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한명숙(下)

한류열풍의 원조, 모범적 삶의 귀감으로…

한명숙은 10년이 지나서야 자신의 목소리를 음반에 담았다. 데뷔음반 <손석우 멜로듸-비너스레코드.VL1,61년.10인치LP>.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포함 총8곡이 수록된 컴필레이션 10인치 LP였다. 대중들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잠 못 이루던 한명숙에게 좌절감이 몰려왔다.

음반 발매 직후 전국의 레코드상에서 ‘한명숙이 가수 맞냐. 목소리가 쉰 것 같이 이상하다’며 무더기 반품사태가 빚어졌다. 당시는 맑고 고운 목소리가 가수의 제1 조건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악극단무대로 시작해 천신만고 끝에 취입한 첫 데뷔곡이었다.

판매상들로부터 싸늘한 외면을 당하자 뜬눈으로 밤을 지세울 만큼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미8군 무대에 서기위해 전념했던 영어식 발음은 ‘주체성이 없는 가수’라는 혹평으로 쏟아져 나왔다. 가혹한 신고식이었다.

좌절의 시간은 반년이나 이어졌다. KBS 라디오에서 간간히 그의 노래가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기름에 불을 댕긴 듯 전국이 노오랗게 물드는 기적이 일어났다.

사실 <노란 샤쓰의 사나이>의 원곡은 대중들이 기억하는 경쾌한 트위스트풍의 노래가 아니었다. 느릿한 브루스풍 재즈곡이었지만 온통 맘보와 트위스트 리듬이 온 나라를 뜨겁게 달궈놓자 작곡가 손석우는 빠른 템포의 트위스트곡으로 편곡을 해 보았다. 적중했다. 노래 제목에 색채감이란 없었던 이전 곡들과는 달리 ‘노란’ 색깔은 온 나라를 빠르게 채색 시켜 갔다.

또한 경쾌한 트위스트 리듬과 허스키 보컬에서 뿜어 나오는 강한 호소력에 대중들은 흥이 절로 났다. ‘음반이 얼만큼 팔렸는지도 모르겠다. 미군들이 귀국 선물로 내 음반을 모두 가져갔다’고 한명숙은 감회에 젖는다.

요즘 사람들은 몇 년 전부터 화교권 국가들에 한류열풍이 불어 닥친 줄 알지만 오해다. 이미 40년 전인 1960년대 초반부터 한류열풍은 시작되었을 만큼 그 뿌리는 깊다.

한명숙이 주인공이었다. <노란 샤쓰의 사나이>는 국내를 벗어나 일본과 대만은 물론 태국,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까지 열병처럼 번졌다. 태국에서는 음반 취입이 이루어졌고 대만에서는 중국어로 번안하여 화교권에 널리 불리어졌다. 지금도 대만에서는 이 노래를 자국노래로 알고 있을 정도이다.

한명숙의 노래 열풍이 후끈하자 자신감을 얻은 미 8군 <화양> 프로덕션은 쇼단을 소집해 1965년 필리핀,태국,싱가포르 등 동남아 순회 공연에 올랐다. 66년에는 베트남으로 파월 장병 위문공연을 3번이나 다녀오고 미국 공연에도 오르는 등 가히 폭발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미주 공연 길에 만난 미국인들은 동양인만 보면 ‘노란 샤쓰를 아느냐’고 물어왔고 미군들은 <노란 샤쓰의 사나이>가 연주되면 어느새 기립을 할 정도로 경의를 표했다.

뜨거운 인기는 곧바로 독집 앨범 <한명숙-비너스레코드.VL21.10인치LP> 발표로 이어졌다. 50~60년대는 최고 인기가수도 독집 앨범을 내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63년에는 엄심호 감독의 영화<노란 샤쓰의 사나이>에 신영균, 엄앵란, 박암과 함께 주연으로 발탁되며 또 한번 장안의 화제를 불러왔다.

TV도 없던 당시 영화는 매번 만원사례를 기록하며 인산인해를 이룰 만큼 한명숙은 감당키 힘든 사랑을 받았다. 당시 언론들은 ‘숫기가 없는 한명숙의 어색한 연기가 영화에 재미를 더해 주었다’고 평했다.

이후 한명숙은 <영화주제가 밤안개-도미도레코드,LD158.10인치LP> 등을 발표하며 일반 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주무대는 쇼 공연을 했던 <수도극장>과 수도권의 극장들. 주로 100여곡의 팝 계열 곡을 발표한 한명숙은 <검은 스타킹><눈이 내리는데><사랑의 송가>등으로 히트 퍼레이드를 이어갔다.

시련은 가정에 있었다. 남편의 오랜 실직으로 2남 1녀의 자녀들과 어머니 등 10여명 집안 식구들의 뒷바라지는 몽땅 그녀의 몫이었다. 이혼을 생각할 정도로 정신적 고통이 컸다. 70년 3월 고혈압으로 남편이 쓰러지자 가계는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생계를 위해 억척스럽게 야간업소에서 노래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가수 생명에 치명적인 두 번의 성대수술이 기다리고 있었다.업소에서는 돈을 들고 와 무대에 서기를 재촉했지만 노래를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였다.

‘도도하여 밤무대에 서지 않으려 한다’고 자신의 처지를 오해한 업소 사장들의 간청에 못 이겨 무대에서 노래를 해 보았지만 절반도 못 부르고 고통스런 목을 부여잡고 울먹여야 했다.

가수생활을 접고 카페사업을 해보았지만 맑고 바른 심성의 한명숙에겐 술꾼들의 짓궂은 장난이 비위에 맞지 않았다.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한명숙은 남모르게 오랜 기간 노래 봉사활동을 해왔다. 주례 선생이었던 장군이 5.16 혁명 때 수감이 되자 교도소 위문을 다녀오면서부터 봉사인생은 시작되었다. 교도소와 장애인에 대한 노래봉사활동이 뒤늦게 알려져 60년대 말 법무부장관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또한 억척스럽게 자식들을 교육시키며 올곧게 살아온 그녀의 삶에 감동한 동료 가수들은 77년 <장한 어머니상>과 <모범 가수상>을 건네며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2000년 10월 <문화의날>행사에서는 가요로 국위선양을 하고 노래 봉사활동으로 사회의 모범이 된 업적을 인정 받아 문화훈장을 받았다.

현재 법무부 청소년 선도 위원인 한명숙은 ‘기량이 출중하고 열심히 노래하는 요즘 후배들이 자랑스럽지만 진심으로 선배에게 인사하는 마음가짐을 가졌으면 좋겠다’며 바르게 살아온 음악선배로서의 아쉬움을 건넨다. 그녀가 물들인 노오란 빛깔의 가요는 국민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건네준 소중한 노래 선물이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2/03/31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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