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달동네 지키는 벤처스타 '하늘사랑' 나종민 사장

#1. 벤처스타와 비행청소년

아무도 오지 않았다. 회사에 있던 여분의 컴퓨터들을 가져다놓고 전용선을 깔고, 주윗분의 목공기술 도움까지 십시일반으로 함께 보태 마련한 무료 IT(정보기술) 직업교육 강의실, 그런데 정작 초대받은 주인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공문을 보낸 학교에서도 ‘장난치냐’고 했다. 공부 잘 하는 아이들도 많은데 왜 하필 말썽이나 부리는 문제아들을 원하냐고도 했다.

마침내 찾아온 10여명의 아이들, 세간에선 ‘비행청소년’이라 부르는, 말하자면 중ㆍ고등학교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퇴학을 당한 뒤운 좋으면 ‘총잡이’ (주유소 급유 아르바이트생)로 근근히 살아가는 청소년들이었다.

그들을 데리고 컴퓨터 교육을 시작한지 약 두달째, 그런데 이제 아이들이 웃고 있다. 표정이 밝아졌다. 프로그래머의 장래희망까지 품으며 진지하게 자신의 장래를 준비하고 있다. 무엇보다 직원들의 도움이 가장 크다.

자발적으로 강사로 나선 직원 7명이 매주 세차례 퇴근후 달려가 아이들을 가르쳐준다. 맨처음 도무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우릴 바라보던 아이들앞에서 나는 그렇게 말했었다.‘나도 너희들과 같았다, 너희들과 다를게 없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2. 나도 너희들과 같았다.

나는 확실히 운 좋은 놈이다. 흔히들 인생의 성공은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운구기일 같다. 감각과 패기 하나로 겁없이 덤벼든 인터넷 사업, 더이상 아쉬움이 없을 만큼 큰 성공을 거뒀다.

인터넷 채팅 사이트(www.skylove.com)로 많이 알려져있는 ‘하늘사랑’ 대표 나종민(37), 그게 내 명함이다. 불과 얼마전까지도 누구든 뛰어들기만하면 당장 일확천금이 안길 것처럼 도처에 거센 벤처열풍이 불어닥친 것도 사실상 나의 성공사례도 한몫을 한 신기루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도 그 아이들과 같았다. 학창시절 죽도록 공부가 싫었고, 숱한 말썽도 일으켰다. 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때까지도 끊임없는 싸움질로 부모님속을 태운 문제아였다. 원인은 외부에 있었다.

인천시청 공무원으로 재직하셨던 아버지는 2형제중 장남인 나를 스스로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게 해야한다며 어려서부터 격투기를 배우게 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도 태권도부터 쿵후, 유도, 특공무술 등 배워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체력좋고, 몸놀림도 남다른 나를 주위의 ‘주먹’ 친구들이 가만두지 않았다.

중학교때부터 술과 담배를 알았고, 폭력서클에도 휩쓸려 다녔다. 날이면 날마다 싸움박질에 부모님이 상대방의 병원비를 물어준일도 숱하다.

대학시절까지도 술자리 후 패싸움을 벌여 상대의 6개월치 병원비를 댔다. 가출도 몇번, 고교때엔 경포대에서 노느라 1주일간 사라진 적도 있고, 대입 재수중에도 간다온다 말한마디 없이 집을 나가 부모님이 가출신고까지 하며 아들을 찾기도 했다. 철없던 시절의 부끄러운 기억들이다.


#3. 열등생의 비애

중학교때 성적은 컨닝을 하면 반에서 30등, 컨닝을 안 하면 48등이었다. 주관식 문제는 손도 대지 못했고, 객관식문제는 ‘찍기’로 일관했다.

고교에 진학할 때까지도 나는 중1과정에 나오는 영어 발음기호조차 모르고 있었다. 공부 못 하는 놈의 설움을 톡톡히 겪었다.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열등생에겐 매서운 힐난과 체벌이 따르지만 우등생에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관대하게 넘어가주던 선생님들. 꼭 그런 경험때문이 아니라도, 나는 성적순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가 지금도 싫다.

인문계 고교에 가려고 해도 학교에선 원서를 써주지 않았다. ‘네 실력에 무슨 인문계냐’며 선생님은 한사코 실업계 고교만 강권했다.

