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盧도] 노무현 돌풍을 잠재워라

정계 개편등 돌출 이슈로 대 혼전

‘노무현 돌풍’이 정가에 황사 회오리를 몰고 오고 있다.

최근 각 언론사의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내 경선 상대인 이인제 후보는 물론,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마저 큰 표 차로 따돌리고 ‘대권 후보 0순위’로 부상하자 여야 정치권이 ‘노풍의 눈’을 중심으로 일대 변혁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내의 개혁파 중진과 소장 의원들이 속속 노무현 캠프에 합류하는 등 각종 벤처 게이트로 침잠해 있던 여권이 노 후보를 중심으로 숨가쁘게 움직이고 있다. 또한 그간 유력 후보인 이인제 후보를 겨냥했던 한나라당도 총의 가늠자를 급히 노무현 쪽으로 돌리며 일전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대선 경선 상대인 이인제 후보측은 당초의 포지티브 경선 전략에서 급선회, 노 후보에 직격탄을 날리는 네거티브 전략으로 전환해 ‘노무현 흠집내기’에 팔을 걷어 붙였다. 정치권 이곳 저곳에서 벌써부터 ‘노풍(盧風) 잠재우기’가 벌어지고 있다.


강원 경선서 '노 대세론' 각인

노풍(盧風)이 정가 ‘태풍의 눈’으로 급부상하게 된 데는 3월 16일 민주당 광주 경선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

한화갑 후보의 절대 우세로 점쳐지던 광주에서 노무현 후보가 단독 선두로 치고 나오면서 정치권 안팎에서 심상치 않은 기류가 일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안론’에 ‘대세론’으로 일시에 돌변한 것이다.

여기에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호화 빌라 파문과 비주류의 반발로 내홍을 겪으면서 노풍은 일진광풍 수준을 넘어 정계를 뒤흔들 매머드 토네이도로 변한 것이다.

노무현 후보 자신도 예측하지 못한 이런 갑작스런 인기몰이는 곧바로 주변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이른바 노풍의 뒤에 보이지 않는 ‘김심(金心ㆍ김대중 대통령의 의중)이 작용하고 있다’는 ‘음모론’이다. 여기에 노 후보의 정계 개편 구상까지 싸잡아 반대파들의 공격 대상이 돼 버렸다.

노무현 후보는 노풍이 한창 불붙고 있던 3월 20일 “내가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되면 곧바로 한나라당의 개혁 세력을 포함해 범 민주세력을 통합하는 정계 개편에 착수할 계획을 갖고 있다”며 “지역 구도가 아닌 정책 대결 구도의 큰 틀에서의 정계 개편을 위해 후보직을 포함한 모든 기득권을 내놓을 수도 있다. 모든 가능성을 폭 넓게 열어 놓겠다”고 말했다.

노 후보는 최근까지 사석에서 “평민당 이전으로 돌리는 게 희망”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다시 말해 DJ와 YS가 갈라서기 이전의 통합 야당 시절이었던 신민당 때의 구도로 돌아가 대선을 치르고 싶어하는 개인적 열망을 수 차례 밝혀 왔다.

이런 노 후보의 돌연한 정계 개편 발언이 음모론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예상치 못한 노풍에 당황한 이인제 후보측은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노풍에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고 노 후보에 대해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 후보측은 ‘음모론’ 제기를 통한 노 후보의 정치ㆍ사상적 급진 논쟁과 정통성 시비, 그리고 대선 후보로서 노 후보의 검증, 국정운영 능력, 재산 문제 등에 대해 집중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다.


음모론 빌미 제공한 정계개편론

이인제 후보는 3월 19일 경선 레이스에서 3위를 달리고 있는 한화갑 후보가 사퇴하자 즉각적으로 이번 경선에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는 ‘김심론’을 내비쳤다.

사실 김심 의혹을 가장 먼저 제기한 후보는 검찰에 구속된 유종근 지사였다. 유 지사는 후보를 사퇴하면서 “권력 실세로부터 후보 사퇴 압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 때부터 정치권 일각에서는 특정 후보를 민주당 후보로 내세우기 위해 경선을 조작하고 있다는 시나리오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당시 떠돌았던 음모설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청와대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 맞서 승리할 수 있는 구도를 연구한 결과 이인제 고문 보다는 노무현 고문을 내세워 ‘서민과 귀족’의 대결 양상으로 끌고 가는 것이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노 고문을 밀기 위해 박지원 청와대 정책특보를 중심으로 임동원 특보, 김한길 전 문광부 장관 등이 나서 노 고문이 유리하도록 경선을 수면 아래에서 진두지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에 따라 김근태 후보가 가장 먼저 양심선언을 통해 노 고문에 백기 투항하고, 이어 유종근 지사를 뇌물 수수 혐으로 구속해 하차 시켰다는 것이다.

