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윤희정

한국적 재즈로의 긴 항해

한국의 빌리 할러데이를 꿈꾸며 큰 체구만큼이나 꽉찬 열정으로 재즈대중화에 혼신의 정성을 쏟는 윤희정. 그녀는 최초로 방송사의 노래자랑대회를 통해 포크가수로 데뷔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데뷔시절부터 넓은 음폭과 남성 못지않은 폭발적 가창력은 귀청이 얼얼했다. 71년 순백색의 포크가락으로 노래한 김광희 작곡의 데뷔곡 <세노야 세노야>. 그녀는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공연때마다 새로운 재즈빛깔의 <세노야>를 재탄생시키며 쉽고 친숙한 우리가락으로 대중들 속으로 파고 들고 있다.

본명이 김명희인 윤희정은 1953년 인천 송현동에서 월남하여 전자사업을 했던 부친 김병덕과 모친 서인선의 2남4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서울대 법대 3학년때 사법시험에 합격한 오빠 김병준과 동생들은 하나같이 공부 잘하는 우등생들이었다.

윤희정은 인천 송림초등학교때부터 글쓰기와 예능에 재능을 보였지만 공부가 싫었던 집안의 청개구리였다. 인성여중고시절에는 문학에 심취하여 교우지 <인성>의 편집을 맡으며 시쓰기에 몰두했다.

교내백일장은 물론 각종 백일장에서 장원을 세번이나 했을만큼 인정을 받았다.

또 중학시절부터 홀로 익힌 기타와 노래솜씨도 뛰어나 인천 YMCA에서 레크레이션송을 가르치기도 했다. 고3담임선생이었던 SBS인기드라마 <은실이>의 작가 이금림은 윤희정의 노래에 반해 수업시작전에 항상 노래를 부르게 했다.

인성여고졸업때까지 문예부장과 함께 음악부장을 계속 맡았던 것은 이처럼 출중한 문학적 음악적 재능탓이었다. 이당시 가슴을 적셔주던 음악은 아레사 프랭클린의 소울 블루스와 마할리아 잭슨의 흑인영가였다.

노래로 돌파구를 찾은 윤희정은 지구레코드사 주최의 아마추어 노래자랑대회에 동생 김명혜와 함께 출전, 우승하면서 점점더 음악에 빠져들어갔다. 음반사의 주선으로 참가했던 71년 시민회관의 제1회 KBS배 쟁탈 전국노래자랑대회. 한해동안 1,500명의 가수지망생들이 참여해 자웅을 겨룬 신인가수등용문이었다.

11월 마지막주에 기성곡인 펄시스터즈의 <별이 빛나는 밤에>로 나섰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노래만은 누구에게도 지기싫었던 윤희정.

"11월대회에서 낙방한건 2년간 쓰던 3,000원짜리 쇠줄기타가 탈을 내 코드가 엉망인 채로 노래를 했기 때문이었어요. 어찌나 화가 나던지 1만5,000원짜리 고급기타를 사서 작사작곡을 직접해 다시 나갔어요"라는 당시 신문인터뷰기사는 그녀의 승부근성을 읽게해준다.

자작곡 <눈감으면>을 부르며 12월 첫대회에 재도전, 우승과 함께 시원시원한 음색의 노래라는 찬사까지 얻어냈다. 연말결선에서는 대학가에서 주인없이 불리어지던 참신한 포크곡 <세노야 세노야>를 부르며 최우수상을 거머쥐었다.

부상으로 받은 21인치TV, 전축, 냉장고 등 많은 가전제품은 트럭 한 대에 꽉 찰 만큼 푸짐했다. 수상의 기쁨도 잠깐. 소문난 수재집안에서는 '노래하는 연예인은 집안 창피'라며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늘 윤희정을 아끼며 이해했던 오빠만은 적극적으로 후원을 해주었다. 그녀의 오빠는 '좋아 하는 음악속에서 생활하고 대중들의 사랑까지 받는 희정이야 말로 형제자매중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러워했다.

'깨어보니 유명인이 됬더라'는 말처럼 수상후 반년이상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았다. 수상기념집 형식으로 기대감속에 발표한 데뷔앨범은 <윤희정-아세아,AALS0007,72년5월>. 수상곡 <세노야 세노야>, 자작곡 <내님의 목소리>등 총12곡이 수록된 음반은 뜨거운 반응을 몰고왔다.

본명이 아닌 윤희정이란 예명을 사용한 것은 당시 동명의 가수, 연예인이 3명이나 있어 오빠가 제안을 했다. 곧이어 발표한 2집 <지다남은 잎새-아세아,AALS00010,73년>과 3집 <남기고간 마음>은 작곡과 더불어 작사에 전념을하며 타고난 문학적 재능을 담았던 음반. 방송출연이 잦아지면서 윤희정은 제법 바쁜 인기가수생활을 했다.

75년 출연업소였던 소공동 라스베가스는 공무원이었던 남편 김동윤과 사랑이 싹튼 공간이다. TV에서본 그녀의 음악에 취해 1년동안 빠짐없이 찾아온 남편과 77년 인연을 맺었다. 이후 연예인교회에서 성가곡에 매료되며 화성학 등 본격적인 음악이론공부를 했다.

가스펠가수로 82년부터 90년까지 세계복음화 가스펠선교공연에 전념했지만 음악적 허전함은 여전했다. 90년 우리가락의 재즈화에 앞장선 한국재즈이론의 대가 이판근을 만나며 접한 음율은 황홀했다.

윤희정은 “재즈를 조금 빨리 했더라면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영혼을 담기위해서는 아직 갈길이 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대와 계층을 초월하는 음악을 꼭해내고 싶어요“라며 최고의 한국재즈가수가 되고픈 뜨거운 열정을 숨기지 않는다.

97년부터 정동극장에서 시작한 윤희정&FREINDS 정기공연 등수많은 라이브공연은 윤희정식 재즈사랑실천이다. 전현직 장관, 국회의원 등이 포함된 80여명의 각계인사들은 '윤희정을 사랑하는 모임'을 구성하여 지지를 보내고 있다.

윤희정은 음악을 통해 온세상 사람들과 교감할수 있는 사랑의 노래를 갈망한다. 요즘 아리랑의 정신과 판소리를 영어로 번역, 재즈와 접목시키려는 음악적 실험은 한국정서가 배여있는 재즈로 대화하려는 음악적 갈증의 반영이다.

척박한 한국재즈계에서 그녀의 존재는 등대불 같은 희망이기에 겸손함과 인생의 깊은 맛이 배여있는 편안한 한국적재즈의 완성을 위해 더욱 정진해주길 대중들은 갈망한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2/01/23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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