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대를 이은 죽염전문가 김윤세

"음양오행 담긴 죽염, 건강비법 중 으뜸이죠"

‘인산가’김윤세(48) 사장의 양복주머니 어딘가엔 꼭 소금병이 들어있다. 들고 다니며 수시로 꺼내 한 웅큼씩 털어먹는다. 뭔가 사탕처럼 씹어먹는다 싶으면 그것도 소금이다. 40여년째 습관이다. 그에겐 소금이 소금이 아니라 약이다.

물론 보통 소금은 아니다. 어려서는 부친이 만들어주신 죽염을 먹다가 이제는 자신이 만든 것으로 해결한다. ‘인산가’도 부친의 호를 따서 만든 죽염 전문업체다. 광고효과를 위한 습관도 아닌 듯 하다. ‘홍보용’치고는 너무 자주, 많이 죽염을 먹는다. 그래도 괜찮을까.

“죽염은 체내에 들어오는 모든 독을 없애줍니다. 저만 아니라 죽염을 먹고 효능을 체험한 분들은 다 저같이 됩니다. 특히 두주불사의 주당들 중 저보다 더 한 분들도 많습니다.

아무리 많이 마신 날이라도 자기 전 죽염을 두 세 숟가락쯤 먹고 자면 다음날 조금도 숙취 없이 깨끗하게 일어납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직접 한번 해보세요.”


대체의학 개발에 평생 바친 부친

죽염을 만든 지 15년째. 어려서 배운 것까지 합치면 40여년동안 소금에 대해 공부했다. 주변에선 ‘싱거운 세상의 소금장수’로도 부른다. 죽염을 전해 받은 것은 부친으로부터. 부친은 생전 대체의학계에서 많은 흔적을 남기고 간 고 김일훈 선생. 민간 습속으로 제각각 전해오던 죽염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해 세상에 처음 내놓은 것도 부친이었다.

김 사장의 삶 대부분도 부친의 유산이나 다름없다. 그가 만드는 죽염도 부친의 비법을 철저히 따르고 있다. 지리산 일대에서 자란 대나무 통에 서해안 천일염을 넣고 황토를 반죽해 입구를 막는다.

그리고 소나무 장작불에 넣어 굽기를 아홉번, 완전히 녹아 마치 용암처럼 흘러내려 굳은 바위덩어리 상태로 된 것을 빻아 되굽기를 반복한 것이다. 굳이 서해안의 천일염을 가려 쓰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서해안에서 만들어지는 천일염만이 유일하게 ‘핵비소’라는 성분을 갖고 있습니다. 죽염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핵심이 이 핵비소에 있는데, 이것은 약성만 아니라 독성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나무에 여러 번 굽는 과정을 거치면서 독성은 사라지고 약성만 남아 질병이 치유되는 겁니다.

죽염의 원리엔 많은 것들이 녹아있습니다. 죽염으로 술독을 이기는 것도 얼핏 생각하면 황당무계한 소리 같겠지만, 주독(酒毒)은 불의 성질을 띱니다. 알코올에 불을 붙이면 불이 붙는 것과 같지요. 반면에 천일염으로 만드는 죽염은 물의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불을 물로 끄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요. 보기엔 간단한 소금이지만 죽염 속에는 동양의 음양오행설 등 오묘한 한방의 원리가 숨어있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갈수록 심해지는 공해독을 이기는 데는 죽염만큼 신비한 것이 없습니다.”

10년 전 세상을 떠난 부친은 아버지라기보다 그의 큰 스승이자 큰 산이었다. 가난한 이들의 병을 무료로 치료해주느라 평생 힘겨운 외길을 걸으면서도 소신과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심지어 가족들 자신에게도 한때 이해 받지 못하는 꼿꼿한 의학자였다. 조부 부터가 당대에 이름난 명의였던 부친은 젊은 시절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일경에 체포돼 약 1년 반의 수감생활을 치렀다.

