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국내 공식 소믈리에 1호 서한정

와인은 빈대떡과도 찰떡궁합

천직처럼 지킨 호텔업계를 떠난 지 꼭 1년. 그러나 노장은 영원하다. 국내 공식 소믈리에 1호 서한정(59)씨. 서울 종로의 와인 아카데미에서 만났다. 소믈리에란 와인의 감별부터 관리, 판매,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현직에서 활동하는 와인 전문가를 뜻한다.

국내 최초, 최고의 전문가로 알려진 그의 강의를 받겠다고 그간 찾아온 사람이 약 1,200명, 그러나 그 중 700명만이 무사히 수료과정까지 마쳤다. 그만큼 어렵고 만만찮은 분야라는 얘기다. 잠시 엿들은 전문가반 강의만해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용어들이 사방을 날아다녔다. 막연한 관심만으로 덤빌 일이 아니다.

“배우다가 도중에 포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온통 영어나 불어 같은 외국어에다 그것도 어려운 전문 용어들이라서 전부 암기 해야 하는 것들 뿐이거든요. 뻔히 뜻을 아는 단어라도 쉽게 이해가 안가는 것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크리습(crisp)이란 바삭바삭한 빵을 말할 때 잘 쓰는, 바삭바삭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와인에도 크리습하다는 표현을 씁니다. 와인이 바삭바삭하다면 이해가 가십니까. 공부가 어렵기 때문에 특히 인내가 필요합니다.”


아시아인 두번째로 프랑스 농업훈장 수여

32년 전 호텔맨이 되었고, 그로부터 6년 뒤 소믈리에가 되었다. 그 후 24년 만인 2000년 한국인으로는 최초, 아시아인으로는 두 번째로 프랑스 정부가 주는 농업공로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1997년 신라호텔에서 정년퇴직, 그 후에도 촉탁직을 제의 받아 현업에 있다가 지난해 4월 또 한번 계약연장제안을 마다하고 나왔다. 2년 전부터 시작한 와인나라 닷컴(www.winenara.com) 사업에 몰두, 이젠 제자 양성에 보람을 얻고 있다.

“은퇴했다고는 해도 여전히 하는 일이 많습니다. 매일 강의도 해야 하고, 지금도 저는 와인에 관한 한 국내 1인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요즘도 계속 책을 보며 공부하고 있습니다.”그의 가방에는 와인 관련서와 영어사전이 들어있다.

버스와 전철 안에서도 수시로 꺼내 든다. 영어와 일어는 웬만한 의사소통에 불편이 없을 정도. 불어실력만 예전에 비해 많이 후퇴해있다. 그러나 책이나 이론이 소믈리에를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미각에 숨어있다.“소믈리에란 분야가 어려운 건 뭣보다 맛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맛은 직접 먹어 보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겁니다. 그 많은 와인 맛을 알자면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맛을 기억한 다음, 그것을 정확히 머리 속에 입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경륜이 중요합니다.”

어릴 때 나무타기가 그의 특기이자 취미였다. 툭하면 떨어져 다리를 삐거나 부러뜨리고도 끈질기게 다시 나무에 오르곤 했다. 그 고집 센 모험심은 자라서도 여전했다. 전남 여천에서 출생, 1962년 순천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한때 농촌운동을 한다며 지리산에 들어가 땅을 개간하며 산 적이 있다.

한동안 농촌 청년운동을 벌인 일도 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시골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비로소 잠잠한 듯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1년 뒤 군입대로 휴직하면서 더 요란한 방랑이 시작됐다. 육군으로 복무하던 중 새삼 도전욕이 발동해 파월 참전병으로 지원했다. 부모님께는 일언반구 알리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1년간 베트남 전장에서 학교와 병원 등을 지어주다가 돌아왔다. 군 제대 후 미련없이 교사직을 그만두고 외양선을 타겠다고 나섰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부모님 몰래 이불 보따리 하나만 둘러멘 채 연고도 없는 부산에 내려가 외양선 무선사가 될 준비를 했다.

그러나 통신공부를 하던 중 결국 일자리를 찾지 못해 포기, 서울에 올라와 전전하던 중 1970년 한 호텔에 취직하게 됐다. 당장의 생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얻은 낯선 직업이었다.