결국 어머니까지 직접 선생님을 찾아뵈었지만, 내 형편없는 성적과 행적들을 들추며 손사레를 치는 선생님 앞에서 어머니는 울고 말았다.

‘내가 죄인’이라며 선생님 앞에서 고개를 떨군 어머니. 나는 남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보란듯이열심히 공부해서 다시는 어머니가 이런 모욕을 당하지 않게 하겠다고 독하게 결심했다.

그 해 겨울, 나는 우등생 친구들의 ‘시다바리’노릇까지 해가며 처음으로 공부다운 공부를 시작했다. 악착같이 공부했지만 워낙 기초가 부실해 좀처럼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진학후 학급석차 35등으로 시작한 성적은 3학년말에 이르러서야 6등쯤으로 올랐다. 그리고도 학력고사에선 180점. 재수끝에 인하대 수학과에 입학한 뒤엔 다시 공부를 제쳐둔 채 놀기만 했다. 어쨌거나 공부는 재미 없었다.


#4. 겁없이 모험에 뛰어들다.

대학졸업후 생명보험 회사와 의류부자재 회사에서 약 4년동안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인터넷을 접하게 됐는데, 그것을 보자마자 ‘분명히 3년안에 뜬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후 사표를 내고 컴퓨터 전공자도 아닌 내가 인터넷 사업을 하겠다고 하자 친구와 선배 등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말렸다.

더구나 그때는 IMF상황하였다. 다들 3개월안에 망할거라고들 했다. ‘가능성이 있다’며 응원해 준 사람이라곤 아버지뿐이었다. 그리고 우리 부자의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현재 우리 회사가 위치한 봉천동 건물은 ‘하늘사랑’의 눈물과 땀이 담긴 곳이다. 1998년 7월,모두 8명의 인원으로 우리는 이곳 7층 허름한 방 한칸에서 보이지않는 꿈을 향해 우리의 인생을 걸었다.

회사에서 먹고 자며 일했다. 라면과 짜장면으로 끼니를 떼우며 새우잠을 자면서도 불만이 없었다. 맨처음부터 ‘흑자가 날 때까지는 누구도 월급을 받지 않는다’는 약속으로 시작해 실제로 월급이라는 것을 손에 쥐어본 것은 창업후 10개월이 지나서였다.

어렵게 준비한 초기 자본 7,000만원은 창업 3개월만에 바닥나 버렸다. 그때부터 나는 돈을 꾸러 다녔다. 은행 문턱은 서럽도록 높고, 담보가 없으니 사채조차 빌릴 수 없는 절박한 상황, 대부분의 친구들이 외면하는 가운데서도 아무 이유도 묻지않고 돈을 빌려준 선배 등, 정말 힘들때 내게 도움을 준 12명의 ‘천사’를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그저 먹고 살기만 해도 좋겠다고 시작한 사업이 그처럼 큰성공을 터뜨릴줄은 몰랐다. 우리가 만든 채팅 사이트가 가동되자마자 폭발적인 가입자수를 기록했고, 얼마뒤 전국 1만여 PC방으로부터 당당히 이용료를 받는, 최초의 인터넷 유료화 사례가 되었다.

2000년 8월엔 ‘한글과 컴퓨터’사와의 인수합병을 통해 시가 100억원대의 주식을 확보, 나는 모험자본의 가능성을 성공적으로 입증시킨 인물로 부담스러울만큼의 주목을 받았다. 나 자신도 믿을수 없는 대역전이었다.


#5.세상과의 약속.

사업을 시작할때부터 나는 하느님과 몰래 약속한게 있었다. ‘내가 먹고 살만큼만 돈이 생기면 그때부턴 가진 것들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돌리겠다’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것이 있다.

지하철 등에서 구걸자들이 지나가면 아버지는 꼭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어린 내 손에 쥐어주며 내가 직접 바구니에 넣고 오도록 시켰다. 종종 이런 말씀도 하셨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겐 내일이 없다. 네가 도움을 줘야겠다 마음을 먹었을때 당장 실행하지 않으면 그 다음 네가 찾아갔을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수도 있다.”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려 하셨는지 나는 잘 알 수 있다.

우리가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곧바로 봉사활동을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다.

청소년들을 위한 이번 IT 직업교육이 있기전에도 1999년 10억원을 출연해 하늘사랑복지재단을 설립해 아예 틀을 만들어두었다.