그러다가 탈출해 금강산, 묘향산 등에서 도피생활을 하면서 한의학 연구에 발을 들여놓았다. 둘째 아들인 윤세씨가 태어난 1950년대에는 이미 치료를 받은 환자들 사이에 기인이자 명의로 이름이 알려지고 있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민속의학

죽염은 부친이 생전에 전파한 치료법 중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세상의 병원이나 의원 등을 전전하며 끝내 마지막 희망까지 포기해야 했던 난치병 환자들을 다양하고 독특한 민속의학으로 고쳐놓았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로부터는 냉담하게 외면당했다.

민속의학 자체에 대한 편견에다 그 중에서도 부친이 보인 의술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치료법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초강수 중에서도 초강수의 극약처방에 가까웠다. 독을 독으로써 푸는, 현대의학의 시선으로 보면 지극히 위험천만한 내용들이었다.

간단한 감기약 처방만 해도 한의원조차 ‘먹으면 죽는다’고 할 만한 약재들로 구성됐다. 일반의 우려와는 달리 그러한 처방이 실제로 환자들을 낫게 하는 것을 윤세씨는 어려서부터 보아온 부친의 환자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도 확인했다.

20대 후반,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맞은 자신의 생명을 건져준 것도 부친의 처방이었다. 그가 부친의 의학을 따르게 된 것도, 부친의 남다른 삶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된 것도 그러한 경험을 거치면서부터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족에겐 희생이 뒤따랐다. 무엇보다 환자들의 병을 고쳐주고도 치료비 한 푼 받으려 들지 않았다. ‘돈이란 한낱 세상의 지푸라기에 불과한 것, 특히 궁지에 몰린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대가를 받는 것은 의술을 가진 자가 할 도리가 아니다’라는 고집이었다.

자신과 가족의 안락에 무심한 의학자 곁에서 가족들은 거의 평생 집도 절도 없이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더부살이로 살았다.

경남 함양의 한 부잣집에 머물 때의 기억. 어느날 그 집 며느리가 선심 쓰듯 간장을 갔다 주었다. 고마움에 겨워 인사를 한 뒤 간장 통에 붓고 보니 오물이었다. 얹혀사는 이들 가족이 못마땅해 모욕을 준 것이다.

어머니는 그 모멸감에 눈물을 흘리며 그 길로 산속으로 들어가 오래도록 나오지 않았다. 몇 해후 그네를 타다 떨어지면서 생긴 장파열의 후유증으로 어머니는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부친이 치료하려 했지만 ‘이대로 떠나고 싶다’며 한사코 치료를 거부하고 스스로 받아들인 죽음이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부친의 의업에 대한 서러움과 가난의 고통 때문이었다.

어릴 때 부터 부친의 의술을 가장 가까이 흠모해 온 것은 차남 윤세씨였다. 그가 보아온 부친의 생전 모습은 환자를 치료하지 않으면 혼자 방안에서 책을 읽거나 약초실험을 하는 모습 등으로 채워져있다. 특히 약초실험은 참으로 엄청났다.

사실상 당신이 직접 발명한 것이나 진배없는, 동서고금 어디에도 없던 새로운 치료법들을 검증하는 수순으로 부친은 수시로 동물이나 식물을 통해 임상실험을 했다.

예를 들면 유황을 오리에게 먹이거나, 역시 극약 중 하나인 부자를 돼지에게 먹여 기르는 등 한참 세월이 지난 오늘에야 사람들로부터 조금씩 인정 받고 있는 약성 실험들이다.

끊임없는 연구로 수 십 마리의 개와 오리 등을 키우는 그의 가족을 동네 이웃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가축 냄새로 원성을 들으며 수시로 쫓겨나다시피 이사를 다녔다. 윤세씨가 기억하는 것만 일흔번이 넘는다.

한때 한의원을 열기도 했지만 몇 해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날마다 몰두하는 약 실험에다 그 치료법을 번번이 환자들에게 무료로 베풀다 보니 한의원 사정도 별 수 없었다.

그 사이 어머니의 고생은 물론 아들들은 백화점 경비원, 외판원 등 수많은 직업을 전전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아들의 결혼 때도 주변에서 소식을 듣고 보내준 30만원이 부친으로부터 받은 결혼자금의 전부였다.


