 ·유로 양극체제로

화폐통일 '유로화 실험' 순조로운 출발, 거대통화권 형성으로 달러 위협

“우리는 마르크화와 많은 추억을 쌓았다. 향수를 느낀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향해 나가야 한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2002년 신년사에서 이렇게 밝혔다. 슈뢰더총리가 말한 ‘미래’는 유로화 통용을 통한 새로운 유럽 건설을 뜻한다.

지금 유럽은 한창 실험중이다. 1월1일부터 유로랜드(유로화 전환에 참여한12개국)의 3억4,000만 인구가 자국의 화폐를 버리고 유로화란 단일화폐를 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3년전부터 국제무역이나 은행간 결제 수단으로나 이용되던 눈에 보이지 않던 화폐가 신년부터 일반 사람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는 유로권 화폐 통일, 즉 유로통화권의 탄생을 의미한다.

오랜 1국 1화폐 전통을 깨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마르크프랑 리라 등 각국 화폐에는 특유의 역사와 주권, 정체성 등이 담겨 있다.

물론 유럽권 공용화폐는 유로화가 처음은 아니다. 2,214년 전인 기원전212년 로마제국에서 테나리우스를 발행했다. 테나리우스의 유통범위는 광대했지만 기본적으로 1국 1화폐 개념의 돈이었고 유로화는 국경이 엄존한 상태에서 유통되는 다국 1화폐다. 이런 점에선 유로화 본격 유통은 진정한 화폐 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실험의 출발은 좋은 편이다. 혼용기간을 거쳐 2월말까지 각국 화폐가 유로화로 전환될 예정이다. 지난 3년간의 많은 준비와 홍보 덕에 대체로 순항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가상승·돈세탁 등 일부 부작용도

물론 혼란과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유적의 도시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요즘 집값 상승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2001년 9월말 현재 주택 가격은 평방미터(㎡) 당 36만9,568 페세타. 2000년 말에 비해 20%나 상승했다. 스페인 정부는 마드리드의 주택가격 이상 급등 현상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유로화 도입을 꼽고 있다.

지하경제 규모가 10%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는 스페인에서 일부 부유층과 마피아들이 유로화 통용을 앞두고 부동산 매매를 통한 ‘돈 세탁’에 적극 나서면서주택 가격 상승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국가들도 정도와 방식만 다를 뿐 돈세탁이 활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일부 시민들은 유로화 통용이후 체감물가가 올랐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소규모 상점마다 가격을 유로화로 환산하면서 슬그머니 값을 올리고있다는 것이다. 상인들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독일 에센의 한 술집 주인은 “유로화와 마르크가 혼용되는 2월말까지 손님이 환전을 위해 일부러마르크를 내도 유로화로 잔돈을 줘야 한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혼란을 틈탄 제품 가격 상승과 이에 따른 인플레이션 위험, 자국화폐와 유로화가 동시에 통용되는 2개월간 검은돈의 세탁문제, 위조지폐 증가 등도 우려되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축제분위기다. 유로 국가의 주요 도시 곳곳에 붙어있는 ‘유로여 어서오라’ 는 플래카드가 유로인들의 기대와 희망을 담고 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초치기’를 즐겨하는 프랑스인답게 흥분된 어조로 “유로화는 유럽의 승리”라며 “유로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더 높은 성장, 더 많은 일자리, 더 나은 구매력, 더 강한 프랑스를 의미한다” 고 말했다.


유로랜드 내 기업비용 절감 등 효과

화폐통일은 유럽인들이 1958년 유럽경제공동체(EEC) 출범이후 44년에 걸쳐 공을 들여온 경제통합 노력의 백미이며 동시에 상당한 실익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당장 유로화 통용으로 유로랜드 간 가격비교가 가능해져 가격이 평준화하고 구매의 선택폭도 크게 넓어질 전망이다. 싸고 좋은 물건을 사기가 쉬워지는 것이다.

