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주)이레특수포장 이종삼 사장

'척'하며 사는 건 질색 "튀어도 솔직한게 좋잖아"

경기 광주의 '유명인사' 이종삼(47)사장. 구한말의 의병처럼 사진속에 서 있다. 미리 찍은 자신의 영정사진이다.

민둥머리에 빨간 웃옷, 검은 바지, 빨간 양말, 검정 고무신. 10여년이나 지켜온 독점 패션이다. 그의 '적과 흑'은 도처에서 이어진다.

자신의 사무실 외벽도 적색과 흑색, 지갑도 빨간데다 거기서 꺼낸 명함 역시 빨강과 검정의 조합이다. 이 와중에도 명함속에 적힌 두 줄의 문구는 불쑥 폐부를 찌른다. '최종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입니다. 쉬운 말로 해 주십시오!'. 당당해서 할 말이 없다.

옷만 원색이 아니라 성격도 직선이다. 목판에까지 새겨놓은 그의 3대 좌우명은 이미 일대에 소문난 '명작'이다. '세상에 돈이 최고다. 세상에 믿을 놈 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기업가가 아니라 어느 퍼포먼스 예술가를 보는 듯 하다.

"제 좌우명이 어때서요? 좋은 소리야 누군들 못 합니까. 하나마나한 얘기나 고상한 척 하는 것보다는 더 솔직하고 분명하지 않습니까? 옷이든 뭐든, 저는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긴 싫습니다. 이왕 하는 것, 제 식대로 확실하고 눈에 띄게 합니다. "


똥지게 지고 광고에 등장 “힘들게 키운 회사”

주위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건 그만큼 자신이 있어서다.

'지금까지 세상을 똑바로, 떳떳이 살아왔다'고 자신있게 선언하는 그다. 운영하는 사업체도 작지만 우뚝하다. 연매출 약70억원, 그는 레토르트 식품 포장 등을 취급하는 전문포장업체 (주) 이레특수포장의 사장이다.

남들과 비슷해지는 것이 싫다며 그는 회사의 광고도 직접 손을 댄다. 기획 이종삼, 모델 이종삼. 어떤 것은 예의 뻣뻣한 차렷자세 사진을 내세운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똥지게를 지고 일어나는 사진을 단계별로 찍어 실은 것도 있다.

해석은 그렇다. '이렇듯 힘들게 우리 회사를 키웠다는 거지요'. 광고 한켠도 그다운 직설법으로 채워놨다. '(거래희망지인 특정회사 이름을 줄줄이 열거) ...△△△회사 관계자 여러분, 일 좀 주십시오!' 그래서 이종삼이다.

고향이 경북 영천, 고향에서도 성공한 출향인사로 통한다. 그러나 그는 솔직히 고향이 싫다. 아무리 반겨줘도 갈 마음이 없어 보인다. "고생한 기억이 너무도 뼈에 사무쳐 고향이 싫습니다. 어쩌다 다녀올때도 친구 하나 연락하지 않은 채 조용히 집안에만 있다가 바로 올라옵니다."

가족중에서도 돌연변이로 소문난 8남매의 다섯째. 부모님은 가난한 소작농으로 근근히 살림을 꾸렸다. 늘 배가 고팠다. 하루 세끼 나물 죽에다, 초등학교에 다닐때도 도시락 한번 싸 보지 못했다.

친구들에겐 신이 나는 소풍날도 싸들고 갈 점심밥이 없어 따라가지 못했다. 밥 다음으로 그리운 것은 친구들이 신고다니는 검정고무신. 혼자 짚신 바람으로 학교에 다니며 항상 부러워했었다. 밝아야 할 어린 시절이 온통 가난으로 멍이 져 있다.

"3학년때 연필 살 돈이 없어 그냥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이 왜 연필로 쓰지 않느냐며 다짜고짜 저를 때렸습니다. 왜 그런지 사정도 한번 물어보지않구요. 어린 마음에 얼마나 서러웠는지, 지금도 가슴에 못이 박혀 있습니다. "

72년, 오직 '밥이라도 제대로 먹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원 하나로 낯선 서울에 올라왔다. 지독한 배고픔은 소년을 오래도록 짓눌렀다. 누나집에 얹혀살때도 한밤중에 일어나 몰래 쌀단지의 생쌀을 씹어먹기도 했다.

돈을 벌기위해 한 중소포장업체에 취직했다. 월급 3,500원을 받는 어린 생산직 사원이었다. 영하 10도를 넘어서는 강추위에도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연탄난로 하나만 달랑 피워놓고 오들오들 군용 야전침대에 웅크린 채 떨며 잤던 기억, 그 얼어붙은 기숙사속에서 힘겨운 10대가 지나갔다.