회사안에서도 전직원의 동의하에 모두 매달 월급에서 일정액을 떼어 복지회 기금으로 전환, 사회봉사단체인 ‘나눔의 집’을 통해 봉천동 달동네에서부터 구로, 난곡 지역 등 가까운 이웃들을 돕는 데 함께 힘을 보태왔다.

심장병 어린이, 성인환자의 수술비를 대기 시작한 것도 그해 겨울부터다. 그전부터 매주 수요일 어려운 이웃들의 사연이 나올때마다 방송을 들은 후 그곳에서 가르쳐준 계좌번호로 만원이든 얼마든 내 주머니에 있는대로 털어 성금을 입금하던, 내가 즐겨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러던 중 심장병 환자의 사연을 듣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수술비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었다. 이런 얘기를 하려니 참 부끄럽다. 이러자고 이웃을 돕는 것도 아니고, 나만 아니라 우리 직원들, 또 다른 많은 사람들도 같은 일을 하는데.


#6.벤처, 그 끝없는 어드벤처

2001년은 창업 이후 내게 최대의 위기였다. 이미 세상에선 ‘IT산업은 죽었다’는 비장한 선고가 들리고 있었고, 실제로 그토록 명망을 떨치던 벤처영웅들 상당수가 그사이 퇴장해 버렸다.

특히 1세대 벤처기업인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생존자는 몇 명되지도 않는다.

우리 회사도 지난해 유무선 연동 채팅서비스 개발에 이르기까지 지난 3년간 끊임없이 새로운 수익모델을 찾아 부지런히 후속타를 내놓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운명이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작년은 특히 힘들었다. 내부적으론 IT산업의 위기감에 동요된 일부 사원들이 빠져나가면서 일대 구조변화가 있었고, 바깥에선 새롭게 추진한 사업이 외부 변수에 의해 예상보다 오랜 시간을 끌면서 정신적, 물질적으로 힘든 상황이 이어졌다.

그 상황에서도 ‘이러다 회사에 돈이 떨어지면 어떡하냐?’는 물음 앞에 ‘우리가 월급을 안 받고 일하면 되지 않냐’고 대답하던 직원들. 이런 직원들 덕분에 ‘하늘사랑’은 굳건하다. 다시 안정기에 돌아온 요즘에도 나는 그 가난하지만 용기하나로 버티던 창업때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다.


#7.여보, 조금만 기다려.

오늘도 나는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 예나 지금이나 귀가하는 횟수라곤 한달 평균 세번이 고작. 그사이 훌쩍 자라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아들은 작년에 내게 전화를 걸어 그렇게 말했다.

“아빠, 우리 집에 놀러와!” 그 말을 들었을때 눈물이 왈칵 솟았다. 나는 더이상 아들에게 ‘함께 사는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잠시 놀러오는 사람’으로 각인된 것이다.

지금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가, 사업이고 뭐고 모든 일을 집어치우고 당장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한참동안 견디기 힘들었다.

아내에겐더 미안하다. 사업이 어렵던 때도, 좋았던 때도 가장 노릇 한번 변변히 못해온 나를 항상 묵묵히지키며 이해해 준 사람이다.

지금도 우리집은 평택의 18평짜리 서민아파트 그대로다. 살림도 신혼때 마련한 2헤드짜리 낡은 비디오에 20인치 TV 등, 성공 전이나 이후나 우리 가족의 삶에선 외형적으로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나보다도 욕심이 없는 아내. 내 계획대로 올해 또는 늦어도 내년 봄까지 우리 회사를 코스닥에 상장시키고 나면, 그렇게 한숨 돌리고 나면 나도 이젠 충실한 가족의 일원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가 몹시 기다려진다.


#8. 친구에게

동창 하나가 내게 물었다. “너를 보니까 말이다, 내 자식한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해야 되냐, 말아야 되냐?” 학교때 지지리 공부도 못하고 사고만 치던 내가 성공했으니, 그들도 좀 헷갈리긴 헷갈릴 것이다.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건, 어쨌든 나의 치기어린 일탈속에서도 ‘네 인생, 네 마음껏 살아보라’고 끝까지 나를 믿으며 기다려주신 부모님이 계셨다는 것이다. 똑똑하고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야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 도와줄 손길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꼴찌라서 더 외로운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나는 내 손을 건네고 싶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최규성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2/01/10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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