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김정호(上)

요절가수 김정호가 그렸던 고독한 인생의 이미지는 짙은 회색빛이었다. 비범한 재주는 신조차 질투가 솟았을까! 너무도 젊은 나이에 앗겨버린 그의 노래세상은 온통 그리움, 고독, 슬픔, 이별 등으로 뒤범벅된 삶의 반영이었다. 숨쉬기조차 힘들게 폐부 깊숙한 곳에서 요동쳤던 결핵균들은 오히려 숨이 끊어질 듯 가슴속의 한을 토해내게 했다.

대중들은 한순간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어느 누구도 마음 깊은 곳으로 집요하게 파고들어 촉촉히 적셔대는 처연한 멜로디와 노랫말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감수성 예민한 소녀팬들을 얼어붙게한 '이름모를 소녀' '하얀나비' 그리고 젊은층의 사랑을 독차지한 '사랑의 진실' '작은 새' 등은 그가 남긴 주옥같은 명곡들.

드라마틱하게 짧은 삶을 살다간 김정호의 등장은 가요계의 일대 지각변동을 몰고 오며 돌풍을 일으켰다.

그의 노래는 젊은 학생층의 열광적 지지를 받던 기존의 포크음악을 온 국민을 대상으로 영역을 넓히며 공감대를 형성할만큼 호소력이 강했다. 새마을운동으로 건설열기가 드높은 당시 사회에 '너무 어두운 곡'이라는 이유로 일부 배척도 있었지만 창백한 얼굴에서 뿜어나오는 처절하리만치 슬픈 멜로디는 온나라를 중독시키며 진동했다.

원로작곡가 황문평 조차 '감히 천재로 표현해도 좋다'며 34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진 김정호의 음악을 안타까워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17년이 지났다. 자신의 음악이 세상에 울려퍼지는 달콤한 꿈을 꾸며 음악공부에 하얀밤을 지세우며 몰두했던 김정호. 혼을 담아 기타줄을 튕겨대며 젊음을 불사르던 모습에 음악선배들도 머리를 숙였다.

본명이 조영호인 김정호는 1952년 3월 전남 광주에서 부친 조재영과 모친 박숙자의 2남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여수경찰서장을 지내고 출판사를 경영했으며 모친은 동일창극단원으로 명창 김소희와 함께 활동했던 창의 명인으로 유명했다.

광주 수창초등학교 2학년때 서울 교동초등학교로 전학을 온 김정호는 밥상위에 올라가 연설흉내를내는 등 웅변에 재능을 보여 여러 대회에서 입상할 만큼 머리좋고 활달한 개구쟁이로 자랐다.

초등학교 1학년때는 뇌염에 걸려 사지를 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대동중ㆍ상고 때는 인정많고 활달한 성격이 점차 말수가 줄고 어딘가 한이 맺힌듯한 인상으로 변해가며 고독을 즐겼다.

음악적 재능은 외가쪽의 영향이 지대했다. 모친과 함께 6ㆍ25동란중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외조부 박동신은 우리 국악의 거인. 명창 김소희의 고수이자 인간문화재인 김동준, 국립창극단장 박우성 등이 그의 제자이며 보국가, 유관순전, 해방가 등 판소리 창작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국립국악원 수석단원으로 아쟁을 연주했고 서울예전과 전남대 등에서 국악후진양성에 몰두한 박종선이 외삼촌이다. 생활처럼 들려왔던 외삼촌의 아쟁소리는 음악적 관심의 뿌리이자 시작이었다. 음악적 욕구가 꿈틀거리자 학업까지 포기하고 기타 배우기에 빠져들었다.

이때 찾아간 삼청동의 기타박사라 불리던 이생회 선생. 집을 뛰쳐나와 우이동에 골방을 얻어 두문불출하며 온종일 기타와 씨름을 했다.

당시는 통기타가 아닌 지미 핸드릭스, 산타나, 비틀즈 등 비트강한 록사운드에 관심이지대했다. 타고난 음악적 재능과 노력으로 곧 만만치 않은 기타주법으로 외국록그룹들의 레퍼토리를 제법 맛깔나게 연주할 만큼 진전이 빨랐다.

70년대초 김정호는 북한산속에서 임창제 등과 미8군에 출연하던 이상일을 음악스승으로 모시며 연주에 온 힘을 쏟았다. 임창제는 이 당시 김정호가 믿고 의지했던 절친한 음악의형제. 이들은 '음악과 결혼했다'고 할만큼 음악적 야망을 함께 키워갔다.

임창제는 “정호는우리가 다 잠들었다가 새벽에 깨어보면 늘 기타를 끌어안고 있었다. 방 한구석에 정좌한 자세로 열심히 기타를 치고 있던 작은 체구...정말 악착스런 정신과 사랑을 가지고 연습하는 걸 보았다. 남에게 조금이라도 기타실력이 뒤진다 싶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극복하고 마는 완벽주의 스타일이다.

당시 북한산 등성이에 앉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공부도 많이 못해 무식한 우리가 음악으로 세상에서 1등을 한번 해보자'며 아이들처럼 새끼손가락을 걸며 맹세하던 생각이 난다“며 눈시울을 적신다.

스킬보이스라는 록그룹을 결성하며 미8군 무대로 진출한 임창제가 이수영과 함께 듀엣 <어니언스>로 데뷔하려하자 자신의 일처럼 뛸 듯이 기뻐했던 김정호. 작곡한 노래들을 선물로 주었다. 어니언스의 데뷔앨범속에 수록된 김정호의 곡들은 두사람의 합의하에 임창제 이름으로 먼저 발표를 했다.

만약 히트를 하게 되면 그때가서 '이곡들은 김정호가 만든곡들'이라고 깜짝발표를 하고 '김정호에 대한 궁금증이 높아질 때 데뷔를 한다'는 계획이었다. 의리있는 임창제는 대표곡 <작은새>외에도 <사랑의 진실> <외기러기> <저별과 달을> 등 모든 곡들이 대히트를 하자 약속대로 KBS라디오방송에서 사실을 발표했다.

'김정호가 누구냐'는 대중들의 궁금증이 더해가면서 임창제의 손에 이끌려 73년 '이름모를 소녀'라는 데뷔곡으로 김정호는 대중들앞에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70년대를 풍미하며 지대한 음악적 영향력을 끼친 천재대중음악가의 등장이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2/01/1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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