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농구 동양 오리온즈, 믿음으로 이룬 우승신화 창조

대구동양과 서울SK의 챔피언결정 최종 7차전이 열린 4월19일 저녁 대구 실내체육관, 4쿼터 종료 2초 전 동양이 75 대 65으로 리드하고 있었다. 공을 잡은 동양의 포워드 전희철은 공격할 생각도 없이 농구공을 만원의 관중석으로 던져 버렸고 곧 이어 우승 축포와 오색의 테이프가 코트 위로 쏟아졌다.

지난 시즌 꼴찌팀이었던 동양이 정규리그 우승에 이어 챔피언 결정전 우승까지 확정지으며 올 시즌 프로농구의 패자(覇者)로 등극하는 순간은 그토록 극적이었다.

승부의 세계에는 영원한 패자도 영원한 승자도 없다지만 시즌전 동양이 우승을 차지하리라 예상한 전문가는 전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동양은 프로농구 출범초인 97시즌과 97~98시즌에 4위와 5위를 차지했을 뿐 98~99시즌 이후 3시즌 동안 최하위-8위-최하위를 차지한 만년 하위팀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초대 박광호 감독이 이끌던 98~99 시즌에는 32연패(連敗)라는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치욕스러운 기록과 함께 3승42패로 프로농구 사상 최소승률팀의 멍에를 뒤집어썼을 정도였다.

당시 팀의 간판이었던 전희철_김병철의 군복무 공백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스타가 복귀한 지난 시즌에도 겨우 9승만을 거두며 꼴찌를 차지한 동양은 도무지 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팀 같았다.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신화를 이룬 동양의 우승 비결은 어디에 있었을까.


패배의식 극복, 놀라운 투혼

96년 창단 코치를 맡았다가 감독 대행을 거쳐 지난해 5월 정식감독으로 부임한 김진(41) 동양 감독은 시즌전 기술이나 전술을 개발하는 것보다는 선수들의 몸에 밴 패배의식에서 벗어나도록하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지난해 9월 제주도 전지훈련에서 김감독은 강도 높은 체력훈련과 함께 고참들과 신인들에게 장시간의 분임토의를 통해 스스로 문제를 깨닫게 하는데 중점을 뒀다. 효과를 보자 김 감독은 올 시즌 목표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신했고 내심으로 그 이상의 성적도 기대하고 있었다.

실제로 동양은 지난해 11월3일 인천SK전과 가진 시즌 개막전에서 87-95로 패했지만 이후 창단 이래 최초인 7연승을 거두며 일약 프로농구 돌풍의 팀으로 등장했다.

시즌내내 서울SK와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이던 동양은 36승18패로 결국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플레이오프는 더 극적이었다.

4강 플레이오프 창원 LG전에서 팀전력의 핵심인 신인가드 김승현(24)이 경기중 불의의 발목부상으로 코트를 떠나 가장 중요한 1차전을 내줘 탈락위기에 몰렸지만 김승현은 2차전부터 진통주사를 맞으며 출전하는 부상투혼을 발휘, 결국 3승2패로 창단최초로 챔프전에 진출했다. 7차전까지 치뤄진 챔프전은 농구사에 길이남을 명승부였다.

부상병동인 서울SK를 상대로 손쉬운 승리를 낚을 것이라 예상되던 동양이 최종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역전우승을 일궈냈기 때문이다. 2승2패로 동률을 이루던 5차전 4쿼터 3분을 남기고 7점차로 앞서가던 동양은 서울SK의 조상현에게 종료 1.6초를 남기고 역전 3점슛을 허용, 2승3패로 몰리며 우승이 물거품이 되는 듯 했었다.

이 때 선수들의 투혼이 발휘됐다. 동양선수들은 홈인 대구의 6.7 차전에서 “결코 지지 않을 것”이라는 투혼으로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며 연승, 우승컵을 안았다.


믿음으로 똘똘, 희생의 농구 만개

물론 정신력만이 동양 우승의 원동력은 아니었다. 올 시즌 동양의 전력은 김승현(24)의 가세로 철저한 분업농구가 이뤄지면서 극대화했다. 이전의 동양은 전희철 김병철이라는 스타에 의존하는 팀이었지만 전희철은 몸싸움 대신 외곽슛만 난사했고 김병철은 포인트가드 노릇을 겸해야해 자신의 장점인 외곽슛을 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올 시즌 동국대 출신의 신인 김승현이 포인트가드로 활약하자 팀이 새로워졌다. 김승현의 가로채기에 이은 재빠른 어시스트가 이어지자 동양은 10개 구단중 가장 빠르고 득점력 높은 팀으로 변모했다.

