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의 경제서평] 미국 따라가기는 망하는 지름길?

■ 차세대 IT혁명과 아시아적 발전 모델
사카무라 겐 지음
김용인ㆍ최운식 옮김
동방미디어 펴냄

한국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들라면 미국 경제를 꼽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미국 경기가 좋으면 우리도 좋고, 나쁘면 우리도 나쁠 확률이 높다. 개방과 자유 무역을 특징으로 하는 세계화가 가져온 현상이다. 비단 우리 뿐만 아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이고,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겪지 않을 정도로 탄탄했던 대만과 싱가포르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정보통신(IT) 분야에서는 그 정도가 더 심하다. 미국이 호황이어야 자국 IT산업이 산다. 미국 소비자들이 사 주어야 한다. 미국 의존도는 그만큼 크다.

이 책은 IT분야에서 무조건 미국을 따라하기가 얼마나 큰 손해를 가져오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일본에 불어닥친 불황의 원흉이 바로 막연한 미국식 모방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아무 생각없는 미국식 모델 따라잡기가 이 같은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IT에 있어 미국 모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상시 접속 가능한 대용량의 고속회선을 전국에 설치해 여러 가지 e 비즈니스를 일으켜 궁극적으로는 경제를 활성화시킨다는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이미 한국에서 시행되어 일본도 급속히 추진하고 있는 ‘브로드밴드(광역대) 구상’이 그 하나다.

이러한 미국 모델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이 ‘글로벌 스탠더드’ 다. 이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가혹하다. 한마디로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말은 이제 완전히 일상 용어가 되었지만, 그것은 결국 ‘아메리칸 스탠더드’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런 이름을 가진 변기 제조회사가 미국에 있다’고 지나가는 말투로 슬쩍 언급하고 있다. 그 정도밖에는 안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 대다수 일본인은 글로벌 스탠더드과 맞지 않는다. 그런데도 일본인들은 ‘일본의 바깥에 세계 표준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품고 있다.

그리고 그 환상을 전제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 일본은 지금까지 정치 경제 사회에 있어서도 그 방식이 잘못되었다라는 견해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억지로 자신에게 맞지도 않는 씨름판에 끌려 들어가는 순간 상대방의 그랜드 디자인에 패하고 만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미국 모방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일관된 주장이다. 메이지 시대 이후로 일본인들은 흉내내기를 계속해 왔지만 그보다도 일본 모델을 연구하고 그것을 시대에 맞춰 만들어 내는 것이 전략적으로 타당하다.

이 대목에서 2차 대전 패전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흥미롭다. 서구 흉내를 내고 동일한 방법론으로 무리하게 대항하려 한 결과가 뼈아픈 패전이었다. 전쟁을 하여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것까지 서구 열강의 흉내를 낸 결과 전쟁에 패하고 호된 고초를 겪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 미국이 IT 비즈니스에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은 자신이 정한 심판 기준을 모든 나라가 준수하도록 강요하는데 있다. 따라서 아시아에서 힘있는 나라들은 힘겹더라도 미국식 모델과는 다른 독자적인 모델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않으면 미국이 불황이면 아시아도 불황에 빠지게 되고 호황이 되더라도 그 이익은 인프라를 독점하고 있는 미국 회사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버리고 만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IT분야에서 충분한 능력을 지닌 한국과 일본은 미국 경제가 불황이 되면 두 나라가 분발하고, 우리 쪽이 좋지않을 때는 미국의 도움을 받는 국제적 보완관계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 이야기여서 어느 정도 감안은 해야겠지만, 방향은 바람직하다고 보여진다.

저자는 미국식 영향을 받지않고 일본에서 고수익을 올리고 있는 회사로 NTT 도코모를 들고 있다. 해외투자 실패로 약간 좋지 않지만, 10조엔 가까운 이익을 내고 있는 이 회사는 미국식 모델과는 다른 ‘인터넷에 접속 가능한 휴대전화’라는 독자적인 일본식 모델 위에 세워졌다.

도쿄대 교수인 저자는 1984년부터 트론(TRON; The Real-time Operating System Nucleus) 프로젝트의 리더이며, 현재 트론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임베디드(내장형) 운영체계다. 저자는 또 트론 프로젝트를 통해 일본의 IMT 2000을 이끌고 있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이 책의 상당 부분을 그가 제창한 트론 프로젝트의 소개에 할애하고 있다.

이 책이 말하고 있는 ‘홀로서기’는 희망사항일지 모르지만 한번쯤 깊게 생각해 볼만한 과제다.

이상호 논설위원

입력시간 2002/05/09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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