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세상] 분,초, 그리고 아이템과의 전쟁

마음에 걸린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월요일 새벽 5시 40분. 차를 몰고 회사로 향하는 길에 지난 주말부터 머리에 맴돌던 것이 가시에 찔리듯이 점점 따끔거려 온다.

필자가 제작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은 KBS 1라디오 아침 6시 30분부터 방송되는 '안녕하십니까 정관용입니다'라는 시사프로그램. 소수의 제한된 인원으로 꾸려 가는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은 월요일이 되면 아킬레스의 뒤꿈치를 살짝 드러낸다. 월요일 아침 방송 아이템들을 전주 토요일 오전에 선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 주말에 큰 사건이나 뉴스가 생기면 월요일 꼭두새벽부터 새로운 아이템을 섭외하고 방송도 진행하느라 말 그대로 난리법석을 떨게 된다. 제작진의 피는 바싹 마른다.

그런데…바로 그 날도 월요일 새벽... 그 전주의 생각으로는 일요일에 제4차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금강산에서 시작되지만 그렇다고 월요일 아침에 금강산에 도착해 있는 남쪽 이산가족을 전화로 연결하기는 분명 어려웠다. 하지만 월요일 아침에 비중이나 사안으로 볼 때 이산가족상봉 아이템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금강산으로 떠나기 전에 지원단으로 방북하는 박수길 전 국립오페라단 단장과의 인터뷰를 녹음했는데...

아니, 일요일 오후에 무심코 텔레비전을 커는 순간.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장면이 ‘좔좔’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실제상황을 드라마로 옮긴 듯 아니 드라마를 현실에다 가져 다 놓은 듯 갖가지 얘깃거리가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오전 6시 30분. 헨델의 '시바여왕의 도착'을 시그널로 프로그램은 무정하게 떠나가고… 이럴 때는 왜 그렇게 시간이 야속한지! 역시 제대로 된 프로듀서의 양식으로 박 단장과의 인터뷰 녹음 테이프를 눈을 질끈 감고 틀기는 어려운 게 분명하다.

자, 이제 새로운 아이템 찾기다. 조간신문을 수북하게 쌓아놓고 속속 들어오는 통신기사도 뒤져가면서 그래도 좀 더 좋은, 기자들 사이의 슬랭으로 표현한다면 섹시(?)한 - 아이템을 찾아가는데... 시간은 사정없이 흘러 제1부 방송시간을 끝내고 보도국에서 제작하는 7시 아침종합뉴스가 모니터스피커를 통해 울리고 있다.

뉴스시간에 잠시 스튜디오 밖으로 나온 사회자 정관용씨와 심도있는(?) 협의 끝에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 2위를 한 정대철 의원을 ‘모시기’로 했다.

1위를 차지해 대표가 된 한화갑 의원은 지난주 경선 전에 방송했으니깐 모양새도 맞고. 사무실에서 원고를 준비하고 있는 작가에게 정 의원 전화번호를 찾아보라고 주문했다. 어느덧 7시 16분 제2부 방송시작.

그런데 웬걸! 전화번호를 찾아보라고 했는데 작가가 섭외가 됐다는 아주 반가운(?) 소식을 전해준다.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단비와 같은 메시지였다.

그런데, 모든 일이 다 좋은 순 없는 법. 박 단장과의 인터뷰를 보내겠다고 프로그램 시작에서 예고를 해버린 것이 그제서야 머리에 떠오른단 말인가?

박 단장과의 인터뷰 녹음 테이프를 내자니 방송시간이 모자르고 그냥 빼자니 청취자와의 약속위반이 마음에 걸렸다. 결론은 인터뷰 시간을 줄여서 내는 방법뿐이다. 그런데 30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녹음 테이프에 가위를 대어야 한단 말인가? (아직도 라디오방송에서는 흔히 보는 카세트 테이프와 재질이 유사한, 그렇지만 보다 폭이 넓고 두터운 '릴 테이프'에 녹음을 하는 일이 흔하다.)

그래, 한번 해보는 거다. 쉴새 없이 릴 테이프가 잘려나가고, 또 잘려진 테이프의 양끝부분에는 접착 테이프가 붙여지고. 시간을 초연(?)한 듯 릴 테이프 재생기 앞에서 바쁘게 손을 놀리는 프로듀서의 뒷모습. 그리고 여기에 쏟아지는 엔지니어의 걱정어린 눈빛과 긴장된 손놀림. 마지막 릴 테이프 편집 부분이 바닥에 떨어지고. 접착 테이프로 끊어진 테이프를 잇고. 단단하게 접착부위를 눌러주고...

“그래, 다 됐다. TR(테입녹음재생기) 3번 스탠바이. 큐~”

'도대체 몇 분 때문에 이렇게? 이렇게 스스로를 못살게 굴고 수명(?)을 단축해 가면서 살아야 하는가?' 방송을 무사히(?) 끝내고 필자는 자문해 본다.

당초 7분 30초 런닝타임이던 박수길 전 국립오페라단 단장의 녹음분량은 그 날 결국 3분 동안 방송됐다.

'4분 30초'… '4'와 '30'… 어느 월요일 아침에 한 라디오 프로듀서에게는 더없이 소중하지만, 그 외 누구에게는 의미 없을 시간과 숫자이다.

이경우 KBS1 라디오 PD

입력시간 2002/05/10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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