이에 따라 우량기업은 더욱 성장하고 경쟁력이 떨어지는 기업은 도태되는 차별화 현상이 심화되고 유로 국가간의 기업 인수합병도 촉진될 전망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메트로, 딕슨, 킹피셔 등 유럽 10대 유통업체의 시장점유율이 1999년 36%에서 2002년 말 59%로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유로랜드 내에 복잡한 환전절차나 환전 수수료가 사라지고 환리스크도 경감돼 기업의 비용이 절감되고 투자 및 자본조달 여건도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 환전비용만 해도 상당한 비용절감 효과를 가져온다. 독일경제인협회는 비용절감 규모를 매년 국내총생산(GDP)의 0.5~1%(200억~400억마르크)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유로화는 특히 채권시장을 상당히 활성화시켜 기업의 자금조달에 큰 힘이 될 것으로 보인다. 주식시장은 여전히 각국별로 운영되기 때문에 채권에 비해 시너지 효과가 떨어지겠지만 유로랜드 내 기업 인수합병이 활발해지면서 범유로, 더 나아가 범 유럽 증시의 필요성이 대두될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함께 거대 유로권의 출현으로 환율변동에 따른 불확실성이 줄어들면서 유로각국은 환율방어를 위해 구태여 지금처럼 거액의 외환보유액을 결사적으로 유지할 필요가 없게 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유로화 통용과 함께 구조개혁이 이뤄질 경우 유로지역 경제가 2010년까지 3%포인트 추가 성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역내 뿐만 아니라 지구촌 경제에 미치는 효과도 상당한 것이 분명하다. 최대 관심사는 유로화가 어느 정도 수준의 기축통화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유로랜드의 GDP 규모는 8조6,000억달러 세계 GDP의 28.3%에 달한다. 미국(9조2,000억달러)에 버금가는 초대형 단일시장이다. 유로랜드 12개국은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 미국 GDP의 70%에 해당하는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

영국 덴마크 스웨덴 등 유로화 전환에 동참하지 않는 유로 국가들이 가세할 경우 그 비중은 90%를 상회한다.


미국 달러화의 최대 경쟁자로 들장

유로화는 명실상부한 미국 달러의 경쟁자가 되어 미국의 세계적 지위를 잠식할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미국이 엽기적인 무역 적자국가이면서도 달러화 절하 같은 환율 걱정을 별로 하지 않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미국 달러가 세계 유일의 위기관리용 준비통화이고, 세계 각국은 비상시를 대비해 달러 사재기를 해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로화는 유로랜드는 물론 서유럽과 동구,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범유럽경제권에서 주된 무역결제통화로 자리잡으며 달러체제를 위협하는 거대한 유로 통화권을 형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유로화는 영국 등이 가세할 경우 2003년께부터정착단계에 진입, 본격적인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국제금융질서도 달러와 유로의 이극체제로 바뀔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아직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국익차원의 경쟁심을 느껴서인지 미국 쪽에서 악담에 가까운 비관론도 제법 제기되고 있다.

우선 각국의 경제관리가 사실상 불가능해져 금융혼란이나 실업대란 같은 비상시에 정부가 적절한 안전판 역할을 하기가 힘들어 위기관리가 어려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심지어 하버대의 마틴 펠드스턴 교수는 “유로화가 역사와 국적 및 종교에 바탕을 둔유럽 국가들 간의 해묵은 적대감을 증폭시킬 것이다.

또 미국의 세계 패권을 약화시키고 국제 군사관계를 복잡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로시장 공략 위한 전략마련 시급

한편 유로화 전환에 발맞추어 역내 기업은 물론 일본 기업들도 발 빠르게 변신을 하고 있다. 프랑스 르노는 최근 벨기에 공장을 폐쇄하고 생산 거점을 프랑스와 스페인으로 집중했고 필립스는 원가 경쟁력을 상실한 서유럽 공장을 축소하는 대신 폴란드, 헝가리 등에 생산라인을 구축했다.

소니는 체코와 헝가리 내 생산거점을 대폭 확충했고 미쓰비시는 유럽내 9개 거점을 총괄하는 유럽통합판매법인을 네덜란드에 설치했다.

유로화 전환은 유럽의 자급자족 능력을 배가시켜 한국과 대만 등 수출경제형 국가에 마이너스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유로 시장 방어와 공략을 위한 새로운 전략이 시급히 마련되어야 할 때이다.

김경철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2/01/09 13:50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