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자연을 닮은 동요가수, 이성원

그에겐 영혼을 깨우는 맑음이 있다

가수 이성원(42)을 만난 것을 후회한다. 그를 만난 이후 나는 하루종일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렇게 심란한 하루를 보낼 필요가 없었다. 삭막하든 말든, 굳이 내 일상의 틀이 흔들릴 이유도, 내 삶의 속도가 과연 적당한 것이었나를 진지하게 돌아볼 이유도, 아무렇게나 팽개쳐두었던 어릴 적 기억들, 친구들, 소중하다고 믿었던 가치들, 부모님과 이웃들, 조국이라는 존재를 일말의 죄책감까지 얹은 채 떠올리며 내 마음에 내가 발이 걸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게 더 나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어쨌든 나는 ‘그렇고 그렇게’ 익숙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노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3년 전 처음 그의 동요를 내게 들려준 친구는 “이 사람은 정말 뒷문 밖의 갈잎의 소리가 뭔지 아는 사람 같다”고 말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그는 내 앞에 앉아있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다소 무겁게 시작됐다.

가수로서 의당 관심을 보일만한 모든 서두를 건너뛴 채 그는 “우리는 아직도 일본과 미국에게 많은 것을 빼앗기고 있는, 자신이 패잔병임을 모르는 패잔병 장수”라는 얘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거창한 애국심이나 분노가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오간 얘기를 다 옮길 수는 없지만, 그는 지금도 여전히 문화의 속국처럼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에 적잖이 낙담해 있었다.

그러면서도 시종 담담한 표정으로 차분히 이야기를 잇는 모습이 오히려 비감을 더했다. 동요에 애착을 갖는 것, 국악가요에 대해 집요한 애정을 퍼붓는 것도 자신의 자리에서 우리의 미래를 위해 해야 할 일 중 하나라 정한 것 같았다. 그의 지인들은 그를 ‘가수’대신 ‘아름다운 싸움꾼’이라고 부른다.


아프도록 맑은 동요를 부르는 사람

그는 20여년간 꾸준히 음악에 뿌리를 내려왔다. 1980년대 포크송 가수로부터 출발해 국악과 민요, 최근엔 동요음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품어왔다. 99년부터는 특히 동요가수로 많이 알려졌다.

당시 첫 동요음반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를 발표, 최근에도 ‘반달’ ‘클레멘타인’등의 곡이 실린 음반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를 내놓았다. 얼마 전에도 서울, 경기 지역의 몇몇 초등학교에서 동요공연을 가졌고, 앞으로 전국의 학교를 돌며 순회공연을 펼칠 생각도 갖고 있다.

이따금 방송에 모습을 비출 때도 있지만, 대개는 산골이든 바닷가든 큰 무대보다는 소박한 사람들 틈에 함께 앉아 노래를 부르는 일이 더 많다. 그 자신이 좋아하는 공연부터가 그런 자리들이다.

똑같은 동요를 부르는데도 이상하게 그가 부르면 아프도록 맑은 느낌이 난다. 자신은 고요한데 청중은 울게 만드는 사람.

얼마 전 일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공연했을 때도 교장은 “다 큰 아이들에게 웬 동요 공연이냐”며 반신반의했지만, 정작 공연이 끝날 무렵엔 곳곳에서 학생들이 훌쩍거리고 있었다. 그의 노래를 들은 어른들이 그러했듯, 그의 노래는 너무 맑아서 차라리 슬프다.

그는 경남 진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한때 신문기자로도 활동했던 사업가로,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가족은 남들이 부러워 할만큼 풍족한 삶을 누렸다.

특히 당시엔 갖기 어려웠던 축음기까지 갖춰놓고 재즈 등 흑인음악을 즐길 만큼 음악을 좋아했던 부친은 노래자랑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어린 이씨가 음악의 달콤함을 알게 된 것도 아버지 곁에서였다.