죽염 이용한 다양한 상품 개발

9년간 불교신문 기자로 활동하며 특히 부친의 의업을 전하는데 적극적이었던 차남 윤세씨는 1986년 부친의 의학세계를 총정리한 책을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김일훈 선생이 지닌 치료법의 원리와 방법을 소개한 ‘신약’이라는 저서였다. 책이 나오자마자 곧바로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한 달에 4,000-5,000부씩 책이 팔려나갔고, 부친의 강연 때마다 500명이 넘는 청중들이 몰리곤 했다.

부친이 살고 있는 함양 거처로 찾아 오는 환자들만 하루 200여명, 주로 말기암 환자들이었다. 집이 있는 산 기슭까지 빽빽하게 이어지던 택시행렬, 일대 숙박업소와 식당들까지 문전성시를 이뤘다. 아버지는 가고 아들은 남았다.

1992년 82세로 세상을 떠난 부친은 생전의 무욕 그대로 떠날 때도 옷 몇 벌과 책, 저울, 만년필 정도만을 유품으로 남겼다. 1987년 ‘인산식품’이란 이름으로 본격적인 죽염 회사를 창업한 윤세씨의 종자돈이란 것도 책 판매로 얻은 수익이 전부였다.

죽염은 생전에 부친이 가장 으뜸으로 치던 건강비법중 하나였다. 체계를 세운 것은 부친이었지만 세상에 전달하는 것은 남은 아들의 몫이었다.

그간 죽염 뿐만 아니라 죽염 된장, 비누 등 다양한 상품으로 응용 개발, 현재 전국 100여 개 대리점에다 독일과 일본 등지에 현지법인 또는 대리점까지 갖출만큼 성장시켜놓았다. 가입한 회원수만 1만5,000여 가정. 그 중 판사, 변호사, 전직 장관 등 각계각층의 죽염 예찬론자들까지 든든히 자리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염에 대한 세상의 벽 또한 여전히 두텁다. 사실상 대체의학 자체가 겪는 현실이다. 1990년대엔 특히 큰 타격이 있었다.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답답하다.

“어떤 이상한 집단 같은 곳에서 한 소아당뇨환자에게 죽염을 먹으라고 시켰다가 그걸 먹고 사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방송에서 시사프로그램 등을 통해 집중적으로 문제를 취재한다며 의사들로부터 ‘소금을 많이 먹으면 위험하다’는 식의 인터뷰를 거칠게 보여주는 등, 소금업계에 포화를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소금이 위험한 게 아니라 소금의 질이 중요한 겁니다. 알고 보니 그 환자가 먹었다는 죽염은 제대로 구운 것도 아닌, 이상한 단체에서 엉터리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제대로 만든 죽염은 아무리 먹어도 탈이 없습니다.

오히려 많이 먹을수록 질병을 고쳐주고 막아줍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특히나 염분섭취를 제한시키는 당뇨병이나 위장병 등까지도 오히려 죽염을 먹어 낫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얼마나 더 시간이 흘러야 죽염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줄 지 답답합니다.”


부친의업 정당한 평가 받는날 올 것

죽염 협회의 초창기부터 회장직을 맡았던 그는 사실상 회사에 머무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거의 매일 이어지는 전국의 기업체, 공공기관 등의 초청강연으로 서울의 회사나 함양의 생산지 외에도 전국을 누비기 바쁘다.

그의 꿈은 앞으로 부친의 의업이 정당하게 평가 받는 날을 보는 것이다. 예로부터 약초의 보고로 자리하며 수많은 명의를 탄생시켰던 지리산, 그 지리산에 깃들었던 한 민속의학자의 숨결을 되살리는 작업이 지금도 그 아들이자 제자인 김 사장의 손에서 소리없이 진행되고 있다.

“단지 죽염을 팔아 돈이나 벌라고 아버님께서 죽염을 물려주신 것은 아니겠지요. 회사를 잘 키워서 내년쯤엔 코스닥에 상장할 계획도 갖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함양 전체에 전문 연구기관과 관련기업, 약초 재배지, 판매장 등을 아우르는 종합 의료타운을 만들 생각입니다. 환자 누구든 와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아마 아버님이 바라시는 것도 그런 세상일 겁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2/05/03 19:46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