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차별 로비, 베일 벗는 엔론 스캔들

상·하의원 절반 이상이 엔론자금 수수, 정·경유착 의혹

“‘켄’이 도와달라는데‥” “음, 나도 전화를 받았어.”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이 혼미를 거듭하던 지난해 10월29일, 미국 조지 W 부시정부 경제팀의 주례 오찬회의. 돈 에반스 상무부 장관이 폴 오닐 재무부 장관의 소매를 끌었다.

켄은 에너지 공룡기업 엔론사의 케네스 레이 회장. 2000년 대선때 공화당 선거대책위 의장을 맡았던 에반스 장관과 ‘부시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함께 동분서주했던 사이다.

“구제금융을 달라는 거야. 98년 롱텀캐피탈사가 받았으니 어렵지 않다는 거지.”

“벌써 피터 (피셔 재무부차관)에게 검토를 시켜봤어. 정치적 자살이나 마찬가지라는 거야.”

13일자 워싱턴 포스트가 백악관의 브리핑 등을 토대로 재구성한 미국 핵심각료들의 대화내용이다. 포스트는 이 자리에 로런스 린지 백악관 경제담당 보좌관이 있었지만, 대화에 참여했는지 여부에 대해 백악관이 확인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린지 보좌관도 엔론사 자문역을 해주고 5만달러의 사례금을 받은 사람인 만큼 의논에서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파산 뒤 정치스캔들로 비화

그로부터 1개월여가 지난 12월2일. 미국 7위의 기업 엔론사는 사상최대규모인 161억달러의 부채를 안고 파산을 신청했다.

대 테러전에서의 승전과 성탄절 분위기에 묻혀 있던 엔론 의혹은 해가 바뀌면서 기업스캔들에서 거대한 정치스캔들로 느릿느릿 부풀어오르고 있다.

엔론사를 둘러싼 의혹들은 사실 정치스캔들의 요소를 백화점처럼 갖추고 있다. 석연치않게 고속팽창을 거듭한 기업의 갑작스러운 몰락, 기업주의 막강한 정치적 배경과 인맥, 정부의 각종 특혜의혹과 몰락 직전의 치열한 구명로비가 ‘엔론스토리’에 모두 담겨있다.

게다가 인맥의 뿌리가 모두 텍사스 휴스턴이라는 지역성까지 갖추고 있으니 앞으로 수년간 스캔들 문제의 연구주제가 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올만 하다.

일부 언론들은 부시 대통령이 취임 2년째에 맞은 엔론 의혹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화이트워터 게이트에 비유하고 있다.

하지만 클린턴 부부가 10만달러의 불법부동산 투자를 한 사건과 이번 의혹을 비교하면 힐러리 상원의원이 섭섭해할지 모르겠다. 칼럼니스트인 빌 프레스도 “엔론이 화이트워터를 땅콩처럼 보잘 것 없게 만들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엔론의혹이 과거의 정치스캔들과 대비되는 것은 아직 불법성이 이슈화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미 언론도 ‘엔론 게이트’라는 명명을 주저하고 있다.

‘워터게이트’부터 ‘이란-콘트라 게이트’, 그리고 화이트워터게이트에 이르기 까지 미국 대통령의 정치스캔들은 사안의 중대성보다 실정법을 저촉한 범법사실이 핵심이었다. 방대하고 내용이 다양한 엔론 의혹은 지금상태에선 과거의 ‘게이트’들과 구조가 역전된 모습이다.

불법성이 초기에 이슈화하지 않고 있는 것은 연루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핵심 경제 참모들 뿐아니라 앞으로 의혹을 조사해야할 책임자들마저 줄줄이 연루의혹이 드러나고 있다.

연방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가운데 존 애쉬크로프트 법무부장관은 상원의원 시절 레이 회장의 개인헌금 2만달러를 포함한 5만7,499달러의 정치헌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지휘선상에서 제외됐다.

엔론 의혹조사에 가장 먼저 손을 댄 기관은 지난해 10월22일 주가조작과 분식회계에 대한 해명을 요구한 SEC다. 하지만 위원장인 하비 피트는 뒤늦게 엔론사의 회계감사회사인 아더 앤더슨사의 변호사로 활동했던 사실이 드러나 도중하차할 위기에 놓여 있다.

