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남산식물원 최상인 원장

"꽃들과의 이별준비가 슬프네요"

갑자기 그에게서 말소리가 뚝 끊겨버렸다. 50대 후반의 원장. 이를 꽉 깨문 채 표정이 불안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결국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눈물이 비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이러지 않으려고 해도 그 얘기만 나오면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정말, 내 반평생을 다 바쳐, 내 자식보다 더 마음을 쏟았던 애들입니다. 다른 건 괜찮은데, 30년 넘게 같이 살았던 얘들을 남겨 두고 떠난다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한참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올 연말 정년퇴임을 바라보고 있는 남산식물원 최상인(58) 원장. 퇴직에 대한 가벼운 질문에도 몹시 힘들어 했다. 두 번 다시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없었다.

서울시 중구 회현동 1가 100-700번지. 최 원장이 30여년간 몸담아 온 곳이다. 여름에 가까울 만큼 따사롭던 봄날, 식물원 입구에서 만난 최 원장은 날씨만큼이나 밝고 환한 표정이었다. 곳곳을 돌며 자상하게 식물 가족들을 소개해 줄 때도 내내 따사로운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직전까지도 그들을 챙겨주다가 나온 길이라 했다.

“이건 길상천이라고 불리는데, 약 1년에 걸쳐 꽃을 피운 뒤엔 죽어버립니다. 그 꽃 하나를 피우기 위해서 목숨을 다하는 셈이지요. 아무리 식물이라지만 마음이 애닯지요. “

“이 선인장들은 일부러 고생을 좀 시키고 있어요. 정량보다 물을 적게 주지요. 그러지 않으면 꽃을 피우지 않거든요. 식물도 사람과 같아서,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모든 게 편안하면 굳이 꽃도 피우려 들지 않고 게으름을 피지요.”

“재미있는 것은, 겉보기에 못 생긴 선인장은 꽃이 예쁘고, 제 몸이 잘 생긴 선인장은 꽃이 별로 안 예뻐요. 하늘이 참 공평한 것 같지 않아요. “

“저 난실(蘭室)엔 왜 못 들어가냐구요. 쟤들은 성질이 아주 예민해요. 사람들이 조금만 성가시게 오락 가락거려도 싫어하고 잘 아파요. 이 정도쯤 떨어져서 쳐다 보는 건 괜찮아요.”


“물 주는 것 하나 제대로 익히는데도 3년”

현재 남산식물원에 소장된 식물들은 총 778종 6600여본. 1968년 12월, 월남전 파병 군인들이 기증한 희귀 식물들로 1호 관을 개관한 이후 현재 총 4호 관으로 구성돼 운영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식물원이라는 역사와 명성과 함께 연간 35만 명이 다녀가는 국가적인 명소다. 최 원장은 1971년부터 이곳에서 근무해왔다.

그 후 30년이 넘도록 그의 일과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출근하자 마자 밤사이 식물들이 별 탈 없이 잤는지, 그 넓은 온실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인사를 나눈다. 식구가 수 천 본이니 한번 돌아 보는데 만도 진이 다 빠진다.

목말라 하는 놈은 물을 주고, 아픈 놈은 데려가 치료도 해주고, 벌레도 잡아주고, 위로가 필요한 놈은 다독거리기도 하면서 하루가 지난다.

그리곤 수시로 자신이 집에서 키우는 화분문제로 상담을 청하는 시민들의 이야기도 들어주고, 병아리처럼 몰려다니는 어린이 견학단이 기특해 옆에서 자상한 선생님 노릇을 할 때도 있다. 이름은 원장이지만 지금도 직원들과 함께 삽질이나 흙을 만지는 일을 함께 한다. 틈틈이 만든 자작 분재들도 식물원 한 켠에 단체로 앉아있다.

“대개 식물관리라고 하면 호스로 물만 좍 뿌려주면 되는 줄 알지만, 물 주는 것 하나도 제대로 익히려면 최소한 3년은 해봐야 합니다. 물만 준다고 식물이 잘 크는 것도 아닙니다. 뭣보다 정이 필요합니다. 마음으로 정을 주며 키우다 보면 나중엔 한눈에 보기만해도 지금 식물 상태가 좋은지 어떤지, 어디가 왜 아픈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아주 미미한 변화까지도 눈에 띄는 거지요.

