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특집- 여행] 드라마속으로 떠나는 추억만들기

인기여행지로 떠오른 드람 촬영장소

드라마의 촬영장소는 인기 여행지가 된다. 모두 드라마와 같은 추억을 남기고 싶기 때문이리라. 어찌보면 여행은 드라마를 만드는 작업이다. 인상적인 여행의 추억은 가장 아름답게 편집돼 가슴에 남는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여정은 더욱 그렇다. 행복한 색깔이 칠해지고 군더더기는 희미해진다. 가슴을 저미는 음악이 배경에 흐른다면 더욱 좋겠지. 인기를 얻고 있는 TV드라마 ‘겨울연가’, ‘왕건’, ‘상도’, ‘명성황후’ 등의 촬영장 혹은 역사의 현장을 찾았다. 비교적 서울에서 가까워 설연휴 나들이터로 손색이 없다.


▣ 남이섬(겨울연가ㆍ강원 춘천시)

배는 출발하는 듯 하더니 벌써 선착장에 닿았다. 육지에서 400㎙. 고작 5분이채 걸리지 않았다. 겨울의 한가운데여서인지 승객이 많지 않았다. 방학을 즐기는 여고생들, 그리고 웬지 슬픈 표정을 짓는 두 연인. 100여 명은 족히 태울 수 있는 배는 달랑 10명이 승객만을 섬에 내려놓았다.

선착장에서 내려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다. 안내도에는 ‘캠프촌’이라 쓰여있다. 축구장의 10배는 됨직한 너른 잔디밭이 펼쳐진다.

여름에는 오색의 텐트가 촘촘이 들어서는 곳. 지금은 단 한 개의 텐트도 없다. 누렇게 익은 잔디만 겨울 햇살을 받고 있다. 툭 터진 공간은 마구 달리고 싶은 욕망을 자극한다. 아니나 다를까. 한쌍의 연인이 넓은 잔디밭에 나타났다. 뛰다가 넘어지고, 한참을 껴안고 있다가 다시 일어나 뛴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너른 잔디밭을 메운다.

캠프촌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왼쪽으로 꺾어진다. 바닥의 잔디만 응시하던 시선이 자꾸 하늘로 올라간다. 하늘을 찌를듯한 포플러나무가 2열 종대로 도열해 있다. 모든 잎을 털어낸 벌거벗음 그 자체이다.

나무 사이로 길이 나 있다. ‘겨울연가’에서 봤던 모습이다.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핸들을 잡은 사람은 교복차림의 남학생(배용준)이고 뒤에 탄 여학생(최지우)은 두 팔을 벌리고 웃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지는 않았지만 남녀가 길을 간다. 거대한 나무의 둥치가 신기한지 남자는 엷은 미소를 여자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길을 가로지르는 것이 있었다. 사슴이다. 길 가운데에서 잠시 섰다. 지나간 연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길을 간다.

포플러길이 끝나는 곳에서 색다른 길을 만난다. 철길이다. 섬을 가로로 횡단하는 미니열차가 다니는 길이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운행하지만 지금은 열차가 다니지 않는다. 어린아이 팔뚝 굵기의 가느다란 선로가 나란히 놓여있다. 한쌍이 선로 위를 걷는다. 선로의 폭은 팔짱을 끼고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남자는 그런대로 걷는데 여자는 자꾸 선로를 벋어난다. 높은 신발굽 때문에그런가 보다.

남이섬은 원래 섬이 아니었다. 작은 봉우리였다. 1940년대 청평댐이 건설되면서 주변이 물에 잠기고 봉우리는 섬이 되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 춘천시 남산면 방하리에 속해 있고 길은 경기 가평군으로 통한다. 둘레가 약 6㎞로 작은 섬이지만 1960년대부터 나들이터로 이름을 떨쳤다.

남이섬의 원래 주인은 섬 이름이기도 한 조선의 남이(南怡ㆍ1441-1468)장군. 그가 유배를 당해 기거했던 곳이자 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17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이시애의 반란을 평정한 남이 장군은 27세에 병조판서가 된 기린아였다.

