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경기도 이천 도립서당 훈장 3형제

'낯섦'이 낯설지 않은 훈장 3형제 한재홍·재근·재훈

서울에서 1시간 남짓 자동차로 달려 경기 이천에 도달했다. 갑자기 봄날처럼 너그러워진 날씨, 하지만 맨살의 도로 옆 산과 밭엔 아직도 눈이 남아있다. 휑뎅그런 겨울땅이라도 콘크리트보다 반갑다. 맑은 공기와 햇볕, 서울엔 없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도심에서 가져온 것들을 모두 내던지고 싶다.

'산수유마을'이란 표석을 따라들어가다 산중턱에서 마침내 커다란 한옥을 만난다. '경기도 이천 도립서당', 경기도의 지원을 받아서가 아니라 마을 이름이 '도립리'라 도립서당이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밥을 먹고 난아이들이 즐거운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학동 60명에 훈장님이 셋. 훈장님들을 마당에 모시고 사진을 찍으려하자 어린 훼방꾼들이 호시탐탐 카메라 앞을 교란한다.

'이 녀석들 공부할 준비를 해야지!' 훈장님 한마디에 고분고분 물러가는가 싶더니 결정적인 순간이면 또다시 닫힌 방문을 빼꼼 열고 얼굴을 내민다. 얄밉지만 귀여운 개구장이들이다. 한 훈장님이 웃는다. "우리 어렸을때랑 하는 짓이 똑같아요. "


20여년간 한학공부 한 순수 '서당학파'

도립서당을 지키는 훈장님 3형제, 한재홍(40), 재근(37), 재훈(31)씨. 세사람 모두 20여년간 한학을 공부해 온 순수 서당 출신이다. 막내 훈장 재훈씨를 빼고는 전연 학교교육을 받은 바가 없다.

어려서부터 순천, 남원, 곡성 등지의 전통 서당들을 다니며 사서삼경 등을 공부, 각자 훈장노릇을 하다가 지난해 봄 이곳에 도립서당을 열면서 세사람이 뭉쳤다. 엄밀히 말하면 그중 재근씨는 재홍, 재훈씨와 사촌간이다, 원래 순천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작년 봄 이리로 '영입'됐다.

단 몇발짝만 산아래로 발을 옮겨도 예법보다는 실리가 앞장서는 세상, 이 치열한 첨단시대를 살아가기엔 어쨌든 이들에게 불편한 현실이 아닐까? 그러나 기우다.

"아뇨, 별 문제 없습니다. 오히려 제 연배의 친구들이 바깥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저는 제가 받은 교육이 더 고맙고 안도감을 느끼게 합니다." 재홍씨에게 무엇이 그런 안도감을 주는 것일까.

"그들처럼 각박하게 쫓기듯 살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또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란하고 무질서한 모습들을 보면 우리는 그나마 그런 것에 물들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다행스러움, 내 삶이 참 괜찮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외형적인 것으로 삶의질을 판단하지만,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결코 내 자신의 삶도 그들보다 못하지는 않다는 행복감이 있습니다."

재홍씨는 5남매중 장남. 7세때 한학 공부를 시작했다. 이것은 집안의 전통이기도 하다. 재훈씨를 비롯한 재홍씨의 두 남동생 모두 서당에서 수학, 28세의 막내 역시 같은 과정을 거쳐 현재 남원에서 서당을 열고 있다. 맏누나도 여성 한학교육기관인 양당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는 부친의 영향때문이다. 조부때부터 신봉해 온 민족종교 '갱정유도'에 따라 부친 한양원(79.한국민족종교협의회장)옹은 모든 가족들의 삶을 그에 맞춰 이끌어왔다.

갱정유도는 지금으로부터 약 80년전 일제 말기에 태동한 우리 민족종교중 하나로, 현대의 물질문명과 전래의 정신문명을 접목시킨 것이다.

원래 남원에 본부를 두고 있던 갱정유도 신도들이 청학동으로 옮겨가 살면서 갱정유도는 청학동 일대에 급속히 전파되었다. 그후 지금까지 청학동이 서당의 마지막 요새처럼 자리하게 된 것도, 현재 청학동의 서당을 지키는 한학자들 전원이 갱정유도 신도들인것도 이같은 배경때문이다.