예를 들어 선인장은 10월 중순부터 2월 무렵까지 휴면 상태입니다. 사람으로 치자면 그냥 겨울잠만 자는 시기라, 물을 적게 줘야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보면 ‘아, 얘가 이젠 잠에서 깼구나’하는 걸 알게 되지요. 가시에서 갑자기 밝은 빛이 도는 게 우리 눈엔 보이거든요. 그럼 그때부터 다시 물을 듬뿍 주는 겁니다.”


하루종일 식물들과 대화 “참 정직해요”

관람객들은 후덥 지근하다며 불편해 하는 온실 안 공기도 그에겐 더없이 편안하다. 오히려 온실보다 조금만 차가운 공기를 쐬도 보통 사람들보다 더 민감하게 추위를 탄다. 오랜 식물원 생활에 체질도 온실형으로 바뀌어버렸다.

“하는 일이 너무 정적이라서 지루하지 않냐고 물어보지만, 전 잘 모르겠습니다. 한번도 갑갑하거나 심심하다는 생각을 안 해 봤어요. 얘들과 늘 대화를 합니다.

이파리가 늘어진 걸 보면 ‘아이구, 네가 목이 많이 말랐구나. 물을 못 줘서 미안하다’고 하고선 얼른 물을 주기도 하고, 영양이 부족해보이면 ‘잘 먹고 잘 자라달라’고 부탁하면서 영양제를 주고 나면 신통할만큼 눈에 띄게 변화가 나타납니다.

다른 분들도 많이 말씀하시겠지만, 식물만큼 순수하고 정직한 게 없습니다. 사랑을 주면 준 만큼 꽃으로, 열매로 보답을 하지요. 얘들과 함께 있으면 전혀 외롭지 않습니다.”

전남 장성이 고향. 어려서부터 식물에 관심이 많았다. 1960년대에 농업전문학교를 졸업, 남산식물원을 처음 본 것은 1년 반 동안 베트남 파병군인으로 참전하고 돌아온 직후 어머니와 함께 나선 나들이에서였다.

그곳에서 바로 얼마 전 자신이 월남에서 구경한 식물들과 다시 마주치면서 전장에서의 추억과 함께 식물원의 매력을 느꼈다. 제대 후 다시 남산식물원을 찾았을 때 2,3,4호 관으로 확장하는 대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한 재일교포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던 희귀 식물들을 다량 기증하면서 식물원의 규모도 늘리게 된 것이다. 정부의 위탁에 따라 그 공사 자체도 기증자인 재일교포가 맡고 있었는데, 공사 광경을 지켜보다 말고 그는 무작정 재일교포를 찾아갔다.

그리곤 자신을 소개한 뒤, 그곳에서 일 할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초면의 젊은이와 신사. 마침내 그는 서툰 한국말로 ‘그럼 한번 해보라’고 말하는 교포의 대답을 들었다. 찔 듯이 더운 여름이었지만 공사가 진행되는 몇 달 동안 꾀 한번 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초빙된 2명의 일본인 기술자들과 함께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물들을 옮겨 심는 등 종일 덥고 힘든 일들이 이어졌다.

현재 남산식물원에 자리한 식물군 상당수가 바로 그렇게 최 원장 손에서 첫 뿌리를 내린 것들이다. 원래는 공사를 위한 일용직 원예기사에 불과했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평생 이 길을 가기로 다짐한 그는 함께 일하는 일본인들의 기술까지 스스로 다가가며 열심히 전수 받았다. 일본어를 모르던 처음엔 한문 필담까지 동원했다.

1971년 9월 마침내 개관을 맞으며 정식 직원을 채용할 때가 오자 총책임을 맡고 있던 재일교포는 망설임 없이 그를 선택했다.

몇 달 동안 그를 지켜보며 내린 결정이었다. 식물주임의 자리에서부터 출발해 꾸준히 자리를 다져나갔고, 일본과의 교류가 쉽지않던 시기에도 교포의 각별한 배려로 일본 현지의 전문교육을 받고 온 바 있다. 나중에 식물원 관리업무가 서울시로 이관되면서 곧바로 원장으로서의 책임을 맡게 됐다.

“원장을 맡고 보니 기쁨보다 부담감이 더 컸습니다. 특히 여기 있는 식물들은 국내에 유일한, 그것도 여러 본도 아닌 단 하나 씩 만 있는 것들이라서 혹시라도 잘못되면 어떡하나, 책임감이 너무나 크게 다가오는 겁니다.