김승현의 가세로 라이언 페리맨의 리바운드와 전희철, 마르커스 힉스의 골밑공격, 김병철의 외곽슛이 톱니바퀴처럼 물리며 동양의 분업농구는 만개했다. 김승현은 정규리그후 어시스트, 가로채기, 베스트5, 신인왕에 이어 최우수선수(MVP)까지 5관왕을 차지, 올해 동양의 확실한 ‘히트상품’임을 입증했다

물론 김승현 혼자 농구를 한 것은 아니었다. 김진 감독은 팀의 간판이었던 김병철과 전희철에게도 시즌전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수비력이 약하던 김병철에게 철저한 수비를 강조, 김병철의 슛감이 좋더라도 조금이라도 느슨한 수비를 보이면 연습경기에서부터 가차없이 벤치로 불러들여 스스로 문제를 찾게 했다.

득점욕심을 내는 전희철은 골밑으로 넣어 몸싸움을 하게하며 득점보다는 상대의 장신자들을 막게하는 궂은일을 시켰다. 김 감독의 구상대로 숨을 헉헉대면서도 김병철의 수비는 수준급으로 향상돼 강력한 공격력을 뒷받침하게 했고 전희철의 강력한 밀착수비는 챔피언전에서 국보급센터 서장훈(28ㆍ서울SK)을 고전케하며 역전 우승의 발판을 마련했다.

우승이 확정되자 가장 눈시울이 붉어진 선수는 팀의 영욕(榮辱)을 모두 지켜본 창단멤버 전희철 김병철이었다.


최고의 용병 힉스와 페리맨

팀 전력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용병선발에서도 동양의 선택은 탁월했다. 지난해 7월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외국인선수 선발 트라이아웃캠프에서 지명 1순위 카드를 쥔 김 감독의 선택은 NBA 하부리그 IBA 신인왕 출신인 마르커스 힉스(24)였다.

거구에 장신인 다른 팀 용병들과 달리 힉스(24ㆍ196.5㎝ㆍ97㎏)는 키가 2㎙도 채 안됐고 체격이 가냘퍼 시즌전 호주팀과의 연습경기 때 상대 선수들에게 번번이 밀리는 등 활약 가능성을 반신반의케 했었다.

그러나 시즌이 시작하자 힉스의 활약은 농구 전문가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용수철같은 탄력과 유난히 긴 팔로 상대팀의 골밑슛을 블록해 버리는 힉스의 플레이에 상대팀은 지레 풀이 죽었고 호쾌한 덩크슛으로 동양의 농구를 화려하게 만들었다.

정규리그에서도 힉스는 외국인선수상을 비롯해 블록상, 베스트5, 수비5걸의 4관왕을 차지했지만 이는 챔프전에서의 활약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서울 SK와의 챔프전 1차전에서 무려 10개의 블록슛으로 프로농구사상 최다기록을 세우며 첫 승을 견인하더니 7차전동안 경기 평균 31.2점 11리바운드의 놀랄만한 기록으로 외국인선수로는 사상 최초로 플레이오프 MVP로 등극했다.

가능하면 외국인선수에게 상을 주지않으려는 관례도 힉스의 활약앞에는 비껴갔던 것이다. 동양이 트라이아웃에서 마지막 순위로 뽑은 페리맨(26ㆍ199.1㎝)도 굴러온 복덩이였다.

페리맨 역시 2㎙가 되지 않는 신장이었지만 적극적인 리바운드로 정규리그 리바운드왕이 됐고 시즌 내내 성실한 플레이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기량미달과 잦은 태업으로 감독들의 속을 썩이는 다른 팀들의 용병들과 달리 올 시즌 동양의 용병농사는 대풍작이었다.

톱니바퀴 같은 조직력과 벤치와 선수들의 신뢰, 뛰어난 용병관리로 지옥에서 천당으로 승천한 동양의 신화가 내년에도 이어질지 농구팬들의 마음은 벌써부터 설레고 있다.

이왕구기자 체육부 기자

입력시간 2002/04/23 19:16


이왕구 체육부 @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