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구화폐, 역사 속으로 지다

3월1일부터 사용금지, 유로화시대 본격 개막

2월 28일 이탈리아 로마 중심가의 트레비 분수. 개선문을 본뜬 벽화와 바다의신 넵투누스상이 한 가운데 자리잡은 340년 전통의 이 명물 앞에서 리라 동전을 분수대로 던져 넣는 작은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분수대를 등지고 동전을 던져 넣으면 로마로 다시 올 수 있다’는 속설 때문에 평소에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광경이긴 하지만 이날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의 얼굴엔 적잖은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허공을 가르는 리라화도 왠지 빛이 바래 보였다.

유로화에 밀려 다음날부터 영영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리라를 추억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유로화 빠른 속도로 정착

최고(最古) 2,7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그리스 드라크마화를 비롯한 유럽 각국 화폐들이 3월 1일부터 사실상 폐기됐다.

올들어 2개월 동안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로권 12개국에서 유로화와 함께 통용됐던 기존 화폐들은 이날 이후 일정 기간 은행 등에서만 교환 가능할 뿐 일반 상거래에서는 일절 사용이 금지됐다.

핀란드, 그리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독일,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스페인, 포르투갈이 이날 같은 조치를 취했다. 네덜란드를 비롯해 프랑스, 아일랜드는 이미 몇 주 전에 기존 화폐 사용을 중단했다.

로마처럼 소규모의 고별 행사를 제외하면 기존 화폐가 공식으로 폐기된 이날 퇴장을 기념하는 성대한 이벤트는 유로권 어디서도 찾기 힘들었다.

유럽 언론들은 하나 같이 구화폐의 퇴장을 ‘팡파레 없는 작별’이라고 보도했으며 조너선 파울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대변인은 유로화 공식 통용과 관련해 “가장 주목할 사실은 극적 요소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라고 평가했다.

기존 화폐의 ‘조용한 퇴장’은 유로화가 빠른 속도로 정착하고 있는 데다 우려와 달리 물가 상승의 위험이 크지 않은 데다 기대했던 유로권 가격 평준화의 긍정적인 효과가 일부 현실화한점 등을 이유로 꼽을 수 있다.

화폐 교체에 따라 혼란을 빚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유로화 전면 통용 이후 2주일이후부터 거래의 80% 이상이 유로화로 이뤄진 것으로 추산됐다.

유로권 물가인상률도 지난 해 12월 2.0%에서 올 1월 2.7%로 그리 우려할만한 수준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물가 상승도 유로화 도입 때문이라기보다 날씨 때문에 남부 유럽의 농작물 생산량이 줄어든 때문으로 보고 있다.


유럽인 애환 담긴 12개국 화폐

길게는 수천 년 간 유럽인들을 웃고 울렸던 화폐들은 저마다 복잡다단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가장 기억할만한 통화는 역시 가장 오랜 통화로 기록된 그리스 드라크마화이다.

기원전 650년 지금의 터키 서부 지방에서 처음 주조된것으로 추정되는 드라크마는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됐던 은화다.

‘한 줌’이라는 뜻의 드라크마는 도입 초기에 이 화폐로 화살 한 묶음을 살 수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스의 대외 정복과 함께 드라크마는 당시 국제통화로도 이름을 떨쳤다. 이후 드라크마는 한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가 1833년 그리스가 오스만 터키 제국에서 독립했을 당시 고대 그리스 정신 부흥운동의 일환으로 통화로 되살아 났다.

현대사의 애환이 가장 짙게 묻어나는 것은 독일 마르크화이다. 화폐에 마르크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9세기. 이것을 1870년대 금의 가치와 연동해 공식 화폐로 정착시킨 것은 비스마르크를 파면했던 독일 제국의 황제빌헬름 2세이다.

이후 마르크는 독일 정부가 1차 대전 전비 마련을 위해 금을 팔아치우고 당시 지방 정부도 지폐를 과다 발행하면서 달러 당 42억 마르크라는 가치 급락을 경험했고, 히틀러가 범 유럽 화폐의 꿈을 안고 만들었던 라이히 마르크는 그의 몰락과 함께 퇴장하고 말았다.

2차 대전후 미국과 서유럽 연합국 점령지에서는 미국에서 인쇄해 온 도이치마르크가 사용되었고 옛 소련 점령지에서는 오스트마르크가 통용되다가 1990년 동서독통일과 함께 도이치마르크로 일원화했다. 마르크는 2차례의 세계 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의 전쟁 과오와 전후 경제 부흥의 명암이 교차하는 화폐이다.

14세기에 영국에 억류됐던 국왕의 석방을 기념해 도입된 프랑스 프랑(자유ㆍ해방이라는 뜻)은 프랑스에서는 이제 사라졌지만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서 아직도 통화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19세기 초에 처음 주도된 이탈리아 리라화는 처음 북부 지역에서 통용되다 60여년 뒤 공식 화폐로 채택됐다. 아일랜드 파운드화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리며 탄생했고 핀란드 마르카화에는 자국이 슬라브 문화권보다 게르만 문화권에 가깝고 발트해 국가의 일원임을 표방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논쟁에 휩싸이는 영국

각국 기존 화폐의 폐기와 유로화의 조기 정착은 사실 유로권 국가보다는 역외인 영국에 더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단일 통화권에 편입되면 경제 대국인 독일에 끌려 다닐 것을 염려해 유로화 가입을 보류했던 영국에서는 유로화가 성공적으로 출범하자 가입 찬반론이 가열되는 분위기다. 토니 블레어 총리를 비롯한 정부 내의 가입 찬성론자들은 내년에 유로화 가입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다는 이야기들을 흘리며 여론을 떠보고 있다.

최근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현재 영국 정부에서 검토 중인 방안에 따르면 토니블레어 총리는 내년 5월1일 유로화 가입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유로 가입을 찬성하는 보좌관들이 블레어 총리에게 잉글랜드의 지방의회와 스코틀랜드, 웨일스 의회 선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이 날 유로 가입 투표를 같이 실시하도록 압력을 넣고 있다고 전했다.

내년 봄 국민투표실시 가능성은 지난 달 중순께 피터 헤인 외무부 유럽담당 차관도 시사했다. 헤인 차관은 고든 브라운 재무부 장관이 노동ㆍ금융시장의 여파 등 5가지 고려 조건에 대한 판단을 이르면 올 가을 내릴 것이며 국민투표는 그로부터 6개월 후에 실시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잭 스트로 외무부 장관 등 일부 각료들과 야당인 보수당은 여전히 유로화 가입에 대해 여전히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특히 보수당은 “국민의 70%가 반대하는 유로화 가입을 강행할 경우 좌시하지 않겠다”며 블레어 총리를 압박하고 있어 영국은 당분간 유로권 가입 문제를 두고 적지 않은 홍역을 치를 전망이다.

김범수 국제부 기자

입력시간 2002/03/06 11:42


김범수 국제부 bski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