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MD가 본 세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 집권 초ㆍ중반기인 1982~85년에 언론사 정치부장을 했던 언론인들은 그를 2급 ‘MD’라 불렀다. 그 혹은 MD는 전 전 대통령 밑에서 문공부 차관, 정무 수석, 통일원 장관을 역임한 허문도 전 장관이다.

그가 필자의 졸저 ‘우리 대통령, 미국대통령 그리고 김정일’이 나오기전인 3월 20일께 일독(一讀)은 권하며 ‘한국 사회는 쇠퇴하고 있는가’라는 글을 보내왔다. 그 글은 월간조선 5월호에 특별기고란 이름으로 게재된 원고였다.

‘우리 대통령’ 중 MD가 모셨던 전 전대통령의 후임 세 대통령에 대한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해박한 역사지식과 지도자에 대한 그 나름의 소견을 바탕으로 한 평가였다.

평가의 기준으로 국가와 사회, 문명의 영고성쇠를 다룬 영국의 문명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를 활용했다. MD에 의하면 토인비는 “어떤 문명이든 성장이란 것은 창조적인 소수가 비창조적인 다수 대중을 이끌 때 가능 하다.

창조적 소수가 비창조적 다수를 따를 때 성장은 정지하고 쇠퇴 한다”고 논했다는 것이다. 또한 토인비가 “우리들은 언제나 스스로 속에 있는 허(虛ㆍfalse)한 것에 배반한다”고 말한 것은 인간정신이 쇠퇴하는 것을 뜻하지 기술이나 학문의 쇠퇴가 사회나 정치경제를 쇠락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MD는 풀이했다.

그래서 MD는 새 대통령을 뽑는 지금이야 말로 쇠퇴를 반전 시킬 기회며 ‘스스로 먼저 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시민이, 유권자가 어떤 지도자를 뽑을까 하는 눈의 힘(眼力)을 가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MD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정신내면이 ‘허한 대통령들’이라고 평가했다. 노 전대통령은 87년 6.29선언이 전 전 대통령만이 내릴 수 있었던 결단이었는데도 대통령에 당선되고도 자신이 결단을 내린 것처럼 행동한 것은 ‘기만’과 ‘횡령’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역사의 진실(전두환의 결단)을 두고 대통령이 국민을 향해 기만행위를 지속했고 결단포즈(결단을 내린 당사자인 척 하는 것)를 지속함으로써 참 결단 주체에 돌아가야 할 일종의 정치적 과일을 끝내 횡령 해버렸다”는 것이다.

MD는 또 노 전대통령이 남북선언에서 “‘북한은 적이 아니다’라는 문구를 사용함으로써 김대중 대통령에게까지 국가 정체성에 혼란을 미치는 씨를 뿌렸다”고 보고 있다. YS(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MD의 눈은 곱지 않다.

YS의 금융실명제 실시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가입을 “촌사람이 서울 바람 좀 쏘였다고 삐닥구두신고 넥타이 한번 매려다가 소 팔고 논 팔고 기둥뿌리 빠진 격이다”라고 봤다.

MD는 두 대통령이 못한 실명제를 ‘나는 헤치울 수 있다’는 YS의 오기가 바로 마음이 ‘허한’ 것을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이며 OECD가입을 통해 한국을 선진국으로 진입시킨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얻기에 급급한 YS의 정신내면은 허공에 뜬 것이라고 설명했다.

DJ를 향한 눈길은 분노를 느끼며 노려 보는 듯하다. 비전향 장기수를 대거 북에 보내고 베트남에서 사과성 발언을 한 것은 국가 정체성을 흔든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런 발언의 진의에 대해 국민에게 설명하지 않고 안개상태에 둔 채 설득도 하지 않는 것은 DJ의 정신 내면이 ‘허’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MD가 무엇보다 흥분하고 있는 부분은 지금도 논란이 계속 되고 있는 북한에 대한 주적 개념문제다. 그는 맹자를 들어 논박했다. “안으로 법도를 아는 신하와 진정한 보필을 아는 선비가 없고 밖으로는 적국이나 외환이 없는 나라는 항상 망한다.” 적국이나 가상적국이 있어야 하는 것은 국가를 있게 하는 심적긴장의 공급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 대통령의 정신내면이 ‘허’한 대통령이라면 MD가 모셨던 전 전 대통령은 그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미국인으로 한국 정치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 정통한 사람은 워싱톤포스트의 동북아(도쿄, 사이공, 서울, 베이징, 모스크바)특파원과 국무부 출입 기자였던 돈 오버도프다.

DJ가 정권을 인수하기 직전인 97년에 그가 낸 ‘두개의 한국-한국현대사’에는 전 전 대통령에 관해 40여쪽이나 서술되어 있다. 불행히도 MD에 대해서는 한 줄도 없다.

‘두개의 한국’에 나온 세 미국 대사의 2, 3줄 짜리 코멘트를 보면 전 전 대통령의 면모가 잘 드러난다. 박정희 대통령 피살 때부터 12ㆍ12. 5ㆍ17, 레이건 등장까지 주한미국대사를 역임한 그라이스틴 대사는 12ㆍ12사태가 쿠테타로 확산되자 되자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믿을 수 없고…거리낌없고…무모하고…거짓말쟁이.” 그의 후임인 리치드 워커는 “매우 영리하고 계산이 빠르고 내가 아는 한국사람 중 정치적으로 깔끔한 편이다”라고 표현했다.

그의 후임인 제임스 릴리는 87년 6ㆍ29선언 직전인 6월 19일 하오2시 청와대에서 한국군 동원을 자제해달라는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전했다. 전 전 대통령은 어느 때보다도 침통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군대동원을 자제하라는 미국의 권고를 심각히 받아들였다.

곧 그의 보좌관으로부터 군을 동원하지 않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는 레이건 대통령이 전한 민주화의 길을 택한 것이다. 그는 칼을 빼기도 하고 칼을 칼집에 넣을 줄도 아는 군인이요 정치인이었다.”하지만 오버도프의 글은 전 전 대통령이 광주민주화운동의 원인 제공자였던 점을 간과한 듯하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2002/05/03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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