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바닥' 친 이창호 "거칠 것 없다"

이창호의 '미완성의 승리- V100'(33)

이세돌은 5번 승부 1,2국서 변칙 스텝으로 상대의 혼을 빼며 망외(望外)의 2연승을 올렸다. 3국에선 정상 스텝을 밟으면서 난조의 이창호를 공략, 필승의 국면을 짰으나 막판 경험 부족을 드러내며 역전패했다.

그렇다면 이번엔 어떤 전법으로 나가야 할까. 상대의 카드를 모두 오픈 시켜놓고도 끝장을 못 낸 이세돌로 선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이창호의 입장은 정반대다. 셧아웃 당할 뻔한 위기로부터 탈출하면서 그는 감각과 자신감을 동시에 회복했다.

요즘 유행어로 '바닥'을 치고 다시 상승 커브에 몸을 실은 것이다. 이 같은 심리적 변화는 4국에서폭발적인 힘으로 형상화한다. 3국이 두어진 지 꼭 이틀 만이다.

대국 개시 시간은 오전 9시25분.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인터넷 '사이버 기원'은 전날 오후 6시 미리 중계 사이트를 열어 놓았는데, 그 15시간 반 동안 바둑돌 하나 안 놓인 화면의 접속자 수가 1만명이 넘었다는 사실이다. 그중 상당수는 장시간 머물며 4국에 대한 전망과 응원을 교환했다.

초반에 흑이 붙여가자 이창호는 기록적인 장고를 거듭한다. 무려 51분의 장고 끝에 140번째 수가 기상천외한 수를 들고 나온다. 우하 쪽에 남긴 맛과 어울려 어떤 변화가 연출될까. 바둑은 어느 새 피차 황소걸음으로 변했다.

하변이 승부처로 떠오르고 있다. 좁다면 좁은 공간이지만 무수한 변화가 숨어있다.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한 '온건주의자의 과격한 수'. 이창호의 변모에 대해 우려 반 기대 반이었다.

우려를 하는 쪽은 이창호가 기질 상 몸싸움을 싫어하므로 정상적인 맘 상태가 아니라는 점이고,기대하는 쪽은 이창호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22분의 장고 끝에 66으로 가르자 "흑이 걸려든 것 같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과연 이창호의 주먹은 무섭다.

바로 이 언저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 바둑계의 개척자인 조남철 9단이 노구를 이끌고 검토실을 찾았다. 작년 11월 희수(喜壽)를 지냈으니 올해 78세. 노쇠 기미가 역력한 가운데서도 노옹은 꼿꼿한 자세로 후배들의 토론을 경청하면서 때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의견도 제시했다. 50년 연하의 젊은이들이 바둑계의 권좌를 놓고 자웅을 겨루는 모습을 보고서 어떤 감회에 젖어들었을까.

초반 이창호 9단의 예고 없는 강타로 이세돌은 무너지고 있었다. 이세돌은 기세는 좋지만 단기(短氣)로 분류되어서 기우는 바둑은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지는 못한다. 과거 유창혁도 그런 얘기를 제법 들었었다.

백쪽으로 완전히 기운 상황. 한 쪽에서 "흑이 던져야 하지 않느냐"는 소리가 조심스럽게 나온다. 4국은 이창호의 완승으로 흘러간다.

어쨌건 더 이상 흑의 항전이 바람직한가 여부가 초점인데, 많은 프로들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는 반응이다. 무엇보다 하변 패가 완결되지 않은 상황이므로 상대 실수를 기다리듯 구차하게 버티는 경우와는 다르고, 최후의 '명분'없이 항복하는 것은 미학적으로도 볼 품이 없다는 것.

또 하나는 번기(番棋) 승부에서 지나친 '결벽'도 다음 판을 위해 좋지 않다는 논리였다.

다 진 바둑이었던 3국을 이창호로서는 역전승하고 난 다음이니 이세돌이 비록 불리하더라도 돌을 거두어야 한다는 명분은 없다. 이창호도 실수를 하기 마련이므로.

3국서 폭 넓은 대세관으로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던 이창호가 이번엔 몸싸움으로 타이를 만들었다.이로써 2승2패. 초반 흐름이 뒤집힌 채 패권 싸움은기어코 최종 5국으로 넘어갔다. 이세돌은 너무나 쉽게 무너진다.

진재호 바둑평론가

입력시간 2002/02/05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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