처음엔 손님이 와인 주문할까봐 도망

그것이 호텔생활 30여년의 첫 발이었다. 맨 처음 온양의 한 관광호텔에서 웨이터로 일했다. 매일 유리컵을 닦고, 테이블을 치우고, 손님의 뒤치닥 거리를 했다. 실수로 수시로 엎지르는 그릇, 지배인의 호통, 걷어차이는 정강이. 2년쯤 지나고서야 일이 손에 익었다.

“그때 교사생활을 그만둔 걸 많이 후회했습니다. 계속 선생님으로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고생하지도 않을 텐데 내가 왜 그만뒀을까 하구요. 하지만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다, 힘들지만 끝까지 잘 견뎌보자고 마음 먹었습니다.”

서울 앰버서더 호텔에서 3년간 바텐더로 근무한 뒤 1976년 프라자 호텔로 옮기면서 소믈리에라는 이름을 달았다. 소믈리에라는 생소한 명칭은 고사하고, 일반인들에겐 아직 와인조차 구경하기 어렵던 시절이었다. 그저 ‘외국인을 위한 면세품’ 항목으로 국내에서도 특급호텔 몇 군데에서만 간간이 와인이 판매되고 있었다.

맡은 일은 전문적이었지만 그에 대한 교육이나 도움 받을 곳이라곤 전무했다. 객장에선 진땀을 흘렸고 혼자 있을 때는 열심히 공부하며 어떻게 든 길을 찾아야 했다. “처음에는 손님이 와인을 주문할까 봐 도망 다니기 바빴습니다.

그래도 결국 누군가 주문을 하면 대충 감으로 짐작해 비슷한 걸 드렸습니다. 제가 그 맛을 다 모르니, 달리 방법이 있어야죠. 그러다가 손님이 주문한 것과 반대되는 걸 갖다 줘서 항의를 받기도 하고, 실수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한쪽에선 혼자 계속 공부를 한 거지요. 처음엔 주로 일본의 책을 봤는데, 그 원서를 읽자면 일본어, 영어 공부부터 다시 해야 했습니다. “

출근 전에도 매일 새벽 일본어, 영어학원을 다녔고 오후에도 잠시 허락되는 식사시간이면 학원에 달려가 영어수업을 받았다. 근무 중에도 찾는 손님만 없으면 술 보관창고에 죽치고 앉아 책을 펴놓고 영어, 일본어 단어를 외었다. 통근 길에서도 마냥 그 모습이었다. 그렇게 와인관련 전문서적들을 하나하나 독파, 실력을 쌓아나갔다.


내 혀엔 300종의 와인이 담겨있죠

한편으론 실무를 통해 와인의 다양한 맛도 섭렵, 현재 약 300종의 와인 맛을 기억하고 있다. 상표만 보고도 정확히 맛을 알아맞힐 수 있는, 평생 노력의 산물이다. 모범사원으로 표창을 받을 만큼 성실성을 인정 받았던 그는 1984년 신라호텔로 전격 스카우트 됐다. 소믈리에로서의 능력을 인정 받은 결과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고비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특채로 들어가다 보니 원래 있던 분들은 저를 별로 달갑지 않게 보았습니다. 대인관계로 겪는 갈등때문에 매일같이 내가 그만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루 하루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처자식을 책임진 가장이니 힘들다고 쉽게 그만둘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때 가장 힘이 됐던 책이 삼국지였습니다. 그 책을 수도 없이 되풀이해 읽으면서 위대한 인물들도 성공하기 위해 이렇게 인내했는데 하물며 나는 이 정도도 인내하지 못하나, 그렇게 마음을 다잡곤 했습니다.

상대를 이기는 방법도 거기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가장 도움이 됐던 ‘병법’이요? 온유함입니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고 공격적이라도 이쪽에서 온유하게 나가면 결과적으로 이기는 겁니다. 겉보기엔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지만, 더 멀리 내가 이루고자 하는 더 큰 꿈을 생각하면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간이 더 지나보면 결과적으로 상대도 스스로 이쪽에 기대어 오더군요.”

