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1968년 1월과 2002년 1월

어찌보면 2002년 1월은 1968년 1월과 분위기가 같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68년 1월 21일 자정쯤 포터 미 대사를 청와대로 불러 “대사! 북괴군 30명이 쳐 들어와 나를 죽이려 했소. 북을 공격해야겠소. 이틀이면 평양이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오”라고 하얗게 질려 말했다.

“하시려면 혼자 하십시오”라며 포터는 능청으로 박 대통령을 달랬다. (로버트 베트체르의 ‘속임수 선물’에서)

이런 역사적 분위기는 2002년 1월 9일에 정부가 공개한 역대 대통령의 청와대 사료에서는 느낄 수 없었다. 공개된 사료에 의하면 박 대통령이 68년 2월 5일과 9일에 존슨 미 대통령에게 두 차례 서신을 보내 1ㆍ21사태와 1ㆍ23 푸에블로호 원산만 납치사건을 무력으로 해결하자고 호소했다는 것이다.

존슨 대통령은 2월 9일자 답신에서 “사이러스밴스 전 국방차관을 특사로 보내니 깊이 상의해 보라”고 했지만 이런 문서들은 그때의 분위기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1968년 2월 12~15일 서울에 머문 밴스는 1억 달러 추가 군사지원, M-16 공장건설, 한반도 유사시 미군개입의 ‘즉시협의’라는 보따리를 풀고 갔다. 이런 밴스 특사가 2002년 1월 12일 뉴욕에서 84세로 세상을 떴다.

밴스가 박 대통령에게 전한 미국의 속사정은 1월 31일 월맹군이 월남 35개 도시와 사이공 미국 대사관을 침공한 구정공세 때문에 존슨 정부는 곤경에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밴스의 설명을 달리 생각했다는 것이 당시 배석 했던 김성은 국방장관의 전언이다.

“존슨 대통령이 아무래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 강대국도 학생데모에는 별수 없나”라며 박 대통령은 혀를 찼다는 것이다. 그는 반전 데모에 나서는 미국 대학생들에 비판적이었다.

“베트남에서는 생사를 걸고 싸우고 있는데 저 철없는 것들이 여론을 형성하면 아무리 강대국인 미국의 정부도 힘을 잃는다”며 미국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했다는 것이다.(조갑제:’내무덤에 침을 뱉어라’8편)

그러나 작년에 미국의 역사학자들을 위해 공개된 ‘서울~워싱턴 간 68년 1월 비밀보고 문서’에는 밴스가 본 박 대통령이 있다.

“그는 우울한 성격이며 순간적으로 흥분하고 지독한 술꾼이다. 술 마시기는 오래된 것 같고 부인을 재떨이로 때렸고 그의 보좌관에게 던지기도 했다. CIA의 서울 책임자(도널드 그래그전 주한 미국 대사)의 말에 의하면 1ㆍ21사태, 푸에블로호 사건 후 더 심해졌다고 한다.”

밴스는 워싱턴으로 돌아가 존슨에게 구두보고를 하면서 “박대통령은 위험스럽고 불안정 하다. 술자리를 시작하자 마자 장군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 이 명령은 이뤄지지 않는다. 그는 벌써 전날 내린 명령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같은 해 4월 12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존슨과 한ㆍ미 정상 회담이 열렸을 당시 존슨은 박 대통령에 대해 ‘술 좋아하는 대통령’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존슨의 입장은 지난 1월과 상당히 달라진 상태였다. 20세기 미국 대통령 중 가장 키가 큰 존슨 대통령이 이제는 ‘위험스런 지도자’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듯 했다. 한국군의 월남 추가 파병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이를 거절했다. 박 대통령은 미국의 차기 대통령에 누가 될 것인지에 더 관심이 있는 듯했다.

‘1ㆍ21’, ‘1ㆍ23’, ‘1ㆍ31’ 등 1월에 일어난 엄청난 역사적 사건들은 두 대통령에게 역사의 심판을 받기 위해서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해 나갈 것인가와 함께 대통령직이라는 것이 그들의 조국과 그들의 인생에 어떤 것인가를 던져주는 문제가 되었다.

먼저 해답을 낸 것은 존슨이었다. 1ㆍ31의 월맹 구정공세는 그에게 전쟁을 확전할 것이냐, 월맹을 무차별 폭격할 것이냐, 대통령에 재출마 할 것이냐를 결정 해야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됐다.

갤럽 여론조사는 67년 11월 월남 사태가 안정적일 때 50%에 달하던 그에 대한 지지율이 구정공세후인 68년 3월에는 33%로 떨어졌다.

3월 13일 뉴햄프셔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반전 후보인 유진 맥카시 상원의원이 42%을 얻었다. 3월 25일 정부의 보좌관과 자문관 없이 열린, 원도자문회의(와이즈맨회의)는 “북폭의 중지, 평화협상, 월남 증원 반대”등의 의견을 모았다.

존슨 재임시 백악관에서 인턴을 했던 하버드대 역사학부 출신 도리스 키언스는 존슨 은퇴후 보좌관으로 일하다 ‘존슨과 미국의 꿈’이란 회고록의 출판에 참여했다. 존슨은 3월 31일 북폭중단, 평화협상 제의를 발표하며 그 끝에 미국대통령으로서의 고뇌를 요약 했다는 것이다.

“나는 미국 대통령이라는 직을 결코 한 순간이라도 개인적이고 파당적인 목적으로 수행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민주당의 차기 대통령 지명을 노리거나 수락치 않겠습니다.”

키언스는 “비록 텍사스 사람들과 매파들이 월남전 위기를 맞아 비겁하게 회피하느냐고 비난할지 모를지라도 재선 출마가 가져오는 미국 여론의 분열보다는 역사의 심판을 받기 위해 용퇴를 스스로 결정 한 것이다”고 설명했다.

박 대통령은 이 연설을 듣고 존슨을 존경하는 정치인 명단에서 뺐다. 그는 자주국방-3선 개헌- 유신- 궁정동 피살이라는 비극적인 역사의 길을 걸었다.

박 대통령의 사전에는 ‘출마 철회’, ‘용퇴’ ‘정권이양’ 등의 단어가 없었다. 그에게 대통령 직은 행복을 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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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2002/01/22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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