부친 한옹은 그 자신도 평생 한학과 입산 묵언수도 등으로 공부하며 살아왔다. 그 부친의 뜻에 따라 아들 3형제 역시 7세만 되면 부모님 곁을 떠나 서당을 찾아다니며 유학 아닌 유학생활을 했다.

이들의 사춘기는 특히 혼란스러웠다. 친구들의 시선과 놀림 앞에 머리를 깎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여러번, 울컥 솟는 마음을 간신히 다스리곤 했다. 동생 재훈씨도 똑같이 거쳐야했던 통과의례다.


“주어진 삶에 순응하며 갈등 이겨냈죠”

"어릴땐 '댕기동자'라고 친구들이 놀릴때마다 치고박고 싸우곤 했습니다. 하지만 사춘기가 되자 이건 싸워서 될 일이 아니란걸 알게 됐어요.

그러면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됐죠. 이건 내가 선택한 삶도 아닌데 왜 나는 이런 길을 가야되나, 왜 친구들은 학교에 가는데 나는 한복에 머리를 기르고 서당에 다녀야 하나, 그런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면서 결국 하나하나 답을 얻게됐죠. "

재훈씨는 스스로에게 어떤 답을 찾아주었을까?

"우선은 내게 주어진 삶부터 받아들였습니다. 마치 내가 왜 한국에서 태어났는가, 왜 한국인인가란 물음이 무용한 것처럼, 비록 내 자신의 선택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이미 이것은 내게주어진 환경이고 그럼 이것은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이 길을 걸어갈것인가, 그렇게 내 길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그 의미를 찾아나가자 하나둘씩 답이 보였습니다."

장남 재홍씨는 부모님이 소개해 준 여성과 교제해 혼인까지 이르렀다. 교제중에도 시내 나들이만 나가면 쏟아지는 시선,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신기한 듯 흘끔거리며 웃었다. 살아가는 방식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본질적으론 별반 다를 것도 없는 이웃, 그러나 '댕기청년'에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호기심은 끝이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곧잘 쳐다보죠. 하지만 저를 재미있게 쳐다보는 분들 눈에나 제가 우스워보이는 거지 제 자신으로선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공부를 마친 후 재홍씨는 약 8년간 남원에서 서당을 열기도 했다. 교육은 그의 천직이자 생업이다. 1남1녀의 아버지로서, 그는 현재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자신의 어린 아들 역시 초등학교를 끝으로 이후엔 서당에 보낼 계획이다.


막내 재훈씨, 22세부터 초등학교 공부로 대학 진학

이에 비해 재훈씨의 행로는 좀 더 특별하다. 그 역시 20대 초반까지는 재홍씨와 같은 길을 걸었다. 그러나 22세에 접어든 어느날, 부친이 당신의 종교사업을 도울 겸, 무엇보다 전통과 현대학문을 소통시킬 중간역할을 위해서 누군가 하나쯤은 학교교육을 받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의논에 따라 3형제중 대표로 뽑힌 것이 재훈씨였다. 뒤늦게 학교속으로 뛰어들게 된 서당 청년. 남들은 이미 대학 2, 3학년에 이르렀을 나이에 그는 처음으로 초등학교 교과서를 들었다.

그리고 5년간 검정고시를 통해 초, 중, 고 졸업자격을 차례로 취득, 내내 검정고시 수석 또는 차석을 기록하며 대입자격까지 얻어냈다.

1998년 고려대 철학과에 입학, 당시에도 한복차림과 댕기머리 신입생으로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분명 감탄스러운 일이었다. 철저히 학교교육만 받고도 낙방생이 줄을 잇는 판에 어떻게 그는 단 2년의 수능준비로 그 낯설고 두터운 대입의 벽을 뚫었을까.