왕가의 인척이란 이유로 유자광의 모함을 사 28세에 처형당한 안타까운 역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남이섬이 매스컴의 무대가 된 것은 ‘겨울연가’가 처음이 아니다. 수 많은 가수를 배출한 ‘강변가요제’의 무대였다. 최인호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겨울나그네’도 이 곳에서 촬영했다.

당시 대학교정을 자욱하게 물들이던 최루탄 만큼이나 눈물을 자극했던 영화이다. 영화가 아니더라도 1970~198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 섬에서 밤새 술에 취해 울분에 찬 노래를 부른 기억이 있을 터이다.

너무 많이 알려져서일까. 섬은 한때 위기를 맞았었다. 소비문화가 판을 치는 위락관광지가 될 뻔 했다. 지난 해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친환경적인 문화의 공간으로 되돌아가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그래서 많이 바뀌었다. 트로트 리듬에 맞춰 단체로 춤을 추는 관광객의 모습은 이제 볼 수 없다. ‘연가’에 어울리는 향기로운 섬이 되어가고 있다. 특히 방문객이 10분의 1로 줄어드는 겨울에는 더욱 그렇다. 너른 무대, 둘 만의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

서울에서 46번 국도를 타고 구리시-남양주시-대성리를 거치면 쉽게 가평읍에 닿는다. 가평읍 5거리에서 우회전, 363번 지방도로를 잠시 달리면 왼쪽으로 남이섬 입구 간판이 보인다. 좌회전해 약 2분 진행하면 선착장이다.

열차는 경춘선을 이용하면 된다. 성북역에서 하루 17차례 출발한다. 가평역에서 내린다. 가평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남이섬행 버스가 하루 10회 운행한다.

상봉터미널이나 동서울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춘천행 버스를 타면 가평에서 내릴 수 있다. 선착장과 섬을 잇는 배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시로 운행한다. 입장료와 도선료 포함 5,000원이다. ㈜남이섬 (031)582-2181~5, 서울사무소 (02)753-1245~8


▣ 금산사 (태조왕건ㆍ전북 김제시)

고려의 개국 과정을 그린 드라마 ‘태조 왕건.’ 삼국통일이 다가오고 있다. 후백제의 황제 견훤이 아들 신검의 반란에 밀려 절로 유폐됐다. 절 이름은 금산사.

허구가 아니라 역사의 진실이 존재하는 절이다. 지평선으로 해가 떠서 지평선으로 해가 지는 전북 김제시. 한반도에서 가장 너른 들판 한켠에 모악산이 우뚝 서 있다.

금산사는 모악산 남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예로부터 호남 미륵신앙의 터전이다. 백제 법왕 원년(599년)에 임금의 복을 비는 사찰로 처음 지어졌으니 만 1,400년이 넘었다.

견훤은 이 절에 석달간 갇혀 있으면서 배신에 치를 떨며 자식에게 복수를 다짐했다. 그후 1,000여 년이 흘렀다. 그 때의 주인공들은 이미 역사의 한 켠으로 밀려나 있지만 미륵정토 금산사는 그 허망한 권력싸움을 비웃듯 여전히 강건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모악산의 옛 이름은 엄뫼와 큰뫼. ‘어머니의 산’이자 ‘큰 산’이란 의미다. 사방이 평야였던 이 곳에서 모악산은 자연스럽게 숭배의 대상이었다. 한자로 이름이 바뀌면서 엄뫼는 지금의 산 이름이, 큰뫼는 절 이름이 되었다.

금산사는 김제의 너른 벌판을 닮아 시원스럽고 장중하다. 일주문, 금강문, 불이문을 차례로 지나면 학교 운동장만한 마당이 나타난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후백제의 비운을 기억하라는 듯 큰 소나무 한그루가 ‘누워있다’. 육중한 절 건물들은이 소나무를 중심으로 둘러서 있다.

이절은 통일신라시대 불교의 5대 흐름 중 하나인 법상종의 원찰이었다. 모두 11개의 국보와 보물이 있어 예전의 위용을 증명한다. 중생의 머리를 절로 숙이게 하는 곳은 보물 제62호인 미륵전.

밖에서 보면 3층이지만 안은 모두 터져있다. 법당 안에는 10㎙가 넘는 미륵불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머리를 조아리고 ‘나무아미타불’을 읊조릴 수 밖에 없다.