진득한 심성이 최고 밑천인 초등학교 졸업자

무슨 일이든 진득하게 파고드는 것은 그의 특기다. 약 30년의 직장생활동안 돈을 좇아 변덕스레 자리를 옮길 줄도 몰랐고, 깔끔한 일솜씨와 타고난 부지런함은 그에게 신용과 승진을 가져다 주었다.

항상 일등으로 출근해 맨 꼴찌로 퇴근하던 그는 언젠가 '너무 쉬지않고 일하는 통에 기계소리가 시끄러워 잠을 못자겠다'는, 사장의 즐거운 호통을 들은 적도 있다.

표면상 '초등학교 졸업자'라곤 하지만, 사실은 틀린 얘기다. 직장생활중에도 3시에 일어나 검정고시 학원 새벽반을 다니며 중ㆍ고교 학력을 취득, 뒤이어 신학대까지 졸업한, 엄연한 대졸자다.

신학을 공부한 것은 너무 못먹고 힘들었던 생활탓에 심한 위궤양을 앓다가 신앙의 힘으로 나은 것이 계기. 한때 '목회자의 꿈'을 품기도 했다.

다니던 회사가 갑자기 부도를 맞아 문을 닫았다. 어쩌면 평생 월급쟁이로 머물렀을지도 모를 그에게 스스로 창업을 하게만든, 전화위복의 계기다.

부도후 공장이 경매로 넘어가 새 주인을 만나기 전까지 소요된약 6개월동안 그가 임시로 회사운영을 떠맡게 됐다. 예정대로 회사는 남의 손에 팔려나갔지만, 그의 능력을 인정해준 거래업체들의 도움으로 95년 현재의 회사를 차렸다.

창업 당시, 가진 돈이라곤 수중을 탈탈 털어 140만원이 전부. 간신히 할부로 장만한 1,000여만원짜리 고물기계 한대를 가져다놓고 직접 기계를 돌리며회사 문을 열었다. 재료비를 댈 돈이 떨어져 마음을 졸이기도 여러번, 생산품이 인정받으면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그간 품질과 위생에 관한 각종 인증을 받은 것을 비롯, 요즘처럼 제조업계가 어렵다는 비수기에도 오히려 생산이 주문을 따라가지 못할만큼 매출이 안정적이다. 오는 6월이면 더 넓은 부지로 회사를 확장 이전해 연매출 100억원대에도 진입, 맨손에서 일어서다시피 한 그의 자부심이 나날이 높아간다.

"공법이나 디자인도 제가 직접 관여합니다. 특히 액체한 약재 포장에 흔히 나오는 사슴 그림은 원래 제가 맨처음 도안 책을 보고 만들어 낸 것이었는데, 이제는 아주 흔해졌죠? 제가 옷차림은 이렇게 하고 다녀도 머릿속으론 항상 어떻게하면 더 나은 제품을 만들 수 있을지 하루 몇시간씩 무척 생각을 많이 합니다.

생각하고 투자하는 만큼 제품은 달라질 수 밖에 없구요. 더구나 우리 회사에선 시설 재투자에 많은 비용을 쓰다보니 불과 몇년전까지도 저희 집은 셋방 신세로 살았습니다. 전세도 아닌 월셋집으로 만14번을 이사 다녔습니다. "

잘 나가는가 싶더니 복병을 만났다. IMF의 출현 이후, 몇몇 거래처들로부터 돈을 떼이는 상황이 벌어진 것. 화가 난 이 사장, 또한번 독창적인 채무해결방법을 선보여 주위를 탄복케했다.

돈을 떼먹은 회사들마다 그 이름을 액자로 만들어 사무실 벽에 걸어놓음으로써 이곳을 드나드는 동종업계 사람들 앞에 신용불량자의 명단을 공개한 것이다.

이것이 알려지면 당사자들로선 그외의 거래에 있어서도 타격을 입을 수도 있는 바, 결국 하나둘씩 제 발로 찾아와 돈을 갚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큰 힘 한번 들이지 않고, 앉아서 해결한 것이다. 걸렸던 액자중 6개는 이미내려진 상태, 나머지 6개는 여전히 '절찬리에' 전시중이다.


“내돈 떼먹고는 맘 편히 못살지”

"사장님 돈을 떼먹을만큼 배짱좋은 분들도 다 있습니까?"

