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전망대] 경기 바닥론에 시장 냉소

“경기후퇴가 끝나가고 있다는 희망적 조짐들이 있으나 (기업 수익 및 투자 부진, 소비지출 감소 등으로) 미국 경제는 여전히 단기적으로 중대한 위험에 처해 있다”는 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경고 메시지도 한국의 경제정책 당국자들에겐 ‘노인의 기우(杞憂)’로만 들린 모양이다.

진념 부총리 및 재정경제부 장관은 지난 주 “우리나라 경제는 지난 해 4분기에 바닥을 지나 회복기에 접어들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4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3%를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산업생산 설비투자 소비지출 등의 지표도 견조한 증가세를 타고 있다는 근거에서다.

모처럼 듣는 굿뉴스가 반갑긴 했지만 뭔가 뜬금없다는 느낌도 들었던 그 즈음, 1년여 이상 우리 정부와 현대투신증권 인수협상을 벌여온 AIG그룹이 돌연 협상결렬을 선언했다. 부실 금융ㆍ기업 구조조정의 대명사처럼 되어온 현투문제가 또다시 미궁속으로 빠져든 것이다.


실낱 같은 경기회복 불씨, 현투 매각협상 결렬로 불안

하지만 정부의 ‘양치기 소년식’ 빈말에 속을 만큼 속아온 시장의 반응은 의외로 덤덤했다. 실낱같은 경기회복의 불씨를 갓난 애 다루듯 조심조심 키워가기는 커녕 공치사부터 늘어놓는 정부 당국자들의 태도에서 이미 그 같은 결과를 예견했다는 냉소가 깔렸음은 두말할 나위없다.

대통령에서부터 고위 경제관료에 이르기까지 경제의 펀드멘털 보다 지표에 연연하며 “올해는 잠재성장률인 5%의 성장이 가능할 것”이라고 늘어놓는 것을 보면 왠지 불길하다.

“정치엔 임기가 있어도 경제엔 임기가 없다”고 고상하게 떠들면서도 개각설이 나도는 시기에 경제팀 수장이 세계 흐름과 맞지않는 소리를 외치는 배경도 수상하다.

어쨌든 정부는 추가로 현대투신 인수의향서를 제출한 윌버로스그룹과 푸르덴셜 등에게 주초 인수검토를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 또 다시 협상에 나선다.

이번에도 최대한 조속히 협상을 매듭하겠다는 다짐이 붙어있지만 이미 허점을 모두 드러낸 우리정부의 의도대로 놀아날 협상 상대자는 없다.

지난 연말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로부터 매수방식 및 가격에 대한 협상안을 받은 하이닉스반도체는 주중 수정협상안을 확정짓고 협상대표단을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로 파견할 계획이지만 현투 매각협상의 불발 때문에 직ㆍ간접적인 악영향을 받지않을 수없을 것 같다.

특히 마이크론이 하이닉스의 부채탕감을 새로운 조건으로 내놓아 정부와 채권은행의 속을 태우고 있다.

반면 대우차는 우발채무와 단협개정 문제가 변수로 떠올랐지만 노조가 최근 완화한 단협안을 제시하는 등 상당한 부분까지 의견접근이 이뤄져 이번 주 실무협상이 재개되면 이르면 내달 본계약을 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구조조정의 명암과 관련, 공정거래위원회가 25일 발표하는 ‘대우 및 김우중의 허위자료 제출행위’도 흥미거리다.

문제기업을 떠나 시장으로 눈돌리면 역시 관심은 뉴욕 증시의 전개방향과 이에 따른 한국 증시의 움직임이다. 현재 다우존스지수와 나스닥지수는 첨단주 중심의 올 실적 불투명 전망으로 인해 연초 상승분을 모두 까먹었다. 세계 최대반도체기업인 인텔은 불안한 경기전망 때문에 올 실적 전망치도 제시하지 못한 채 설비투자을 25% 감축한다고 발표했으며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시장의 기대를 밑도는 실적 목표를 내놓았다.

IBM도 예외가 아니어서 “정보기술주가 주도한 연말ㆍ연초 랠리가 과도해, 주가가 급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시장에 널리 퍼져있다.

이와 관련, 미국에선 22일 12월 경기선행지수가 발표된다. 지난 주 나온 미시건대 소비자신뢰지수의 1년래 최고치 기록, 신규 실업신청자의 큰 폭 감소, 제조업지수의 플러스 전환 등과 함께 이번 경기선행지수도 경기회복 가시화에 대한 기존 관점을 재확인해줄 것 같다.

아마존 루슨트테크놀로지 모토롤라(22일) 듀퐁 3M(23일) 퀄컴(24일) 에릭슨(25일) 등의 실적발표도눈여겨볼 대목이다.


주가 700선 고수 여부가 향후 증시향방 가늠

국내 증시의 금주 화두는 지수 700선 고수 여부. 미 증시의 급냉에 따른 외국인투자자들의 이탈에도 불구하고 연ㆍ기금 투자풀 등에 힘입어 700이 지켜지면 상반기 증시의 가이드라인이 형성될 가능성이 크지만 이 선이 무너지면 투자심리의 급격한 위축으로 증시의 방향성을 점치기 힘들게 된다.

재경부는 25일 은행민영화 추진방향을 발표한다. 은행의 자율책임경영과 공적자금의 조기회수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정부의 생각이 어떤 식으로 엮어질지 궁금하다.

이에 대해 정부는 “현재매각을 추진중이거나 매각여건이 조성된 은행부터 조기매각을 추진하고 여타 은행에 대해선 경영정상화 추이와 시장상황 등을 봐가며 단계적으로 매각해 민영화 이익을 정부도 공유할 방침”이라고 밝히고 있다.

대한(大寒)도 지나고 10여일만 있으면 입춘(立春)이다. 그러나 겨울 같지 않은 겨울을 보다 보니 봄 같은 봄도올 것 같지 않다. 심지는 않고 거둘 일만 생각하는 관료들의 어리석음만 생각하면 절로 짜증이 난다.

이유식 경제부 차장

입력시간 2002/01/22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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