이인제 후보의 핵심 선거 참모였던 김운환 전의원이 경선 중 부산 다대ㆍ만덕 지구 택지 전한 의혹사건으로 전격 구속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한화갑 후보가 사퇴한 것도 이런 시나리오의 한 축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에 각 방송사와 언론사들이 이 때부터 일제히 노무현 후보가 이인제 후보는 물론이고, 여당 후보로는 처음으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를 꺾는 여론조사 결과를 잇달아 발표하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이 후보 등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노 후보의 바람을 일으키는 일련의 일들이 김심에 따라 청와대측의 치밀한 전략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후보는 급기야 충남 경선을 하루 앞둔 3월 22일 모TV 방송국 토론회에서 노 후보에게 “박지원 청와대 정책특보를 만난 적이 있느냐”고 의심되는 배후 세력의 실명까지 드러나는 초강수를 썼다. 이 후보는 충남 경선 이후에 기자회견을 자처해 “대통령 가까이에서 경선에 보이지 않는 손을 행사하는 측근은 대통령 곁을 떠나라”고 촉구했다.

이 후보측은 일단 점점 세력이 커가는 ‘노풍’을 일단 막아보자는 것이 1차 목적이지만 이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별도의 행보를 취할 가능성도 있다는 뉘앙스를 비치기도 했다. 이 고문의 한 측근은 3월 23일 “강원 경선(3월 24일) 이후 여론의 추이를 보아가면 이 후보가 중대 결심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고문의 또 다른 측근은 “당내 경선에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는 것 자체가 중대 결심”이라고 밝혀 이 발언을 임시 봉합했지만 최악의 경우 경선 포기나 탈당 불사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자칫 민주당 경선 판이 깨질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YS '노 플랜' 동조 분위기

일부에서는 이 후보의 이런 움직임이 단계적으로 공격의 수위를 높여 정계 개편 배후 논란을 증폭시킨 뒤 불리할 경우 경선 중도 사퇴의 명분을 쌓기 위한 수순 밟기에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다.

반면 민주당 고위층은 이 후보가 1997년 대선 당시의 ‘경선 불복’이라는 원죄를 항상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만큼 쉽게 경선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 노무현 후보가 구상하고 있는 정계 개편의 한 축을 형성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측이 노 후보의 그랜드 플랜에 동조하고 나서 눈길을 끌고 있다.

김 전대통령의 대변인 격인 한나라당 박종웅 의원은 3월 22일 “동교동과 상도동을 분열 이전인 통합 야당 시절로 돌리자는 노 고문의 주장은 지역 감정 해소의 명분이 있는 만큼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의원은 또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지지율 하락은 거품이 빠진 결과라는 게 김 전 대통령의 생각”이라며 “김 전 대통령이 노 고문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고 말해 김 전대통령이 노 후보 지지 가능성을 비쳤다. 일단은 노 후보의 정계 개편 구상 전략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지는 대목이다.


정계개편론, 영남전략? 장기구상?

정계에서는 노무현 후보가 정계 개편을 주장한 것에 대해 대체로 두 가지의 시각을 갖고 있다. 우선 단순히 노 후보가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부산, 영남권 표를 끌어 안기 위한 단기 전술의 하나로만 보는 관점이다.

노 후보는 앞으로 계속될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이인제 후보측으로부터 엄청난 역공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 후보의 대세론이 충청과 경기, 강원 일부에서는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어 노 후보로서도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 후보는 대구 부산 등 영남권의 경우 현재 3위를 달리고 있는 김중권 후보에게 상당 부분 표를 잠식 당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1995년 부산 시장 선거에서 37%, 2000년 4ㆍ13총선에서 부산지역에 출마해 35%의 득표에 그치며 고배를 마신 전력이 있다.

따라서 노 후보가 YS를 아우르는 정계 개편을 주장한 것은 YS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부산과 영남권 민심을 확실히 잡아 경선 승기를 굳히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한나라당의 이부영 전 부총재도 최근 인터뷰에서 “노무현 후보가 주장하는 정계 개편은 단순히 국민 경선을 겨냥한 일종의 경선 전략의 일환”이라고 의미를 축소 했다.

이에 대해 노 후보의 정계 개편 구상은 장기적인 마스터 플랜에 따라 나온 것이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노 후보는 경선 이전부터 이런 형태의 정계 개편을 주장해 왔다. 더구나 이 주장은 노 후보의 정치적 성장 과정을 봐도 상당부분 일치한다.

고졸 출신 변호사인 노 후보가 정치에 입문한 것은 1988년이다. 당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추천으로 정치계에 발을 들여 놓은 노 후보는 불과 2년 뒤인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해 김영삼 사단에서 뛰쳐 나왔다.

그러다 1년 뒤인 1991년 9월 김대중 총재와 야권 통합을 이뤘으나, 1995년 국민회의 창당 때 김대중 사단과도 결별을 선언했다. 노 후보는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DJ와 다시 손을 잡은 뒤에 반 DJ 정서가 강한 부산에서 출마했다가 실패했다.

따라서 노 후보에게 있어 YS나 DJ는 ‘정치적 대부(大父)’나 마찬가지다. 노 후보로서는 이들을 모두 끌어 안는 대통합을 이룬 뒤 구 민정계가 밀고 있는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 대선에서 맞서고자 하는 구상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후보의 정계 개편 그랜드 플랜이 성공할 지, 이인제 후보의 ‘음모론’ 공세가 효과를 볼 지는 누구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단지 선거 승리를 위해 짜집기식 정계 개편을 주장하고나, 근거 없는 흠집내기 식의 비방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2/03/28 15:06


송영웅 주간한국부 heroso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