지난해 4월 현업을 떠나기 전까지 자신의 손으로 와인을 접대한 국내외 VIP들의 명단도 화려하다. 스티븐 호킹스 박사, 고 앤소니 퀸, 핸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부 장관, 앤 영국 공주 등 세계적 인물들을 비롯해 국내에서도 적지않은 정ㆍ재계의 인물들을 접대했다.

그러나 그들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매너에 대해선 함구했다.고객에 관한 한 은퇴 후라도 보안유지를 철통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작 말해봐야 이 정도다. “(웃음) 자신이 와인을 잘 몰라 잘못 주문해놓고도 주문한대로 가져다 드리면 잘못 가져왔다고 항의하면서 자신이 맞다고 빡빡 우기는 분, 상하지도 않았는데 와인이 상했다고 하시는 분 등 많지요. 그럼 어떻게 하냐구요? 그냥 죄송하다고 하고선 손님 기분을 맞춰 드리는 거지요.”


VIP 모시던 그도 이젠 VIP

사실상 이제 그 자신도 VIP다. 2000년 프랑스 정부의 훈장을 받은 소식이 알려지면서 더욱 유명해지기도 했지만, 과거 두어 차례 한 국산와인의 TV, 지면광고에 출연했던 전력으로도 이미 사람들에게 친근하다. 지금도 외국에 나가면 현지 교포들이 금새 인사를 건네오는 ‘국제 스타’다. 프랑스와 칠레 등 10여 차례 다녀 온 외국 와인산지 방문 중 상당수가 외국 정부가 비용을 대고 초청한 것이었다.

현업에 있을 때도 그가 와인을 따르려고 하면 갑자기 일어나 ‘영광스럽다’며 허리를 굽힌 채 잔을 받는 손님까지 있어 자신까지 당황했던 일이 있다. 연예인을 보듯 함께 사진까지 찍어가는 손님 등 그의 소믈리에 인생엔 즐겁고 뿌듯한 기억들이 가득하다.

“제 생각엔, 목표를 뚜렷하게 세우고, 그에 맞춰 꾸준히 노력하고 끝까지 인내하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어려움은 있지만, 그 고비까지 잘 넘길 수 있어야 원하는 꿈이 이뤄지지요. 제 자신도 그 사이 힘든 일도 많았지만 이렇게 끝까지 인내하고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 점 후회도 없이, 제가 걸어온 길에 긍지를 느낍니다.”

그와 평생 거리가 먼 것들이 있다. 담배는 이제껏 단 한번도 피워 본 일이 없다. 니코틴 성분과 연기가 혀를 무디게 만드는 이유도 있고, 원래부터 호기심조차 일지 않았다. 진한 커피, 짜고 매운 음식도 먹지 않는다.

역시 혀를 둔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 이상 현직의 소믈리에는 아니지만, 일상생활은 여전히 와인연구에 묶여있다. 집에서도 습관처럼 온갖 음식과 와인을 조합해본다. 사실상 와인은 개고기, 파전, 산적, 백김치 등 한식과도 구구절절 궁합이 맞는, 알고 보면 소탈한 술이다. 전혀 까탈스런 사치품이 아니다.

그는 며칠 전에도 집에서 호박전과 멍게, 빈대떡에다 와인을 마셨다. 멋진 맛이었다. “비싸다고 꼭 좋은 것도 아닙니다. 5,000원짜리 와인이라도 400만원짜리 와인보다 자기 입맛에 더 잘 맞는 게 따로 있습니다. 그런걸 찾아내면 됩니다.”


세계 와인 명산지 기행서 펴내고 싶어

인터뷰는 이로써 끝. 그런데 맨 정신으로 시작한 인터뷰가 본의 아니게 취중 인터뷰로 끝났다. 사진을 찍느라 개봉한 와인을 그가 인심 좋게 자꾸 권했기 때문이다. 홀짝 홀짝 마시다가 헤어질 때쯤 일어서고 보니 온 세포가 무장을 해제하고 있었다. 언젠가 세계의 와인 명산지를 기행하는 책을 쓰고 싶다는 그의 마지막 말이 머리속에 가물거렸다.

글·사진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2/05/09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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