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헬렌 니어링, 또 다른 삶의 시작

■헬렌 니어링, 또 다른 삶의 시작
(엘렌 라콘테 지음/황의방 옮김/두레 펴냄)

24세의 헬렌 니어링(1904~1995), 45세의 스코트 니어링(1883~1983)은 1928년 사랑에 빠졌다. 나이 차이도 20년이 넘는 이들이 사랑에 빠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채식주의자라는 중요한 공통점 때문만은 아니다. 이 둘의 삶과 사랑은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무엇보다 이들은 자연주의자(naturalist)였다. 더 적게 소유하고(덜 갖고), 더 많이 존재하는(더 많이 누리는) 삶, 즉 단순하며 소박한 삶이 참으로 행복한 삶이며 인류가 지향해야 할 삶이라는 사실을 실천해 보인 사람들이다.

작가 엘렌 라콘데가 쓴 ‘헬렌 니어링, 또 다른 삶의 시작’은 세대를 초월한 어느 부부의 사랑 이야기다. 책은 이 무한 욕망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발길을 잠시 멈추고, 번잡한 일상사의 뒤안길을 산책하며 한번 생각해 보자고 제안한다. 부제:‘헬렌 니어링의 깊은 영성과 아름다운 노년’.

그녀는 요즘 세대가 환경 문제에 호들갑을 떨기 훨씬 전,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인 자를 보인 주인공이다. “나의 삶은 여러 생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늘 나보다 더 앞서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을 겸손하게 한다.

남편이 100세의 나이로 또렷한 의식을 유지한 채 집에서 평화로이 숨을 거둔 이후, 헬렌은 잘 죽는 것과 좋은 죽음을 생의 초점으로 여기고 살았다. 좋은 죽음에 준비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남편이 보여 준 평화스런 죽음 이후, 헬렌에게 죽음이란 새로운 삶의 출발점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것은 곧 상업화 하지 않은 삶이다. 죽음이란 다른 말로, 소비주의, 탐욕, 종잡을 수 없는 폭력, 사회의 부패, 냉소주의, 불신 등 자본주의적 가치와의 결별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책 내용 가운데 헬렌이 사고로 쓰러져 숨 진 뒤, 12명의 친지들이 모여 시신과 유품을 수습하는 대목은 묘한 울림을 남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죽은 자를 떠나보내고 그를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흔치 않은 사실적 기록이다.

버몬트 농장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모습 등 몇 장의 흑백 사진은 부부가 만들어 나갔던 행복한 시간들을 생동감 있게 전해주고 있다. 저자 라콘테는 헬렌의 유언을 집행했던 절친한 친구로, 헬렌이 생시 자신의 전기 작가로 미리 지정해 뒀던 사람이기도 하다.

1995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렇게 밝혔다. “나는 나의 길을 가고 있는 중이며 이 길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나는 이승의 삶이 다하는 때가 오면, 그 길에 나설 준비가 돼 있습니다.” 그녀에게 죽음이란 “고향인 ‘빛’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었다.

이 책은 ‘좋은 삶(good life)에서 좋은 죽음(good death)’으로 나아가는 준비 과정을 기록한 소중한 행장기다. 말기암 환자의 안락사, 호스피스 등 인간적 임종이란 문제와 관련, 가끔씩 불거지는 쟁점에 대해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기도 한다. 서구 종교와 동양 종교의 차이에 대해 관심이 많은 독자들은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녀의 회고록 ‘좋은 삶을 사랑하며 떠나기(Loving and Leaving the Good Life)’는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란 제목으로 이미 번역돼 있다.

장병욱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2/03/13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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