그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부친은 황달과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남의 집 일을 다니는 등 ‘차마 다 이야기 할 수 없을 만큼’ 평생 모진 고생을 겪으며 어렵게 네 자녀를 거뒀다. 걸핏하면 월사금을 내지 못해 수업 중에도 집으로 쫓겨갔던 이씨가 고등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던 것만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같은 처지의 여동생은 심지어 모든 수업을 다 받고도 등록금을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졸업장 없는 졸업생이 됐다.

”그래도 돈이 없어서 못 내는 건 창피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께도 늘 ‘우리에게 찾아온 고생을 달게 받자’고 말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제가 음악의 길을 걷게 됐을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니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생각했습니다.”고교 졸업 후 그도 신문배달, 우유배달, 가구점에서 장롱을 실어 옮기는 일 등 여러 일을 전전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정이 많고 음악에 빠져있던 그는 일꾼으로선 그다지 탐탁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전거를 타고 질주하며 온 몸으로 에너지를 느끼던 우유 배달은 그 중에서도 그가 스스로 즐겼던 일거리였다.

하지만 아는 할머니라도 지나가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우유 하나, 임산부 처지에 먹고 싶은 것 하나 제대로 사먹을 돈이 없는 가난한 형수가 마음에 걸려 우유 두개, 그렇게 정에 이끌려 우유를 이리저리 드리다 보니 제대로 돈이 벌릴 리가 없었다.

해당 우유제조업체에서 마련한 전국노래자랑대회에 나가 1등상을 받고 상금으로 손해액을 메우고 나니 한 푼도 남지 않았다.


자작음반 냈지만 돈 오가는 풍토에 상처

1년쯤 한 전지제조업체의 지점 직원으로 근무한 적도 있다. 단순한 업무 속에서 떠돌던 중 어느날 합창단을 조직한다며 본사로부터 기타가 지급됐다. 고등 학교 때 친구의 집에서 기타를 처음 본 후 독학으로 기타 연습을 하고 있던 이씨에게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 기타를 회사 내 공동목욕탕에 옮겨둔 채 업무 시간에도 몰래 빠져나가 날마다 맹렬한 연습에 몰두하던 이씨. 결국 목욕탕 옆 구내매점에서 고자질하는 바람에 막을 내렸다. 밤업소에서 통기타 가수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이화여대 앞에 카페를 열어 작은 공연장으로 삼았던 때도 있다.

그리고 87년 감격적인 첫 자작음반을 냈다. ‘문을 열고 나서니’라는 타이틀의 포크송 음반이었다. 당시 방송이나 거리에서도 곧잘 흘러 나올 만큼 제법 인기가 있었던 이 노래들을 제작 음반사도 강력하게 밀어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레코드사 사장과 함께 방송국 PD를 만나러 간 자리, 돈봉투가 오가는 것을 보자마자 그대로 자리를 뛰쳐나와 버렸다. 그를 적극 키워주려고 애쓴 레코드사측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돈이 아닌 음악 자체로 정당하게 사랑을 얻고 싶었다.

이후 ‘진주 난봉가’나 ‘밤 뱃놀이’ 등을 들으며 유난히 가슴 설레었던 그는 2집 앨범에서부터 새로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는 그의 전래 민요와 국악에 대한 애착이 그때부터 불이 붙었다.

2월에 발표한 음반 ‘동쪽 산에’만 하더라도 사물놀이의 신명을 옮겨 담거나 휘모리 장단과 같은 전통 리듬을 현대적 기법으로 절묘하게 조합 시키는 등 독특한 시도들이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그는 가사도 곡도 직접 만든다.

거의 한편의 시나 다름없는 절제된 가사는 한때 ‘말이 안 된다’는 이유로 심의에 걸린 해프닝(‘밭’등)도 있다. 곡을 만드는 것도 오선지가 아니라 한 음 한 음 직접 기타 줄을 튕기며 만드는 ‘원시적’인 작곡가다. 악보의 틀에 갇힐 것이 두려워 처음부터 악보를 읽거나 쓰는 법을 일부러 배우지 않았다.

그에겐 휴식이란 것도 특별히 없다. 음반을 낸 다음날이라도 여전히 그의 일과는 다시 새 곡을 만들거나 기존 곡을 매만지는 일들로 이어진다. 신작을 낸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지금도 전통 국악 장단을 기타로 옮기는 작업에 분주하다.

