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동작구 노량진 사육신묘와 아차고개

‘북소리 둥둥둥 갈 길을 재촉하는데/ 서녘 하늘에 해는 저무는 구나/ 황천길에 주막집은 없다던데/ 오늘밤은 어디서 자고 갈거나.’

이 시는 단종(端宗)복위를 꾀하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世祖)에게 무참히 국문을 당하고 거열의 형(車列之刑)에 처해져, 사형장인 새남터(한강가 서부이촌동 철길부근)로 끌려가면서 당당히 읊은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의 시다. 이 시는 죽음앞에서도 호탕하고 당당한 매죽헌의 선비로서의 진면모를 읽을 수 있게 한다.

한강가(일명 노들강변)의 언덕자락에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옛날에는 꽤나 많은 서원(書院)이 있었던 것 같다.

이들 서원중 하나인 민절서원(愍節書院)은 사육신(死六臣: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을 모셨던 곳이다.

이 서원은 조선조 숙종8년(1682년)에 동재기나루(銅雀津)에 육대사(六臺飼)로 세워졌다가 9년뒤인1691년 오늘의 사육신묘가 있는 곳으로 옮겨지면서 숙종이 친필사액을 내린 곳이다. 이 서원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건재했으나 건물은 허물어지고, 지금은 육각비 옆에 주춧돌만이 남아 철없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있다.

또 사육신묘로 올라가는 길어귀에 사충서원(四忠書院)이 있었다. 사충서원은 조선조 제20대 임금인 경종 원년에 ‘신임사화(辛壬士禍)’로 희생당한 노론(老論)의 대신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이이명을 배향하던 곳.

이 서원서원 철폐령 때도 건재했으나 1924년 일제의 식민통치때 용산구 보광동으로 옮겨진뒤 지금은 그 내력을 새긴 묘정비(廟庭碑)만이 역사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또, 사육신묘가 자리한 서쪽산 기슭에는 조선조 숙종 15년 을사전국(乙士轉局)때에 죽은 서인(西人) 박태보(朴泰輔)를 모신 노강서원(鷺江書院)이 있었다. 박래보는 귀양가던 중, 이 곳 서원터에 있던 신호(申護)의 집에서 머물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숙종은 그들의 죄를 풀어 주고 23년(1697)에 박태보를 배향하는 서원을 세웠던 것.

이와 같이 오늘날 노량진 사육신묘 언저리는 사육신의 꾿꾿한 선비정신 만큼이나, 절개 곧은 선비들을 배향하는 서원들이 많았던 곳이다.

육신묘 마루터기로 올라가는 고개를 ‘아차고개’라 불렀다. 전설에 따르면, 세조때 영등포 이남에 살던 어떤 선비가 육신(사육신)을 처형한다는 소식에 이를 막고 민심을 대변한다며 도성을 향해 말을 몰다 이 고개에 이르렀을 때다. 육신이 이미 노들나무 건너 맞은편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는 비보에 접하고, ‘아차! 늦었구나!’하고 탄식한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돌아보니, 사육신 묘역은 잘 정비되어 있건만 ‘육신묘’가 아닌 무덤이 하나 더 하여 ‘칠신묘’가 아닌가! 5ㆍ16쿠데타로 막강한 권좌에 있던 김재규의 조상 백촌 김문기(金文基)의 묘라고…, 역사는 강자의 논리에 따라 오늘날도 좌우되니, 아차고개에서 아차!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아차! 역사여! 세월이여!

이홍환 현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입력시간 2002/02/19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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