실제로 초창기엔 워낙 원산지의 기후나 토양과 달라서 결국 우리 토양에 적응하지 못해 죽는 경우도 가끔은 있었지요. 하지만 초창기에만 잠시 그랬을 뿐 이후론 지금까지 별 사고 없이 지내왔습니다.”

초창기부터 함께 했던 동료들은 많았지만 끝까지 남은 사람은 지금껏 그 혼자뿐이다. 식물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또는 다른 일에 이끌려 뿔뿔이 흩어지는 동안에도 그는 묵묵히 온실만 지키고 있었다.


가족나들이 못해본 미안한 가장

현재도 국내 대표급 식물원이지만, 개관 초창기에 받은 사랑은 지금도 가슴이 벅찰만큼 기록적이었다.

나들이 코스라곤 창경원, 남산이 거의 유일했던 시절, 더구나 대통령까지 주목한 이곳을 보겠다고 전국에서 물결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주말이면 차례를 기다리느라 늘어선 줄이 식물원 입구에서부터 멀리 어린이회관까지 아득하게 뻗어있었다. 그 사람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지를 되새기곤 했다.

“초창기엔 도난사고도 왕왕 있었습니다. 심각한 도둑이라기보다는 구경하다 말고 욕심이 나서 한번 슬쩍하는 정도였는데, 예를 들면 자신이 쓰고있던 모자를 선인장 위에 휙 던져서 덮어씌웁니다.

그리곤 모자를 집는 척 하면서 그 속의 선인장을 함께 집어서 숨겨가는 겁니다. 나가는 모습이 이상해 붙들고 확인해보면 영낙 없이 그런 분들이었지요. 그래도 다 식물을 좋아하다 보니 생기는 일이라고 생각해 대부분 좋게 말씀 드리고 보냈는데 어떤 분은 ‘가져가서 내가 잘 키워보겠다’고 고집을 피운 것도 생각납니다. (웃음)”

원장으로 자리한 세월만 약 20년, 휴일은 물론 휴가 한번 제대로 가져본 기억이 없다. 친구들을 만날 때도 식물원으로 불러들였고, 가족과 다닌 일이라곤 단체로 마련된 부부동반 여행 한 두 번이 전부다.

이미 다 장성한 자녀들에겐 그나마 놀이동산 한번 평생 데려가보지 못했다.

“원래 조실부모해서 외롭게 자란 터라 아이들을 다섯이나 두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들보다는 이곳에 더 애착이 많아서 가족들에겐 늘 불만을 사는 가장이었습니다. 실제로 가족들에겐 아무것도 제대로 해준 것이 없어 늘 미안했지만,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런 온실 식물은 노천과 또 달라서 조금만 방심해도 바로 죽어버리기 때문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거든요. 집에선 대우 받지 못하는 가장에다 원망도 많이 들었는데, 세월이 많이 흐른 이제는 가족들도 저를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아이들이 ‘아버지가 존경스럽다’고 하더군요. "


지독한 꽃 사랑, 헤어짐 쉽지 않아

요즘 그는 퇴임을 위한 준비로 지난 30여년의 자취를 하나 둘씩 정리하고 있다. 식물원 관련 자료들도 정리하고, 자신이 터득한 노하우도 직원들에게 아낌없이 물려주고 있다.

‘나 없더라도 아이들을 잘 돌봐달라’는 애틋한 마음에서다. 퇴직 후 강연을 맡아달라는 곳도 이미 몇 군데나 있지만, 그의 마음엔 아직도 식물원밖에 들어설 자리가 없다. 너무 지독하게 사랑해서 헤어짐이 쉽지 않은 그의 곁에서 잔인하도록 아름다운 봄이 익고 있다.

“요즘이 꽃을 구경하기에 가장 좋을 때입니다. 철쭉, 동백 등 이때 가장 꽃이 많이 피거든요. 이 향긋한 냄새요. 귤과의 식물에서 나는 거예요. 한창 향기를 뿜을 때거든요.” 그를 울리는 ‘아이들’이 누구인가는 직접 가서 면면을 만나보기를 바란다. 그는 아직 남산식물원의 원장이다.

글·사진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2/04/04 19:10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