사실 이 흥미로운 작업은 이미 96년에도 시도한 바 있었다. 그런데 당시 그의 독특한 시도를 접한 일본의 한 유명가수가 관심을 보이며 꼬치꼬치 물어왔다. 그리곤 자신의 나라로 가자마자 서둘러 자신의 이름으로 포장해 음반을 발표해 버렸다.

이것은 그대로 동양의 매력을 내뿜는 새로운 작품으로 음악계의 반향을 가져왔고, 사실상 주인인 이씨는 자신과 모국의 음악을 도난 당한 한국인으로서 분노와 충격을 받았다. 일본의 소리 없는 ‘약탈’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감정이 솟구쳐 나왔다.


동요에 생명을 불어넣는 목소리

동요를 부르는 이유도, 심정도 그 아픔과 멀지 않다. 정서적인 감동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론 이 땅에 대한 애정을 일깨워 먼 미래에라도 이 답답한 패잔병의 유산이 청산될 날을 기다리는 마음이 숨어 있다.

동요는 그의 가장 가깝고도 익숙한 일부였다. 사석에서 노래를 부르게 될 때도 그의 애창곡 중 하나는 언제나 우리 동요였다. ‘나뭇잎배’’섬집아기’등이 수록된 99년 첫 동요음반도 그렇게 태어났다.

어느 조촐한 자리에서 그가 부르는 동요를 듣고 그 중 한 사람이 강력하게 음반작업을 추진해 맺은 결실이다. 잊혀져 가는 동요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생명을 불어넣은 사람. 그 맑은 사람에게서 맑은 노래가 나왔다.

“어린 시절의 순수한 마음만 되찾을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은 더 이상 삭막해지지도, 거칠어지지도 않을 겁니다.”어릴 적부터 밤하늘 별을 바라보며 놀기를 좋아했던 이씨. 그에겐 동화 같은 신비로운 경험도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는 88년 어느 겨울날 평택에서 벌어졌다. 새벽 산책을 나갔다가 농장 울타리 안에 서있는 소들을 보았다. 한번 만져보고 싶은 호기심에 다가갔지만 채 손을 뻗치기도 전에 소들은 기겁을 하며 달아나 흩어져버렸다.

그대로 돌아서긴 섭섭해서 즉흥적으로 모음으로만 소리를 내며 나직이 노래를 불러보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흩어져있던 소들이 갑자기 자신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해, 나중엔 스스로 뿔을 들이대거나 혓바닥을 내미는 등 야단 법석이었다.

곧 이어 그가 뿔이며 혓바닥을 만지는 동안에도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돌이켜봐도 신기하고 놀라운 체험이었다.

그는 돈과는 별로 인연이 없다. 기껏해야 차비밖에 해결되지 않는 공연이라도, 그의 노래를 듣고싶다는 이들의 초대는 도무지 거절하지 못하는 성미라 더욱 그렇다. 대신 가난한 노래꾼인 그의 뒤엔 ‘현실에 구애 받지 말고 원하는 음악을 하라’며 아낌없이 밀어주는 남다른 후원자가 있다.

2집 음반 발표 후 그의 노래를 듣고 찾아와 지금껏 자신을 드러내는 법도 없이 묵묵히 그를 지원해주는 분이다. 그는 돈만 빼놓고는 정말 가진 게 많은 사람이다.

3월 23일 서울 동대문 여해 문화공간에서 ‘엄마, 아빠와 함께 부르는 <나 한입만 줘!>’라는 공연도 갖는다. 그가 직접 동요를 부를 뿐 아니라 ‘채송화 피던 시절’에나 있었던 추억 속의 놀잇감들도 함께 펼쳐진다. 이 행사 역시 그의 동요에 매료된 젊은이들이 모여 준비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나는 취재 때 그가 불러준 노래의 여운을 여전히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를 만난 걸 후회하지만, 이보다 더 늦게 만났거나, 영영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크게 후회 했으리라는 것도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2/03/13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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