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복권열풍 "대박이 저긴데…"

55억원 당첨 이후 구매 폭발적 증가

가난이라는 죄명을 벗고 '인생 복권(復權)'을 희망하는 소시민들의 손이 고액 당첨금이 걸린 복권(福券)으로 몰리고 있다.

올 3월 한국지방제정공제회가 운영하는 제 1회 슈퍼코리아 연합복권 추첨에서 인천에 사는 자영업자 P씨에게 돌아간 복권 당첨금 액수는 55억원이다.

평범한 샐러리맨이라면 평생 일에 파묻혀 살아도 구경조차 못할 금액인데다 더욱이 P씨가 구제금융 때 파산하고 전ㆍ 월세를 옮겨 다니며 어렵게 생활을 이어나가던 중년이라는 사실에 사람들은 흥분했다. "나도 대박만 터지면…"이라는 우리 시대 남성들의 한결같은 소망이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시장가던 아줌마들도 복권 대량구매

보도가 나가고 난 다음날 전국의 복권방과 복권 판매소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루었고 인터넷 복권은 평소보다 4배 이상 접속자가 늘었다.

55억 당첨 복권을 판매한 한국전자복권 사이트는 하루 3,000여 장 정도이던 판매량이 14일 오전에만 1만여 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서울 시내 복권 판매소나 편의점에는 P씨가 구입했던 연합복권을 찾는 이들이 쇄도했고 P씨의 대량 복권 구매 방식을 답습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서울 시청역 부근에서 복권 판매소를 운영하는 김모(62)씨는 "보도 이후 3,40대 직장 남자 단골이 10여명 이상 늘었다"며 "한번에 몇 만원에서 몇 십만 원씩 구매해 가기도 한다"고 말한다.

서울 봉천동 J복권방 주인 이모(45)씨는 최근 복권 열풍이 반가운 한편 놀라운 기색도 감추지 않는다. "낮에도 시장가방을 든 아줌마들이 서너 명씩 몰려와 무더기로 복권을 사가는 것은 예사고 어디서는 100만원 어치 복권을 사간 사람이 있단 말도 들었다"는 것이다.

"혹시 압니까? 저도 그런 행운이 찾아 들지요." 호주머니에 복권을 늘 한두 장씩 넣고 다닌다는 회사원 허모(32)씨는 당첨 여부를 떠나 희망을 걸 수 있어 좋다며 얼마 전부터 정기적으로 복권을 구입하고 있다. 요즘 들어 그는 회사에서 점심 시간을 이용해 인터넷에 들어가 복권을 구입하는 동료들 모습도 심심찮게 보게 됐다.

여성들도 복권열풍에서 제외는 아니다. 학원 강사 장모(30)씨는 "길거리에서 복권을 사는 것은 꺼림칙하지만 인터넷상에선 꺼릴 것이 없다”며 “특히 사이트마다 복권 배너가 번쩍이고 여기저기서 경품으로 즉석 복권을 나눠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복권에 관심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편의점이나 가판대에서 잔돈을 바꾸거나 재미로 한 두 번 사는 것이 고작이었던 젊은 여성들도 인터넷 복권 사이트가 활성화되면서 계정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복권을 구입하고 있다.

인터넷 복권 발행업체인 (주)로또는 최근 인터넷 복권 구입자 6만명을 대상으로 연령 및 성별 조사를 실시한 결과 20대 초반 여성과 남성 고객비율이 49 대 51이라고 밝혔다. 20, 30대 청년층일수록 오프라인보다는 온라인 복권을 즐긴다는 이야기다.


초등학교 앞에도 복권 자판기

익명성과 시공의 구애를 받지 않는 온라인의 접근성은 복권사업에도 한몫을 했다. 최근에는 초등학생까지 학교 앞 문구점에서 복권 자판기를 이용해 즉석복권을 뽑아 여러 명씩 몰려 동전으로 복권을 긁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H복권방 서울지부 나정주(45) 회장은 "PC방 이후로 복권방이 요즘 각광받고 있어 지난 몇 달 사이 서울지역 가맹점만 200여 군데가 더 생겨났다"고 말해 복권 열풍의 정도를 단적으로 짐작케 한다.

"복권 구입 연령도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해졌고 성비를 따져도 남녀가 반반이다. 복권이 대중화, 생활화되어 아이들의 손을 잡고 가족단위로 복권방을 찾거나 연인끼리 데이트 장소로 이용될 정도다. 복권이 하나의 오락으로 자리잡아 가는 것 같다"는 것이 업계의 관점이다.

일요일 아침이면 "준비하시고, 쏘세요"로 널리 알려진 주택복권만이 유일무이하게 우리나라에서 발행되던 복권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 발행되는 복권의 종류는 수십 가지에 이르고 그 이름도 다 외울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공급이 있으니 자연 소비가 있게 마련인 경제 원리로 볼 때 복권 열풍은 당연한 결과이다.


21종류에 6,000원 시장, 급성장 지속

지난해 복권 시장은 연간 6,000억 원, 전년 대비 49%의 성장을 이루었다. 복권 시장이 급성장하는데 일조한 것은 바로 정부 기관들이다.

현재 복권을 발행하고 있는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는 건설교통부 과학기술부 문화관광부 노동부 산업자원부 행정자치부 산림청 국가보훈처 보건복지부 제주도 등 10개 기관에 이른다. 추첨이나 즉석과 더불어 인터넷에서 판매하는 온라인 같은 판매 방식으로 세분하면 모두 21종의 복권이 시중에서 거래되고 있다.

