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이 벤처다] 뒷바라지에 모든 것 걸고 전력투구

뜨면 '마이너 삶'서 벗어나 '신분상승 꿈' 이뤄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50여년간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 실현’과 ‘경제 개발’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꾸준한 발전과 성장을 거듭했다.

그 결실로 정치적으로는 군부 독재가 사라지고 문민 정부가 들어섰으며, 경제적으로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으로 가입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했다. 적잖은 굴곡이 있었지만 정치ㆍ사회적 ‘안정’과 경제ㆍ문화적 ‘성장’이라는 큰 흐름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해 온 것이다.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은 우리 사회를 ‘변화 예측이 가능한’ 선진 국가로 상당히 접근시킨 반면, 하부를 형성하는 중ㆍ하류 계층에겐 신분 상승의 기회를 빼앗는 이중적인 양태를 보였다.

자본주의가 고도화하고 사회의 틀이 규정화하면서, 그 틀을 박차고 나가기가 더욱 어려워진 것이다. 이제 수억원 짜리 복권이 당첨되는 등의 경천동지할 상황이 벌어지지 않으면 지금의 사회ㆍ경제적 계층이나 신분을 한단계 도약하기가 힘들다.

2년전 불어 닥친 벤처 열풍은 중ㆍ하류 계층에게 잠시나마 신분 상승의 희망과 가능성을 던져주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 벤처 거품이 걷히면서 일장춘몽이 돼 버렸다. 상류층과 하류층의 소득 격차는 점점 더 커지고, 그로 인한 빈곤층의 상대적 박탈감은 예전보다 더욱 심해지고 있다. 이제끼니를 굶는 절대 빈곤층은 거의 없지만, 장밋빛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줄었다.


중ㆍ하류 계층의 마지막 희망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는 중ㆍ하류층사람들에게 ‘이제 내 세대에서는 힘들다’라는 무력감을 던져 주었다. ‘구조조정’ ‘정리해고’ ‘계약 연봉제’ 등 IMF 외환 위기 이후 한꺼번에 몰아친 급격한 사회적 변화는 소시민들을 절망과 자포자기로 몰아가는 양상이다.

아무리 발버둥쳐 봐야 태생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자괴감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더 커지고 있다.

이런 절망의 벼랑 끝에 몰린 소시민들사이에서 새로운 바람이 일고 있다. 이른바 자식에게 가족의 미래를 거는 ‘반포지효(反哺之孝)족’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예로부터 까마귀는 어미가 늙으면 새끼가 먹이를 물어다 주며 봉양한다고 하여 반포조 라고 했다. 최근 자신의 2세에 대한 필사적인 지원을 통해 자신의 못다 이룬 성취욕과 사회적 신분 상승을 꾀하려는 부모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이른바 ‘자식 사업’이 번창하고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밥은 굶어도 자식 공부만은 시킨다’며 2세 교육에 유난히 집착했다. 경제발전이 되면서 이런 의식이 상당부분 퇴색되기도 했다.

‘기회만 잘 잡으면’ ‘줄만 잘 서면’ 얼마든지 내 힘으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다는‘한탕주의’적인 기대가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IMF 이후 우리 사회에 끼어 있던 거품이 걷히고, 직장인들의 고용이 불안정해지면서 그 같은 한탕주의적 기대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 결과 이 세상에서 자식 만큼 확실한 투자 대상은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지고 있다. 흔히 ‘요즘은 부부끼리도 못 믿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내 피가 섞인 혈육은 천륜으로도 끊을 수 없는 그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에서다.


“힘닿는데까지 밀어주겠다”

전과 달라진 사회 분위기도 부모의 의지를 부추기고 있다. 예전 부모들은 오직 공부를 잘해 관직에 오르거나 국가 고시를 통과하는 것을 최고의 출세로 생각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성공의 길은 다양하게 열려 있다. 문화 예술 연예 스포츠 등 어느 분야에서든 최고만 된다면 성공은 보장돼 있다. 이제 부모들은 굳이 학교에서 1등 하는 모범생만으로 키우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성공에 대한 보상 규모가 크게 빠른 예체능 등의 분야도 개의치 않는다.

