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서울 종로구 종로2가 육의전터

육의전(六矣廛)이 무엇일까? 육의전은 육주비전(六注比廛). 육부전(六部廛), 육분전(六分廛), 육장전(六長廛), 육조비전(六調備廛), 육주부전(六主夫廛)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린 조선조 초기부터 서울에 설치된 시전(市廛)이었다.

말하자면, 국가에서 전매특권과 국역부담의 큰 의무로 설치된 6가지 도매상점이라 할 수 있다. 주단(綢緞)을 다루는 선전(立廛)은 공평동에, 백목전(白木廛)은 남대문로 1가 127번지에, 면주전(綿紬廛)은, 종로 1가 54번지에, 저포전(苧布廛)은 둘이 있었는데, 모시전은 종로2가 14번지에, 베전은 남대문로 1가 1번지에, 종이(紙廛)은 남대문로 1가 3번지에, 어물전도 두개로 안 어물전은 종로 2가 5번지에, 바같 어물전은 서소문 밖 네거리에 있었다.

대행수(大行首: 오늘날 조합장 격), 도령위(都領位:이사 급), 시령위(時領位), 상공원(上公員), 하공원(下公員) 등을 두어 전방(廛方)을 지휘 감독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육의전은 민간의 수요에 공급함과 동시에 궁실 및 산하관청의 물품수요에 대한 공급기관으로서 유일한 어용상인의 단체였으나, 6개의 전이 합하여 단일의 경제단위를 구성하였던 것이 아니라, 각 전은 각기 별개의 독립경제단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각 전은 도중(都中:조합)을 구성, 도영위, 대행수, 상공원, 하공원등에 이르기까지 관부에서 경시서(京市署:물품검사기관)을 통하여 육의전으로 하여금 상남시킬 물품의 품목과 수량을 하명 받으면, 각 전의 부담능력에 따라 육분각전의 비율을 정하고 그 분부(分賦)를 총괄, 상납하기도 하였다.

납세단체적인 성격은 점차로 노골화하여 정기적으로 정률의 액수를 상납케하였으므로, 도중에서는 미리 각 전에서 물품을 징수, 보관하였다가 명령이 떨어지는 즉시 납품하기도 하였다.

또 이들은 도원(都員:조합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 보가지도(保家之道:각 가정을 보호하는 길), 경장자유지풍(敬長慈幼之風:어른을 공경하는 풍습)을 배양함으로써, 스스로의 실력을 쌓아나가기도했다.

한편, 당시 재정의 궁핍을 느끼고 있던 정부는 상인들의 부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상인들도 정부의 권력을 등에 업고 자본의 축적을 꾀하려 하니 양자간에는 일종의 담합이 이뤄져, 정부는 육주비전으로부터 공납을 받는 대신 이들에게 강력한 특혜를 주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자금의 대여, 외부압력으로부터의 보호, 잡상들의 난전 금지 등이다.

특히 난전을 금하게 한 사실은 육의전이 가지는 최대의 특혜로서 상권을 완전히 독점하고 길드(Guild)와 같은 권력을 가지게 하였다.

그러나 특권이 강화할수록 의무도 가중되어 육의전의 상품독점은 한편으로 정부관리의 부정과 부패를 부추기고, 다른 한편으론 사상인(私商人)의 경제활동을 봉쇄해 상공업의 발전을 근본적으로 위축시키는 폐단을 낳았다.

때문에 민심이 동요, 서울 도내의 귀족권세가와 부유층들이 차차 지방생산자와의 결탁하여 농촌 수공업품을 사들여 서울에 산매(散買)하게 되니 특권상인인 육의전 상인들의 피해가 날로 늘어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개항기를 맞으면서 외국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와 판매됨으로써 육주비전의 몰락은 피할 수 없었다.

정약용 선생은 “생선이 썩으면 구더기가 생기고 관리가 썩으면 돈이 생긴다”고 말했다. 육의전 터를 지나며 오늘날 ‘정경유착(政經愈着)’과 무엇이 다를까고 새삼 생각해 본다.

입력시간 2002/01/16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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