금산사에서 또 하나의 명물이었던 것은 보물 제476호였던 대적광전 정면 7칸,측면 4칸 건물로 한반도에서 옆으로는 가장 긴 법당이었는데 1987년 12월 소실됐다. 호남고속도로 금산사 IC에서 빠지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 금강(상도ㆍ충남 금산군)

최인호씨의 원작소설을 드라마화한 ‘상도.’ 진정한 상인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그리고 있다. 상도의 주무대는 압록강과 의주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국제적인 무역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하지만 압록강과 의주는 북녘땅. 그래서 충남 금산에 세트를 만들었다. 금산군 제원면 용화리가 그 무대이다. 지역 주민들이 ‘마달피’라고 부르는 강변마을이 의주 난전으로, 푸른 금강이 압록강으로 변신했다.

세트장은 강변에 아담하게 지어져 있다. 초가집이 20여 호 들어서 있다. 압록강 포구를 만들고 몇 척의 나룻배도 띄워놓았다.

금산읍에서 무주 방향의 68번 지방도로를 타다가 금강을 타고 넘는 제원교 직전에서 우회전하면 된다. 아스팔트와 시멘트 포장이 이어지다가 길이 끝나는데 그 곳이 마달피이다.

예로부터 ‘무인들이 말을 타고 달리던 벌판’이라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 ‘상도’의 세트를 돌아보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정교하게 만든 초가와 살림살이에 감탄이 인다. 압권은 시리도록 푸른 금강의 물이다. 살얼음이 살짝 얼었지만 바닥까지 훤하게 들여다 보인다. 잠시 넋을 잃다가 그 다음에 할 일은 본격적인 금산여행이다.

충남 금산군은 인삼의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한반도 인삼의 절반 이상이 이 곳에서 나왔다. 지금은 인삼 산지가 전국 각지로 흩어져 있어 과거의 권위를 내세울수는 없지만 여전히 인삼 유통의 70~80%가 이루어지고 있는 본고장이다.

인삼의 이미지에 가려 금산의 속살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금산은 빼어난 풍광과 의미깊은 유적이 즐비한 여행명소이다. 아담하고 고즈넉한 산사인 보석사와 인삼을 처음 재배했다는 개삼터, 거대한 규모의 인삼ㆍ약초시장이 볼만하다.

금산은 또한 먹거리 고장이기도 하다. 인근의 대도시인 대전 시민들은 금산에 ‘먹으러’ 간다. 모두 금산군에서 생산되는 재료를 이용한 것이다. 순위를 꼽는다면 삼계탕, 어죽, 소고기 순이다. 금산군청 문화관광과 (041)750-2225


▣ 홍류릉(명성황후ㆍ경기 남양주시)

명성황후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의 죽음이다. 일본 자객에 의해 살해된 명성황후는 당시 나라의 슬픔 그 자체이다.

드라마에서 명성황후는 아직 건재하다. 그러나 자객(허준호)에 의해 살해당하는 명성황후의 모습을그린 뮤직비디오 ‘나 가거든’(조수미 노래)은 이미인기 대열에 올라있다.

세상을 떠난 명성황후는 어디에 누워있을까.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다.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이다. 춘천이나 가평행 시외버스를 이용하거나 열차를 타고 금곡역에 내리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춘천 방향으로의 여행길이라면 잠시 들러보는 것도 좋다.

홍유릉은 홍릉(洪陵)과 유릉(裕陵)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홍릉은 고종과 명성황후, 유릉은 순종과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의 묘이다.

야트막한 언덕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조성돼 있다. 한반도를 통치했던 왕조의 마지막 무덤이라 생각하면 묘한 감흥이 인다. 명성황후는 처음에는 서울 청량리에 안장되었다가 고종이 승하하자 이 곳으로 옮겨져 묻혔다.

좋은 계절에 홍유릉은 인근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가 된다. 그러나 지금은 쓸쓸하리만치 한산하다. 사람의 발길이 뜸하고 숲이 우거져 있어 연초에 내린 눈이 아직도 일부 남아 있다. 고즈넉한 언덕에 서서 100년 가까이 능을 지키고 있는 석상들을 바라보는 맛이 괜찮다.

글ㆍ사진 권오현 문화과학부 기자

입력시간 2002/02/06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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