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영화세상] 김기덕과 조재현, 그리고 이승재

사람에게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 제52회 베를린 영화제(2월7~17일)에 ‘나쁜 남자’로 함께 참가한 김기덕 감독과 배우 조재현, 그리고 이 영화의 제작자인 LJ필름 이승재 대표. 세 사람의 만남도 그렇게 볼 수 밖에 없다. 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베를린에서 만난 세 사람이 털어놓는 그 ‘운명’.

먼저 김기덕과 조재현. 아직 감독의 꿈도 안 꾸던 1993년, 김기덕은 MBC 특집드라마 ‘신화’에 나온 조재현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뿐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시나리오 ‘악어’를 들고 캐스팅을 위해 배우를 찾았다. 1억 원짜리(결국 3억원이 들었지만) 영화에 한석규, 최재성, 박상민 등이 요구하는 출연료는 5,000만원까지. 그때 김기덕의 머리에 떠오르는 인물. 바로 조재현이었다. “문득 ‘신화’의 모습이 다시 살아났다.”

전화를 받은 조재현은 우선 ‘솔직한’ 김기덕에게 호감이 갔다고 했다. MBC 카메라맨이었던 형이 ‘제4공화국’ 촬영사고로 죽고, 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 고종으로 나와 늘 같은 대사를 읊조리고 있던 시기였다.

“이게 아닌데. 이게 나의 한계인가”라는 회의가 일었다. 친척들조차 “연기 그만둬라”고 했다. 그때 받아든 ‘악어’ 시나리오. 조재현에게는 ‘쇼킹’이었다. “어느 누구도 주지 않았고, 그런 능력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기덕 감독은 그것을 주려했고,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악어’는 조재현에게는 새로운 연기세계, 매너리즘의 탈피를, 김기덕에게는 더 없이 좋은 배우 (파트너)를 얻게 해주었다. 둘은 서로에게 솔직했다고 한다.

충무로 스타일이 아니어서 버티기 힘들었지만 그것이 편안함을 주었다.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면서 서로 수긍하고 받아들였다. 지금까지 그렇게 다섯 작품을 해왔다. “배우는 감독에게 의존하지 않는 자기 감정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좋은 연기자를 만났다. 조재현에게 배운 것이 많다”는 김기덕.

‘나쁜 남자’도 그랬다. 조재현은 운명처럼(처음 감독은 다른 배우를 캐스팅하려고 애를 썼다) 주인공 한기가 됐고, 그 남자에게서 기존의 영화 속 자신과 다른 느낌, 가라앉은 듯한 모습을 발견했다.

“조재현에게 연기를 시켜본 적이 없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그러면 캐릭터에 대한 리듬을 잡아 감정의 기승전결을 펼친다.”

김기덕의 조재현에 대한 칭찬이다. 그 증거로 김기덕은 드라마 ‘피아노’에서의 성공을 꼽는다. 그는 “또 드라마냐, 왜 흐느적거리려 하느냐”며 못마땅해 했다.

그러나 ‘악어’처럼, ‘나쁜 남자’처럼 조재현은 그곳에서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그 무엇’을 발견했다. 그리고 드라마의 성공은 ‘나쁜 남자’의 유례없는 흥행을 가져왔다.

김기덕이 영화 ‘섬’을 찍고 있을 때, 당시 프리랜서(프로듀서)였던 이승재는 그에게 “7번째 영화부터는 나하고 하자”고 말했다.

“무슨 소리야, 이제 4번째 영화인데 7번째라니”라고 김기덕은 흘러 버렸다. 할 때마다 흥행 실패, 그래서 바로 다음 작품의 미래도 불안한 상황에서 이승재의 약속은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6번째 영화 ‘수취인불명’에 공동제작으로 참여하더니, 약속처럼 7번째 영화 ‘나쁜 남자’를 흥행 실패를 약속하고 시작했다.

“내가 하자면 해야지”라고 말하는 김기덕. 그의 말에 웃으며 “김기덕 영화에 중독됐다”는 조재현. “앞으로 김기덕 영화는 실패와 성공을 떠나서 계속하겠다”는 이승재. 그들은 이런 ‘운명’에서 행복해하고 있다. 그들이 부럽다.

이대현 문화과학부차장

입력시간 2002/02/25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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