그것도 예체능, 수학, 과학 등은 생소하기만 할 젊은이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특히 수학, 과학 과목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한계가 있더라구요. 입학하던 해엔 비교적 시험문제가 쉽게 출제돼 한결 나았지만, 특히 수학은 평소 모의고사때나 그전에 수능을 봤을때도 출제된 문제의 절반 이상 풀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

의외로, 국어공부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까다로운 문법과 문학작품 분석문제 등은 그렇듯 탄탄한 한문실력과도 무관, 반면에 영어는 한문과 문법이나 어순 등 유사점이 많아 오히려 수월하게 친해질 수 있었다. 실제로 요즘도 그가 한문을 가르치는 아이들의 학부모들이 똑같이 확인시켜주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어려웠던 건 그런 교과목 공부가 아니라 '시간표'란 것이었습니다. 처음 검정고시 학원에서 시간표란걸 접했을때 정말 적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서당에선 오늘 내가 몸이 좋지 않다든가, 오늘은 진도를 나가지 않고 싶다 싶으면 제 판단 그대로공부의 속도나 내용을 조정할 수 있거든요.

말하자면 '내가' 공부를 이끌어 나가는 겁니다. 하지만여기선 제가 아파 결석하면 저를 제쳐둔 채 어쨌든 수업진도는 나가버립니다. 그것을 놓치지 않자면 무조건 제가 계획표에 맞추는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시간이 나를 따라오는게 아니라, 제가 시간에 끌려다녀야하는 상황이 시작되면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

'문화충격'이 가져다 준 후유증이었을까. 대입준비중 발병한 결핵으로 2년동안 아팠다. 대학입학후에도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운 세계였다.

그러나 생소한 문화에도 점차 적응, 착실한 학점과 함께 올 2월 졸업을 앞두고 있다. 곧이어 대학원에 진학, 우리의 전통 철학정신과 현대학문을 접목시키겠다는 철학도로서의 꿈을 다지고 있다.

어쨌든 형제중 유일하게 신식교육의 기회를 선사받은 재훈씨. 그 '선택받은 자'로서의 소감은 어떨까. 문명의 혜택은 그에게 흡족스런 것일까.


“서당 밖의 세상은 너무 숨막혀”

"언젠가 어떤 분이 '서당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처럼 학교에 다녀보기를 권하겠는가'라고 제게 물었을때 아니라고 대답했었습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지금 제가 가는 길이 더 좋은 길이라곤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학교의 장점도 없진 않지만, 한편으론 서당 밖으로 나온 이후 제 자신이 예전보다 많이 허약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정신적인 여유로움도 많이 사라졌고, 각박한 생활, 나쁜 공기,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의 끊임없는 대면 등, 이런 삶을 '혜택받은 것'이라고만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

대학시절부터 서울 갈현동에서 공부방 형태로 아이들의 한문공부를 지도해 온 재훈씨는 요즘도 서울과 이천을 오가며 재홍, 재근씨와 함께 도립서당을 돌보고 있다.

도립서당을 찾는 아이들은 초등학교 2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다. 이들은 주로 방학중 2주간 합숙하며 사자소학과 효, 우애의 정신, 전통예법 등을 배우고 간다.

이뜨내기 학동들 외에도 서당엔 3년째 재홍씨 곁에서 기숙하며 가르침을 받고 있는 제자도 둘이나 있다.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늦으나마 서당을 택한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제자들이다. 힘이 아니라 은근한 사랑과 위엄으로 서당을 이끌어가는 대표 훈장님, 재홍씨의 한마디.

"서당엔 끈끈한 무엇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상주하는 제자중 하나는 중학교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꽤 놀았던' 아이인데, 처음 그 부모님으로부터 부탁을 받았을땐 잠시도 책상앞에 붙어있지 못하는 이 아이가 과연 1주일이나 견뎌낼 수 있을까 저부터가 너무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나도록 떠나지 않고 지금까지 별 탈없이 잘 공부하며 지내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저희들 자신조차 모르는 무언가가 서당에 있는가 봅니다. "

잠시 이야기를 나눈 것 뿐인데 훌쩍 몇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서당 시계는 세상 시계와 속도가 다른 것일까. 강당 쪽마루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유난히 따사롭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최규성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2/01/18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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