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곽성삼(上)

대중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1970년대 중반부터 27년간 토속 국악가락을 포크리듬에 녹여온 노래하는 장돌뱅이 곽성삼.

그의 노래들은 일반대중들에게 여전히 낯설지만 대중가요 마니아들에겐 1980년대의 대표적 언더그라운드 포크 싱어 송 이터로 추앙을 받는 독특한 대중 음악가이다. 기억 나는 노래로는 유한그루의 한스런 목소리로 사랑을 듬뿍 받았던 국악가요 <물레>가 있다.

대중들의 뇌리 속에서 우리 가락의 내음을 물씬 풍기며 여전히 꿈틀거리는 그의 유일한 히트곡이다.

1953년 10월 20일 인천 영종도에서 광산업을 한 부친 곽명규와 모친 김희숙의 4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난 곽성삼. 유복한 집안이었지만 세 살 때 친모를 폐결핵으로 잃고 둘째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서울 청량초등학교로 전학했던 유년시절은 집과 학교, 교회밖에는 몰랐다.

염광중 시절은 소심하고 왜소한 체격에 공부에도 별 관심이 없던 초라한 학생이었다. 다만 이때 접한 삼국지는 영웅적 인생에 관심을 가지게 했다. 소풍 때 폼잡고 기타를 치는 친구들의 모습에 기타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형님이 목사일 만큼 기도교 집안의 보수적인 아버지는 대중가요는 절대 부르지 못하게 했다.

가수 조영남의 출신학교로도 유명한 용문고로 진학하자 둘째 매형이 중고서 낡은 고물기타를 입학기념 선물로 건넸다. 공부는 완전 뒷전으로 물러났다.

아버지의 눈을 피해 독학으로 기타를 배우며 음악에 심취했다. 고교를 졸업하면서 대학진학도 하지않고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빈둥거리게 되자 소외감이 밀려왔다.

어느날 교회친구가 클래식 기타를 들고 놀러와 번안곡 ‘사랑의 기쁨’을 들려주었다. 단순하고 어설픈 아르페지오주법의 나일론 기타줄 소리는 너무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노래가 하고 싶어졌다. 동네 레코드가게에서 사이몬 & 가펑클, 닐 영, 닐 다이아몬드, CCR의 해적판을 구입해 즐겨 들었다.

음악은 이제까지 매사에 소심했던 가슴속에 무언가 꿈틀거리게 했다. 일탈적인 새로운 삶이 느껴졌다. 이때부터 6년간을 매일같이 기타만 끼고 살았다.

뜨거운 젊은 청춘이었건만 여자친구도 한명 없을 만큼 음악 외에는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작곡을 하지도 않았다. 음악다방 DJ를 잠시 하다 쫓겨나는 별볼일 없는 음악 생활일 뿐이었다.

1977년 어느날 명동 카톨릭회관 여학생관에서 촛불을 세 개만 켜고 노래하는 노래동아리의 공연을 보았다. 사회자가 ‘노래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나오라’고 하자 촛불 속에서 들은 우리가락에 정신을 잃은 곽성삼은 자신도 모르게 무대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원로평론가 이백천이 주도했던 노래동아리 ‘참새를 태운 잠수함’. 트로트 가요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표방하며 영가나 토속적인 민속분위기의 노래세상을 꿈꾸는 젊은 열기가 탱천했던 노래 모임이었다.

초기의 멤버들은 김민기, 김태곤, 정태춘 등 쟁쟁했던 포크 가수들. 당시는 군사정권시절, 수상쩍은 노래말로 노래하는 포크 가수들은 예외 없이 요주의 인물리스트에 올랐다. 곽성삼도 그랬다.

그러나 76년부터 ‘성현’이란 예명을 본명과 동시에 사용하며 내 멋에 취해 노래를 불렀을 뿐 운동권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기에 직접 운동을 했던 분들에게 미안함을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구자형, 한돌, 유한그루, 명혜원, 안혜경 등은 함께 노래를 불렀던 동료들.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한적이 없는 곽성삼은 ‘모임에 참여하면서 기타를 잡고 눈을 감으면 노래가 떠올랐다. 악보를 쓸 수가 없어 녹음해 발췌를 하면서 곡을 만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물레’ ‘나그네’ ‘귀향’등 3집 이전의 모든 발표곡들은 이 당시에 만들어졌다. 멤버들은 첫 음반작업에 들떴다.

곽성삼은 어느덧 음악적 리더 역할을 맡으며 6개월간의 앨범작업을 주도해 데뷔 앨범인 ‘참새를 태운 잠수함123-서라벌.SR0145,1979년3월’을 발표했다.

이때 음악과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지독한 열병 속으로 빠져들었다. 처음으로 경험한 이성에 대한 사랑이 찾아왔다. 상대는 노래운동을 함께한 이화여대 정외과 출신의 동료였다.

지금도 독신으로 살아가는 곽성삼에게 그녀는 삶과 음악 속에서 지울 수 없는 애틋한 대상이자 영원한 연인으로 지금도 꿈속에 나타난다. 젊은 시절 그의 모든 노래는 그녀를 위한 사랑의 연가였다.

‘내겐 어울리지 않는 상대였기에 비참한 꼴을 보이기 싫어 의도적으로 웃지도 않고 말도 없는 진중한 모습으로 내 자신을 꾸몄다’고 고백하는 곽성삼. 그러나 사랑의 감정은 창작의 봇물을 터지게 했다.

입력시간 2002/04/08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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