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나미의 홀인원] 진정한 프로 '효녀' 세리

한 기자가 박세리에게 물었다.

“2002년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거침없는 대답이 나왔다. "나비스코 챔피언십 우승이죠. " 3월 28일 시작되는 이 대회에서 우승하면 박세리는 대망의 '그랜드슬램'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캐리 웹이 지난해 6월 US여자오픈 우승으로 세웠던 미국 여자프로골프협회(LPGA) 사상 역대 최연소 기록(26세 6개월 3일)을 세우면서...

박세리는 한국을 대표하는 골프 선수이자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지만 내게는 국가대표 동기생이었던 동료이자 친구다. 함께 합숙 생활을 할 때 ‘박세리는 참 성실하고 자기 관리가 철저한 선수’라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박세리는 아버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해 11월 플로리다 웨스트 팜비치에서 벌어진 타이코 에이디티 챔피원십의 기억은 다시 한번 ‘효녀 박세리’를 되새겨 주기에 충분했다.

당시 박세리는 그 대회에서 우승하면 아니카 소렌스탐을 제치고 첫 상금왕 타이틀을 거머 쥘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박세리는 아버지 몸이 아프자 경기를 포기하고 서울로 왔다. 이런 세리를 보면서 ‘과연 보통 프로 골퍼라면 저렇게 마지막 상금왕 기회를 포기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본인은 물론이고 누구든 쉽게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회 포기에는 많은 찬ㆍ반이 있었다. 하지만 박세리는 ‘아빠가 편찮아 경기에 집중할 수 없다’는 이유로 대회를 포기했다. 박세리의 가족에 대한, 특히 아빠에 대한 애착과 사랑은 여느 부녀 골퍼에 비할 수 없다는 사실은 골프계에서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국내 골프계에는 1990년대 중반부터 ‘딸을 프로 골퍼로 키우자’는 붐이 일어 ‘부녀 골프’가 엄청나게 늘었다. 아버지의 전폭 지원으로 골프를 하는 딸들은 대부분 아버지를 ‘무엇이든 해줄 수 있는 든든한 후원자’이자, ‘못할 때는 부담되는 존재’로 여긴다.

하지만 박세리는 언제나 ‘부모에게 뭘 받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릴까? 어떻게 하면 아빠가 좋아하실까?’하고 생각한다. 물론 그때 고민은 당연히 골프대회 우승이다.

요즘 프로골퍼 지망생들은 부모가 해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심지어는 자신이 골프 치는데 성적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부모를 무시하기까지 한다. 부모 입장에선 무조건 좋다는 것은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겠지만 그런 과잉 사랑이 골프 주니어들을 망가뜨린다는 생각도 든다.

최근 국내 주니어 선수 중에는 어렸을 땐 잘하던 선수가 학년이 높아 가면 선수 생활을 그만 두는 경우가 많다. 그 중 상당수는 ‘내가 왜 골프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골프의 진가를 모른 채 오직 성적 올리기에만 급급하다 보니 조로해 버리는 것이다. 주변 친구나 선ㆍ후배 중에도 이런 경우가 상당수가 있어 안타깝다. 그런 점에서 박세리는 대단한 선수라고 할 수 있다.

박세리는 대부분의 골프 지망생들이 겪는 부녀 갈등을 정말 너무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승화시킨 대표적인 선수다. 바로 그 런 점이 오늘의 ‘스타 박세리’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박세리는 모든 프로골퍼들의 꿈인 ‘그랜드 슬래머’가 되기 위해 올초부터 미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하루 8시간씩 강도 높은 훈련을 하고 있다. 새벽부터 올랜도 시내 첼로베이션 병원재활센터에서 2시간 동안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집 근처 베이힐리조트 골프코스에서 오전과 오후로 나눠 하루 6시간씩 스윙을 가다듬고 있다.

그래선지 벌써부터 박세리의 첫 경기에 관심이 모아진다. 50여년의 미LPGA 투어 사상 지금까지 5명 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그랜드 슬램의 명예 획득. 한때 필드에서 경쟁자이기도 했던 박세리가 최연소 이런 엄청난 일에 도전한다고 하니까 왠지 내 마음까지 설레인다.

대기록 도전에 나서는 박세리가 받는 중압감은 어느 때보다 클 것이다. 진정 박세리의 선전을 기원하는 팬이라면 박세리가 과연 몇 등을 하느냐는 성적 결과가 아닌, 박세리 선수 자체를 응원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그 것이 박세리 어깨 위에 지워진 짐을 덜어주는 가장 효과적인 응원이 될 것이다.

박나미 프로골퍼·KLPGA정회원 올림픽 콜로세움 전속 전 국가대표

입력시간 2002/03/24 15:55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