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북한을 치려했다

역대 대통령 통치사료 1,300여 건 발견

1968년, 한국 현대사에는 제 2의 6ㆍ25가 서술될 뻔했다. 그해 북한의 도발로 1ㆍ21사태와 푸에블로호 납북사건이 잇달아 터졌을 때,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군사 공격을 강력 주장했다.

사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려는 미국측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음을 확인해 주는 청와대 통치사료가 발견됐다.

이와 함께 57년 북한군이 핵무기와 유도미사일 전력을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한 미국측의 군사 문건과, 80년 5ㆍ17 사태를 전후해 최규하(崔圭夏) 당시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했음을 입증하는 자료도 발견됐다.

청와대는 이승만(李承晩)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 등 역대 대통령과 관련한 기록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같은 내용이 포함된 총 1,302건의 통치사료를 발견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한미간의 주요 외교 현안을 정상 간의 긴밀한 ‘서신 협의’로 해결했다는 사실이 주목을 끈다.


박정희의 대북 응징요구의 군정연장

자료들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68년 2월 5일 린든B 존슨 미국 대통령에게 친필서한을 보내 "평화적 해결 방법, 즉 외교적 수단이 언제까지 계속돼야 하는지는 우리의 문제“라며 “공산주의자들과의 대결에서 평화적인 해결방법 모색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도움이 될지언정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즉각적인 대북 군사공격 단행을 주장했다.

그해 1월 21일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위해 인근까지 침투하고, 이틀 뒤인 1월 23일 승무원 83명을 태운 미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 공해상에서 북한 초계정과 미그기에 의해 납북된 직후의 일이다.

박 대통령은 이 서한에서 또 53년 휴전협정 체결이후 68년 사건 당시까지 북한이 5,000여차례에 걸쳐 휴전협정을 위반한 사실을 적시하면서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선 그들의 침략 행위가 반드시 적절한 응징(due punitive acttion)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력 주장했다.

박 대통령은 나흘뒤인 2월 9일 다시 서한을 보내 "북한에 대한 한국민의 규탄감정은 지금 절정에 도달해 있다"면서 "각하께서 승무원을 구출하기 위한 비밀회담이 앞으로 수차례 더 필요하다고 판단한다면 적어도 △ 가까운 시일내에 서울 습격문제를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다루어야 하며 △ 북한으로부터 시인과 사과를 받고 재발방지를 다짐받아야 하며, 북한이 이에 불응할 경우 한미 양국은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즉각 보복행동을 취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북한과의 비밀협상을 통해 푸에블로호 납북 승무원들의 송환을 이루려는 존슨 대통령을 재차 압박한 것이다.

이에 대해 존슨 대통령은 2월 9일과 2월 28일자 서신 등을 통해 "서울에 파견한 사이런스 밴스 특사가 평양 정권의 위협과 침략 행위에 대한 각하의 우려와 견해에 관해 상세한 보고를 했다"면서도 "본인 역시 이 사태에 대해 깊은 우려를 갖고 있으나 고려해야 할 점이 많이 있다"며 대북 군사행동에 대해 우회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혔다.

한편 박 대통령은 61년 11월22일 ‘최고회의의장’자격으로 미국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뒤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우리가 약속한 민정이양까지의 남은 1년간에 현 정부는 지난 1년간의 몇배의 노력으로써 보다 더 큰 성과를 올리고 튼튼한 반공 민주 기반을 확립할 것을 다짐한다”며 미국측의 지지와 원조를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케네디 대통령은 그러나 1963년 3월 13일 보낸 서신에서 "한국의 정치적 문제는 한국 국민 전체에게 납득될 만한 민정 이양 절차에 관한 합의 도달을 위해 귀국 정부와 정치지도자들이 협의를 해 이뤄지리라고 믿는다”고 밝혀 군정 밀어붙이기에 우회적으로 부정적 견해를 밝혔다.


50년대 북한의 핵무기 보유추정

50년대 북한 핵보유설 자료도 관심을 끌고 있다.

57년 미국 군사당국이 작성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으로 추정되는 `남북한 군사력 비교보고서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53년 휴전협정 이후 중공군이 북한에서 완전히 자진철수했다고 선전하고 있으나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군사력이 남한의 군사력보다 열등하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보고서는 휴전이후 북한 공산군은 약 19만4,000명의 병력을 증강, 총 80만5,073명의 군대를 보유함으로써 대한민국 국군 및 유엔군 병력(75만7,601명)보다 5만명 가량많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또 “북한이 공군기지 건설, 초현대식 제트기 및 기폭탄, 박격포 및 대공포 도입 등으로 휴전협정을 어기고 있다”며 "게다가 현재 북한 공산군은 핵무기와 유도미사일전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the Commnist Forces are now reported to possess anatomic and guided missile capabilities)"고 강조했다.