2일 모공중파 방송의 일일 연속극 아역 탤런트를 뽑는 오디션이 벌어지고 있는 한 연기 학원. 테스트에 응시하러 온 여자 아이들과 이들의 부모들로 대기실은 발 디딜 틈 조차 없이 붐볐다. 좁은 복도에까지 밀려 나온 이들은 대기 시간 동안 면접에 대비한 예행 연습을 하느라 분주했다.

지난해 모 방송국의 아역 탤런트로 출연한바 있다는 한이(12)양의 어머니 김미경(36)씨는 “아이를 탤런트로 키우기 위해 3년 전부터 운영하던 레스토랑도 그만둔채 사실상 딸 아이의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다”며 “촬영이 끝나면 새벽 2~3시가 넘는 날도 많지만 본인이 원하고 소질도 있어 힘닿는 데까지 밀어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연예 엔터테인먼트사인 MTM의 황의노 이사는 “예전에는 연예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아 본인 의사가 강하지 않으면 일을 지속하기가 힘들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부모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자식들을 연예계로 진출 시키려한다”며 “최근에는 조기에 적성을 테스트하려는 부모들이 늘어나 아이들의 연령도 점점 낮아지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사회 분위기가 이처럼 바뀌면서 요즘 부모들 사이에서는 자식의 적성을 조기에 찾아내 적극 지원하려는 성향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강남과 신도시 일대에서는 조기 영재 교육 사업이 큰인기를 끌고 있다. ‘혹시 내 자식이 영재가 아닌가’ 생각하는 부모의 기대와 호기심을 이용하는 학원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고 있다.

이들 학원에는 영재 테스트를 통과한 학생 만이 들어갈 수 있는데 실제로는 보통 아이들을 영재로 착각하게 만드는 경우가 다반사다.

경기 신도시의 한 영재학원의 원장은 “부모들은 거의 대부분 자기 자식은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아이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며 “영재 학원 중 일부가 이런 심리를 이용해 폭리를 취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예ㆍ체능계학원은 문전성시다. 아이들의 예술적, 신체적 재능을 조기에 파악해 집중 육성하려는 부모들이 늘기 때문이다. 일산 신도시에 있는 올림픽스포츠센터는 어린이 체능단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5~7세 아동을 대상으로 수영 태권도 골프 볼링 등 각종 스포츠를 가르친다. 한 학기 수업료만 90만원이고, 간식비와 교재비까지 합치면 반년에 150만원은 족히 드는데도 강좌는 연일 만원 사례다.

해외 조기 유학은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된 유행병이 돼 버렸다. 많은 부모들은 세계화 시대에서 살아 남으려면 외국어가 필수라는 생각에 자식들을 낮선 땅으로 보내고 있다.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 일찌감치 아이들을 정글 속으로 보내 혹독히 단련 시키겠다는 생각이다.


자신감 잃어버린 소시민의 현주소

중견기업의 간부인 Y씨(44)는 벌써 수년째 이산가족 아닌 이산가족으로 살고 있다. 맞벌이를 하는 Y씨 부부는 5년전 중학교 2학년이던 아들을 캐나다로 보낸 데 이어 2년 전에는 중2였던 딸 아이 마저 혼자 호주로 유학을 보냈다.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도 비교적 현지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어 Y씨는 매우 만족해 한다.

하지만 명절이나 생일에 아이들이 없는 한적한 집에서 부부 단둘이 있을 때 몰려드는 외로움은 가눌 길이 없다. 또 이들이 서양식 사고 방식에 동화돼 노년에 부모를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한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또 한번 변하고 있다. 자식에게라도 미래를 걸어 보고 싶은 절박한 심정이 재촉하는 변화다. 이는 곧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한 ‘자신감의 상실 시대’에 살고 있는 대다수 현대인들의 현주소이다.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2/01/09 17:57


송영웅 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