국내 인터넷 벤처업체인 훈넷은 3월부터 북한 조선장생무역총회사와 범태평양조선민족경제개발촉진 협회(약칭 범태)와 조선복권합영회사를 설립해 인터넷 복권 사이트(www.dprkorealotto.com)를 시험 운영하고 있어 복권은 남북교류에도 한 몫 하고 있다.

복권 사업에 대한 관심은 기업도 예외는 아니다. 3월 정기주총에 공시된 기업들의 신규사업 진출 내용을 살펴보면 60% 이상의 기업이 복권·오락·건강·레저·연예사업 등 흥행산업에 진출할 예정이다.

음반 유통업체인 YBM서울이 사업 목적에 복권 발행 및 판매업을 새로 추가했고, 소프트웨어 제조업체인 모디아소프트도 이번 주총에서 인터넷 복권 사업을 신규 사업으로 결정했다. 제조업과 정보통신(IT) 산업에 연구비를 투자하고 노력을 쏟는 대신 당장에 수익을 낼 수 있는 복권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경기회복과 주5일 근무제 도입으로 소비자들의 씀씀이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돼 기업들의 이 같은 ‘복권행’은 더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복권 배너만 달아도 월 1억원의 수익을 올린다는 한 포탈 사이트 관계자의 말을 빌리자면 포장에 비해 큰 이익을 내지 못했던 닷컴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인풋(INPUTㆍ투입량)에 비해 산출량(수익)이 큰 복권 사업을 황금알 사업으로 꼽고 있다.

인터넷 전용복권은 지난해 주택은행이 로또(www.lotto.co.kr)라는 사이트를 통해 인터넷 전용 복권 사업을 시작하면서 본격화돼 이제는 SK텔레콤, KTF, LG텔레콤 등 무선 인터넷사업자들까지 인터넷 복권사업에 뛰어 들어 핸드폰에서도 복권을 사라고 아우성이다.

복권 당첨금이 고액화 된 것도 국민들의 복권 열풍을 부추긴 원인 중의 하나다.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류모(38)씨는 "1, 2억원도 아니고 1, 2십억원 당첨되면 무엇을 할까 궁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안 되도 그만이지만 당첨만 되면 인생이 확 달라지는데 담배를 조금 덜 피운 셈치고 복권을 구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종합주가지수와 코스닥지수 등을 맞히는 주가지수형 인터넷복권, 신용카드 복권 등 다양한 형태의 복권이 발행되고 있다. 공통적인 특징은 새로 나오는 복권일수록 당첨금액은 기존보다 더욱 높은 고액으로 책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 가지 복권을 세트로 묶어 판매하는 꾸러미 복권부터 오는 9월에는 1등 당첨금에 상한선이 없는 로또복권까지 나와 이제는 복권 당첨금이 100억 원대로 접어들게 된다. 주체는 건교부, 과기부, 행자부, 노동부, 중소기업청, 산림청, 제주도 등 정부기관이며 예상 판매액은 향후 7년간 5조4000억원으로 추산된다.


복권 남발, 공익사업 허울에 부작용도

그러나 복권의 남발로 인한 문제점이 속속 제기됨에 따라 각계의 비난도 만만치 않다. 너도나도 경쟁적으로 복권을 발행하다 보니 전체 발행 복권의 약 40%가 폐기처분 된다.

지난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발행한 복권은 모두 21억666만여 장에 달한다. 이중 판매된 12억9,620만6,000여장을 제외한 8억1,045만4,000여장은 소각되거나 재생용지를 만드는데 사용됐다.

또한 정부 기관들은 경쟁적으로 복권을 발행하는 바람에 기금 마련이라는 소기의 목적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주택은행(37%)과 과기부(26%)가 발행한 복권을 제외한 나머지는 적정 수준인 25%에 못 미쳤다.

특히 산림청이 발행하는 녹색복권은 기금 조성률이 13%에 불과해 당첨금과 제반 비용을 감안할 때 판매에 비해 실적이 저조하다.

여기에 복권 판매량을 늘리기 위한 당첨금 높이기 경쟁까지 과열되고 있다. 1999년 말 주택은행이 당첨금 20억원짜리 밀레니엄복권을 발행한 이후 최대 100억원을 주는 빅슈퍼 더블복권(과기부)과 ‘빅’이나 ‘슈퍼’ 등의 말을 붙인 이벤트 복권도 선을 보이도 했다.

이 같은 ‘복권 홍수’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복권 발행과 관련한 제도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전까지만 해도 총리실 산하의 복권발행조정위원회가 최고 당첨금과 발행장수 등을 조정했으나 구제금융 이후 사실상 폐지됐고, 이 바람에 복권 발행 물량과 당첨금 조정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법적인 제반 마련 외에도 지적되는 문제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인터넷 복권 사이트의 경우 기술적인 부분이 미흡해 개인정보 유출 등의 우려를 낳고 있다. 특히 일부 복권사이트 업체는 고객이 고액의 상금에 당첨될 경우 복권 판매 사실을 아예 부인하기도 해 한국소비자보호원은 인터넷 복권 사이트 사용의 위험성을 공고하기도 했다.

또한 한 장의 복권 판매에 주 기관을 시작으로 위탁사업자, 판매업자, 유통업체 등의 여러 업체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크고 작은 이권 분쟁 또한 끊이지 않는 등 잡음이 많다.

연세대 이두원 교수는 "제일 심각한 문제는 정부와 지자체가 목전의 수익을 올기기 위해 사행심 조장 같은 복권 산업의 부작용과 병폐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며 “사행산업의 과도한 번창은 근로의욕 감퇴와 한탕주의의 만연 등 사회전반에 심각한 폐해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선정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2/04/17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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