"그래서 어음을 받을 땐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경험상 제가 판단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겉부터가 화려한 어음은 십중팔구 사고가 납니다. 절대 받으면 안됩니다.

하지만, 명함속에 자신의 집 전화번호를 쓴 사람, 가계 수표에 쓴 글씨가 악필인 사람은 거의 100% 믿을만 합니다. 어쨌든 앞으로도 또 같은 일이 생기면 제깍 새 액자를 걸어야지요. 더 걸 자리도 넉넉합니다. "

92년엔 갑자기 기관지내 동맥이 터져 피가 쏟아지면서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적도 있다. 생사 확률 50대 50이라는 의사의 통고 아래 병원에 입원해있던 두달간의 절망적인 시간. 가족들이 묘지까지 알아보러 다닐만큼 절박했던 경험이다. 다행히 치료에 성공, 그러나 아직도 완치라곤 할 수 없는 잠재적 환자다.

"죽음앞에 서니까 완전히 세상이 달라져 보였습니다. 복이 다른게 아니더라구요. 살아있는 것 자체가 더할나위없는 복이었습니다. "

이 사장의 2색 패션이 시작된 것은 10여년전부터다. 그의 말을 빌자면 '어느 정도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생기고 나서부터'. 빨간 색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힘이 솟게하는 색이라 마음에 끌렸고, 검정 고무신은 어려서부터 마음에 품고 다닌 보물이었다.


“겉모습만으로 평가하는 세태 변해야”

튀는 행색에 쏟아지는 시선도 각양각색이다. 개성이 있다며 찬사를 보내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아직도 낯선 곳에 가면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다.

접대차 고급 식당이나 고급의류점에라도 들어갈라치면 지레종업원이 앞을 가로막으며 '여긴 값이 아주 비싸다'며 공연히 떠보기도 예사. 보이는 것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현실을 그는 온 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어디든 못가는 곳도 없다. 관공서나 기업은 물론, 초상집도 그 차림 그대로 돌진이다.

집에서는 바깥보다 더 '심하게 튀는' 가장이다. 고등학교 졸업반과 2학년에 재학중인 두 아들은 성적이 바닥이다. 아닌게 아니라 언제 한번 제대로 공부하는 모습을 본 기억도 없다.

그래도 이 사장 부부는 이제껏 공부하란 말 한마디 하지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얘기했다. '그래, 전부 다 서울대 가면 화장실 청소는 누가 하냐! 학교때 말썽쟁이들이 사회에선 더 성공하더라.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양해야 세상이다.

' 막내의 흡연사실을 알고부터는 담뱃값에 쓰라며 용돈까지 대폭인상, 때론 재떨이를 찾아주거나 대신 담배를 사다주기도 하는 파격의 부모다. "어차피 막는다고 안 하지도 않을 일, 차라리 집에서 풀어주는게 아이들이 덜 빗나갑니다. "

유난히 동물을 좋아하는 그는 집안에 개 3마리를 키우고 있는데, 방에다 배설을 해도 가족들에겐 화를 내지 못하게 한다.

가라사대, '우리 눈엔 나쁘지만 개의 눈엔 옳은 일일 수도 있다'는게 그의 얘기다. '흰동이''희돌이'에 이어 막내 강아지의 이름도 그가 직접 지었다. 이름하야 '옷걸어!' 평소 옷을 아무렇게나 팽개치는 아들 버릇을 고쳐주겠다며 애꿎은 강아지 이름으로 덮어씌웠다. 지금도 강아지를 부르면, 아들은 자동으로 일어나 옷을 건다.

"올해 회사가 이사한 뒤 어느 정도 안정되고나면 꼭 하고싶은 게 있습니다. 조그만 야산을 하나 사서 도로위 자동차에 치여 죽은 동물들 시체를 거둬서 묻어주는 겁니다. 그것들도 엄연히 생명인데, 매일 출퇴근을 할때마다 그런 시체들을 만나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10년쯤 더 지나 회사를 그만둔 뒤에도 저는 야산에다 개 오리 닭을 키우며 사는게 꿈입니다. "

너무 쉬운 퀴즈 하나. 빨간 양말외엔 사 본 적도, 신어본 적도 없는 그가 최근 이례적으로 빨간 양말을 포기한 일이 딱 한번 있었다. 가까운 분의 초상을 당했을때 익히 그의 성미를 잘 아는 유가족측에서 '제발 양말만은 바꿔신고 오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갈아신은 양말은 어떤 색이었을까? 아니나 다를까 검.은.양.말.이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최규성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2/02/06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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