정권 최고의 실세인 딕 체니 부통령은 에너지 정책 개발팀의 위원장으로 레이 회장의 로비를 받았고, 그의 비서실장인 루이스 리비가 막대한 엔론사 주식을 소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인연은 훨씬 더 뿌리가 깊다. 레이 회장이 지역사업으로 휴스턴에 프로야구 구장인 엔론스타디움을 건립했을 때 공사계약을 따낸 것은 체니 부통령이 최고경영자(CEO)로 있던 힐스버러사였다.


한국계 웬디 그램 등 연루 사실 드러나

레이 회장의 인맥은 그대로 현 미국 정치엘리트의 권력지도를 보는 것과 같다. 부시 대통령의 ‘주머니칼’로 불리는 칼 로브 정치고문은 25만달러의 엔론 주식을 소유했으며, 토마스 화이트 육군장관은 10년간이나 엔론 중역을 지낸뒤 지난해 공직취임전 수백만달러의 스톡옵션을 행사했다.

로버트 죌릭 미 무역대표부(USTR)대표는 엔론 고문이었다. 12일 뉴욕타임스가 “부시 대통령은 당초 선대위 고문이었던 레이를 상무부 장관, 또는 재무부 장관에 기용하려 했다”면서 “그러나 대신 그의 인맥을 송두리째 자기 주변에 포진시키기로 했다”고 비꼰 것도 당연해 보인다.

공화당에선 눈에 띄는 인물만 들어보자. 바로 지난주 부시 대통령이 전당대회 의장으로 임명한 마크 라시코트는 엔론의 공식적인 워싱턴 로비스트로 활약했다.

원로 상원의원인 필 그램(텍사스주)은 자신이 정치헌금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한국계 부인인 웬디 그램이 깊게 연루돼 은퇴길에 망신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

현 정부에서 고위직 기용이 거론됐던 웬디 여사는 선물거래위원장 재직시 에너지업계에 유리한 결정을 주도한 뒤 퇴임후 곧바로 엔론 이사진에 취임해 만만찮은 문제가 될 것 같다.

정치감시단체인 정치책임센터(Center forResponsive Politics)는 민주당을 포함, 상원 의원의 4분의 3과 하원의 절반이 엔론사의 자금을 받은 적이 있다고 집계했다.

테러전 승전분위기에 취해있던 부시 정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린지 보좌관이 TV에 출연, “서열 7위의 기업이 도산한다는 것은 미국 자본주의의 개가”라고 말하 것도 흔들림의 표출이다.

그러나 민주당도 고민하기는 마찬가지다. 의혹의 대상이 너무 여러 갈래이어서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수십만 투자자가 파탄에 빠지기 까지 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가가 공격의 초점이될 것이라고 워싱턴 포스트는 전했다.

다음으로 지난해 캘리포니아주의 전력난 사태도 호재가 될 수 있다. 엔론사의 갑작스러운 전력 공급가격 인상이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부시의 연방정부는 사태에의 개입을 거부했다.


부시에 화살 날아올 수도

하지만 최근의 정치스캔들은 어김없이 장기전으로 가는 게 미국의 추세다. 화이트워터게이트도 켄 스타 특별검사가 임명된 뒤 2년여를 끌었다. 아직은 전쟁이 끝나지 않았고, 부시의 지지율이 높은 것도 고려 대상이다.

길게 끌어서 오래 발목을 잡으며 정치협상을 병행하게 된다. 이란 콘트라게이트 당시 민주당은 대통령을 사임직전까지 몰고 갔으면서도 차기 대선 주자였던 조지 부시 전대통령의 현직 취임을 원하지 않아 막판 타협을 했다.

미국인들이 여전히 레이건을 지지했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방대한 의혹의 초점들이 어떻게 좁혀져가고, 기업과 유착된 대통령을 미국인들이 언제까지 원하는 지를 지켜보는게 엔론 스캔들의 관점포인트가 될 것 같다.

유승우 국제부차장

입력시간 2002/01/17 11:24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