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선거, 돈 정치] '판도라의 상자'에 담긴 정치자금

돈과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 인식

김근태 고문의 경선 자금 ‘양심 선언’이 ‘돈가스 정국’으로 희화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국민들의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

김 고문의 비장한(?) 발표가 있은 직후 일각에서 ‘경선 반전을 위한 노림수’, ‘고뇌에 찬 양심 선언’ 등의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어느새 사라지고 정치권에선 ‘정치 초년병의 무모한 객기’ 정도로 폄하 되고 있다.

정치인 치고 정치 자금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간 국내 정치의 관행상 한 정치인의 정치적 위상이나 입지를 가늠할 가장 정확한 잣대는 다름 아닌 정치자금의 운용 규모였다.

그래서 ‘투명한 정치, 깨끗한 선거를 하겠다’고 주장하는 정치인들은 오히려 주변에서 ‘조직력이 약하고, 후원 기반이 없는 무능력자’ 정도로 취급 받았던 게 엄연한 사실이다.

김근태 고문의 불법 선거 자금의 불똥이 여권 실세인 권노갑 전 최고의원 쪽으로 튀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그 만큼 국내에서 돈과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 왔다.


정치적 위상 가늠하는 잣대는 ‘돈’

‘정치=돈’이라는 등식이 굳어진 것은 고비용 저효율의 정치 구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지출하는 주요 항목은 크게 △지구당 운영비 △선거 자금 △개인활동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지구당 운영비와 선거자금은 중앙당으로부터 일부 지원 받기도 하지만 지출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지구당 운영비는 지역조직책 관리비, 사무실 운영비, 지구당 행사비 등으로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약 월 2,000만원 내외가 소요된다. 최저 수준의 규모로 지구당을 운영하고 있는 서울의 한 의원은 “아무리 안 써도 지구당 운영에 월 800만원이 든다”고 하소연 한다. 개인 활동비는 한 달에 수백만원에서 억대까지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선거가 있는 경우 정치 자금은 천문학적인 규모로 늘어난다. 2000년 4ㆍ13 총선 직후에는 정가에서는 ‘50당 30낙’(30억원 쓰면 떨어지고 50억원 쓰면 당선 된다)이란 소문이 나돌았다.

당시 자민련 공천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한 모씨는 “선거 비용으로만 17억원을 썼는데도 떨어졌다”고 실토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특히 최근 각 당의 최고위원이나 대선ㆍ광역단체장 후보의 당내 경선이 치열해 지면서 선거 자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민주당의 한 대선 주자측은 “여야 대선 후보의 경우 지난해부터 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억대의 활동비를 지출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1997년 8용이 접전을 벌였던 신한국당 경선 당시에도 이홍구 전 총리가 “돈이 없어 도저히 경선을 못하겠다”고 고백했는가 하면 박찬종 전의원은 “모 후보가 두 명의 원외 지구당 위원장에게 조직 활동비 명목으로 5,000만원씩 전달했다”고 폭로하는 등 선거자금으로 인한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2000년 민주당 최고의원 경선과 같은 해 있었던 한나라당 부총재 경선에서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두 자릿수 억 단위의 자금이 쏟아졌을 것으로 정계는 내다보고 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불법 경선 자금을 공개한 김근태 고문이 공개한 불법 선거 자금이 2억4,000만원이라면 아마 다른 후보들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김 고문의 경우 본래 정치 자금 동원에 애를 먹는 대표적인 정치인 중의 한 사람이다.

김 고문은 아마 ‘내가 이 정도인데 다른 사람들은 훨씬 더하다’는 것을 대외에 폭로하고자 양심 고백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치 자금은 워낙 민감한 부분이어서 이런 김 고문 식의 양심 고백은 여야 모두로부터 ‘왕따’ 당할 가능성이 높다. 정치 자금에 있어서 만큼은 여야가 따로 없다”고 지적했다.


대부분 비자금 별도관리

정치인들이 이처럼 막대한 활동비를 지출하기 위해선 정치자금 모금에 열을 올릴 수 밖에 없다. 현행 정치 자금법에 따르면 합법적으로 정치자금을 모금할 수 있는 국회의원은 연간 3억원 정치자금을 받을 수 있다.

단 선거가 있는 해에 한해 6억원까지 허용된다. 하지만 이 자금만으로 자신의 지구당을 유지하고, 선거 운동을 하는 정치인은 손에 꼽을 정도다. 대부분 정치인들은 공식적인 후원금 외에 신고하지 않는 비자금을 별도 관리하는 이중 장부를 운영한다.

한 초선 의원의 경우 ‘지난해 모금한 후원금이 4억원에 못 미쳤는데 오히려 사석에서는 7억원의 비자금을 모았다’고 털어 놓기도 했다.

또 다른 정치권 인사는 “100만원이 넘는 금액은 후원자가 오히려 영수증 처리를 원치 않아 영수증을 발급하고 싶어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후원 금액이 올라 갈수록 오히려 후원자 본인이 사석에서 은밀히 주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공식적인 후원금 보다 비공식적인 비자금 규모가 훨씬 많은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정치권과 정부, 시민단체 일각에서는 이런 정치권의 썩은 관행 탈피와 함께 현행 정치자금 제도를 현실에 맞게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 현실과 동떨어진 정지자금 제도가 범법자를 양산하고 불법ㆍ타락 정치를 부추긴다는 지적이다.

민주당은 5일 김근태 고문 파동과 관련, 주요 당직자 회의를 열고 4월 임시국회나 4ㆍ27 전당대회 이후 대선전까지 정치자금법 등 관계법 개정을 추진키로 했다. 각종 선거의 경선 출마자에 한해 모금 한도를 늘려 현실화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선거관리위원회도 정치 자금법 개정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선거가 있는 해의 경우 후원회를 통한 1인 당 연간 모금한도를 31억원으로 늘릴 것을 검토 중이다. 31억원은 1997년 대선 당시 후보자의 선거 비용 상한액인 310억원의 10%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이 같은 방안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닌 당내 경선 비용을 국민 부담으로 충당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후원회 모금은 현행대로 하는 대신 3억원 이상을 법인세를 내는 기업에 한해 법인세의 1%를 정치자금으로 기탁케 하는 방안을 주장하고 있다. 참여연대도 “떳떳한 정치 자금은 양성화하고 불법적인 정치 자금은 철저히 색출해 근절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정치자금 제도 개선에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제도개선 보다는 정치인양식이 문제”

하지만 학계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은 ‘완벽한 제도가 있어도 정치인 스스로가 바뀌지 않는 한 정치자금의 구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좋은 제도’ 보다 그 제도에 따라 행동하는 ‘양식 있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정치인은 국민들이 가장 불신하는 대표적인 집단이다. 제도 개선에 앞서 뼈를 깎는 정치인들의 반성과 실천이 절실하다.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2/03/12 18:28


송영웅 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