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동작구 노량진역

역(驛)은 만남과 헤어짐이 엇갈리는 곳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역에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떠나보내는 사람을 아쉬워하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에서도 그런 정경을 목격할 수가 없다.

헤어져 멀리 떨어져 있다는 공간의 허전함과 그리움을 오직 편지에만 전달하던 그 세월의 공간을 훨씬 뛰어 넘어, 이제는 지구의 반대편 쪽 사람과도 영상을 마주 보며 주고 받는 대화의 좁은 공간, 디지털 시대가 눈물을 메마르게 했는지도 모른다.

어스름이 내리는 로마역 구내에서 제니퍼 존스가 한나절 사랑했던 몽고메리 클리프트를 영영 떠나보내는 빅토리오 데시카 감독의 ‘종착역(終着驛)’.

30대 미망인 아누크 에메카 시골 기숙학교의 아들을 면회 왔다가 기차를 놓치고 같은 처지의 장 루이 트라티니앵을 만나 사랑의 첫발을 내딛는 를류슈 감독의 ‘남과 여’…헤어짐 속에 만남이 예약돼 있고, 만남 속에서 헤어짐이 잉태되는 곳이 역이기도 하다.

‘서울 가는 12열차에/ 기대앉은 젊은 나그네/ 잘 가세요 잘있어요/ 창밖에 기적에 운다/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자집이요/ 경상도 사투리에/ 아가씨가 슬피우네/ 이별의 부산 정거장…’ 전쟁의 포화속에서 피난살이의 서러움과 그래도 고달픈 판잣집 생활, 정든 이와의 이별을 노래한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 정거장」에서 부터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등 오늘에 이르기 까지를 절규한 송창식의 「고래사냥」도 모두 정거장이 있는 열차역이다.

이 땅에 철도가 놓인 것은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제물포간.

노량진은 철도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노들나루’라 하여 맞은 편 용산 나루를 잇는 큰 나루 터였다.

서울에서 한강에 삼진(三鎭)이라 하여 한강진(漢江鎭:한남대교 북단 순천향 병원 앞), 양화진(楊化鎭)과 노량진(鷺梁鎭)도 군사 나루터로 조선조 숙종 29년(1703)에는 진선(鎭船) 15척이나 상주할 정도의 군사요충지이기도 하였다.

이 노들나루에 우리 나라 최초로 철도가 놓이면서 노량진역이 세워지고,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처음으로 쇠말(鐵馬)이 제물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어 1901년 8월 21일 영등포와 초량(草梁:부산)을 잇는 복선철도(復選鐵道) 444.5km가 기공식을 갖고, 1905년(광무 9년) 1월 1일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열차 이름도 처음에는 「융희(隆熙:순종황제의 연호)」였다.

광복이 되면서 「해방자호」로, 1955년에는 「통일호」로, 「태극호」 「풍년호」 「비둘기호」 「맹호호」 「청룡호」에서 오늘의 「무궁화호」 「새마을호」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세월 따라 통치자의 국정지표상이 반영된 열차가 철길을 달리고 있다.

철도는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교통의 기능을 말한다면, 공간적인 격리를 극복하여 생산이나 소비 효용을 극대화시키고 폐쇄된 사회를 개방시키는 기능도 있다. 19세기 독일철도의 발달은 봉건국가수준에 머물렀던 독일을 통일시키는데 기여했다.

미국 개척시대에는 미국의 새로운 사회를 형성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또 동서독 통일의 출발점도 1972년에 체결된 동서독 통행 협정이라 할 수 있다. 이 협정을 계기로 동서독간의 인적 물적 교류가 기본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남북교류사업에 있어서 철도연결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철도! 우리나라 철도가 처음에 노량, 초량의 량(粱:들보:Beam)’에서 시작되었다면 이제는 ‘량(梁)’이 아닌 회령(會寧:함경북도)의 ‘령’으로 이어졌으면 한다.

이홍환 현 한국땅이름 학회 이사

입력시간 2002/03/26 11:48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