이 보고서는 작성자와 수신자, 목적 등을 담은 첫 페이지가 삭제돼 있다.


신군부, 최규하 대통령 사실상 연금

80년 5ㆍ17 사태 당시의 최규하 대통령 의전일지는 사실상 백지 상태. 전두환 당시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중심이 돼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고 민주인사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자, 최 대통령은 신군부의 위세에 눌려 대통령으로서의 권한과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거나 사실상 외부와의 접촉이 철저히 차단돼 있었음을 방증하고 있다.

의전비서실이 작성하는 당시 의전일지에 따르면 최 대통령은 5월10일 출국, 말레이시아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를 방문하고 5월16일 오전 10시10분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 이후 의전일지는 닷새동안 공란으로 비워져 있다가 22일 최 대통령이 박충훈(朴忠勳) 총리 서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사실을 적으면서 다시 이어졌다.


이승만 대통령, 미국에 원조요청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의 급박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열력하다. 이 대통령은 1954년 12월 8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은 지금 역사상 가장 심각한 위기를 맞아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면서 미국에 대해 경제.군사적인 원조를 요청했다.

이 대통령은 △ 미군과 유엔군의 3분의 2가 휴전 이후 철군함으로써 군사력이 크게 약화됐으며 △ 북한군의 끊임없는 공작원 남파는 심각한 상태라고 지적하면서 "나는 매일 우리의 국력을 강화시킬 수 있도록 신에게 기도하고 있다"는 말로 편지를 맺고 있다.

이 대통령은 같은해 3월 11일, 11월 5일, 11월 29일에도 각각 아이젠하워에게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 "서울에서 불과 몇 마일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100만명 이상의 중국 인민군과 수십만명의 북한군이 대한민국을 침략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며 지원을 호소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1953년 11월 16일과 12월 23일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나는 개인적으로 대한민국의 국력과 군사력이 강화할 수 있도록 하는데 관심이 있다"면서도 구체적인 대한(對韓) 지원계획을 밝히지 않았다.


육영수 여사 활발한 안방외교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거행된 광복절 기념식에서 조총련계 재일동포 문세광(文世光)이 쏜 총탄에 의해 숨진 박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陸英修) 여사는 생전에 각국 정상부인들에게 서한을 보내는 등 안방외교를 펼쳤다.

육 여사는 67년 7월 7일 사토(佐藤) 당시 일본 총리의 부인으로부터 장난감 선물을 받고 "재미있는 장난감을 보내줘 우리 지만(박 대통령의 외아들)이가 크게 기뻐하고 있다"는 답신을 보냈다.

또 64년 11월 16일에는 장개석 당시 대만총통 부인에게 손수 마련한 고려인삼과 토종꿀을 보내면서 "국가의 중책을 맡고 있는 장 총통의 피로회복에 효력이 있을 것"이라고 편지를 함께 보냈다.

육 여사는 특히 71년 일본의 한 여성지가 ‘(육 여사가) 개헌안 국민투표 결과에 걱정이 되어 점쟁이이게 사람을 보냇다’고 쓰자 정정을 요구한 편지에 직접 연필로 “점술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국가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사를 점술가에게 맡길 수도 없다”고 가필해 놓기도 했다.


역대 대통령 사료 일반공개 방침

발굴된 통치사료들은 우리나라 현대사를 재조명할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될 수있는 것들이다.

특히 우리나라 역대 정권의 권력이양 작업이 순조롭지 않게 이뤄진 탓으로 대통령 관련 통치사료가 상당부분 유실되거나 의도적으로 파기됐던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는 것이 학계의 지적이다. 임기를 1년여 남겨둔 김대중 대통령의 통치사료는 어떻게 기록될지 궁금하다.

청와대는 대부분 2~3급 비밀로 분류돼 있는 역대 대통령 관련 사료에 대해 관계 전문가들과의 면밀한 검토 작업을 거쳐 데이터 베이스로 만들어 일반인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공개할 방침이다.

<사진설명> 청와대에서 발견된 역대대통령 통치사료. 1-21사퇴 등에 대한 대북응징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장병욱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2/01/16 18:54


장병욱 주간한국부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