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한명숙(上)

전후 잿빛세상을 밝힌 <노란색> 열풍

1950년대는 6ㆍ25 전쟁의 후유증으로 나라가 잿빛 하늘처럼 우울했다. 모노톤의 세상 빛깔을 갓 태어난 아기 병아리처럼 ‘노오란’ 희망의 색으로 덧칠했던 가수 한명숙.

밝고 명랑하게 노래한 <노란 샤쓰의 사나이>는 전쟁의 고통속에 신음하던 국민들에게 희망찬 꽃 봉투처럼 국가재건의 봄기운을 싹트게 했다. 당시는 독특하고 개성적인 보컬보다는 예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해야 가수로 인정 받던 때였다.

당시 손시향과 박재란의 미성에 취해 있던 대중들은 시원시원은 했지만 삼베같이 거칠은 허스키 보이스가 처음엔 낯설고 괴상하게 들렸다. 어느 시대이건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이기엔 고통의 시간이 필요하듯 최초의 허스키 가수를 받아 들이기엔 반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국내가요로는 최초로 동남아는 물론 미주지역까지 널리 알려져 지금껏 사랑 받는 손석우 작곡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 한명숙은 트로트가 아닌 컨트리&웨스턴 스타일의 새로운 창작곡으로 1960년대 미8군가수시대의 탄생을 세상에 힘차게 알렸다.

한명숙은 1935년 12월 1일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중국에서 <애국>식당을 운영했고 모친은 유치원 교사였다. 타국에서 사업을 해 떨어져 살았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늘 그리움으로만 가슴속에 담겨있다.

어린 시절 늘상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자란 것은 동경 우에노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평양 음대 교수로 재직했던 외삼촌 김재섭의 영향 때문이었다. 한명숙은 진남포 가덕 국민학교 시절 알토파트를 맡은 합창단원으로 활약했다.

전설적인 춤꾼 최승희의 춤사위에 반해 무용도 익혔던 꿈 많은 시절이었다. 진남포 제2여중땐 정구선수로까지 나서며 공부보다는 예체능에 재질을 보이며 외동딸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렸다. 유행가는 모르고 지냈지만 여고에 진학하면서 유독 현인의 <신라의 달밤> <고향만리>같은 독특한 창법의 노래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전쟁이 가수의 길을 걷게 해줄지는 꿈에도 몰랐다. 고 2때인 51년 11월 전쟁을 피해 먼저 월남한 아버지를 찾아 절친하게 지내던 해군 통신대원들의 도움으로 목선을 타고 피난길에 올랐다. 어선이 깨져 오하도, 영호도 등을 두 달간 전전하며 온갖 고생 끝에 도착한 곳이 인천.

해군 오빠들의 도움으로 거처를 정하고 304해군함을 타고 아버지를 찾아 온 부산을 뒤졌지만 허사였다. 18살이 되던 52년, 이웃에 살던 외삼촌의 평양음대 제자 임원근은 오르간을 치며 노래하는 한명숙에게 태양악극단 입단을 주선했다. 첫 무대는 인천 애관극장 악극단무대였다.

이때 즐겨 부른 노래들은 인기가수 장세정의 <연인애가><청춘브루스>. 노래실력은 그저 그랬지만 합창단원으로서의 탄탄한 발성경험과 무용솜씨로 입에 풀칠은 하게 되었다.

2년간 악극단생활을 하자 판에 박은 반복적 무대와 노래에 실증이 났다. 새로운 무대에서 음악을 하고픈 갈증이 느껴졌다.

54년 어느날 알토 색소폰으로 유명했던 미8군 <세븐스타쇼>단장 이준영이 미8군 무대 진출의사를 물어왔다. 숨도 쉬지않고 합류를 했지만 언어의 장벽이 문제였다. 영어는 어깨너머로도 배운적이 없고 발음도 억센 러시아 스타일이여서 미국 노래를 부르기엔 부적합했다.

영어 원문 가사 밑에 한글로 토를 달아 죽으라 연습했지만 국적불명의 괴상한 발음으로 미군들이 알아듣지 못해 낯을 붉히는 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노래라기보다는 영어를 읽기도 어려웠다. 오기가 났다. 멋들어지게 노래를 불러보고 싶었다.

평안도 출신다운 또순이 기질로 노래공부에 전념했다. 70%이상은 엉망인 영어발성법 익히기였다. 매일밤 AFKN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외국 가수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하얀 밤을 지샜다. 라디오를 켠 채로 잠에 빠져 꿈속에서도 노래를 불렀을 만큼 수면부족상태의 멍한 상태로 생활했다.

피나는 노력 덕분에 미군 병사들로부터 ‘한국 가수 중에서 가장 발음이 좋은 가수’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당시 미군 병사들에겐 한명숙보다 더 꺼끌꺼끌한 냇 킹 콜, 패티 패이지, 도리스 데이 같은 허스키 보컬이 크게 어필하고 있었다. 맑은 허스키였던 한명숙이 불러대는 패티 페이지의 <체인징 파트너><테네시 월츠>, 도리스 데이의 <퀘세라 세라> 모창은 대단한 인기를 불러 모았다.

당시 미8군 무대는 가수들에겐 시한부인생 무대였다. 6개월마다 매번 까다로운 오디션을 받아야 했다. 미군 무대에서 제법 인기를 모은 한명숙은 물론 모든 가수들이 항상 긴장하며 노래연습을 했다. 높은 등급으로 통과를 하기 위해 밤을 세워가며 영어 발성법을 익히며 새로운 노래가사를 외우고 연습했다.

한명숙은 21세의 꽃다운 나이에 미8군 무대에서 만난 음악교사출신이자 현역 상사였던 군악대 밴드마스터 이인성과 부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가정을 이루자 더욱 열심히 용산, 오산, 문산, 동두천,군산, 왜관 등 전국의 미군부대와 기지촌무대 순회공연에 나섰다.

전국을 누비는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대우도 좋고 수입도 후해 음악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당시 활동하던 선배가수는 최초의 재즈가수 박단마, 홍청자가 있었고 동료들은 곽순옥, 이춘희, 로라 성,이금희, 현미 그리고 후배로는 최희준, 박형준, 위키리, 유주용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

그 중 존경하는 가수이자 미8군 무대 후배인 최희준은 은인이었다. 그의 소개로 만난 작곡가 손석우는 필생의 히트곡 <노란샤쓰의 사나이>를 선물했다. 61년의 일이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2/03/20 19:38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