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대학로] 공룡 커피점에 맞선 '옛날다방'

46년 전통의 학림다방, 대학로의 낭만 간직한 채 맛으로 승부

대학로의 명물 레코드점 ‘바로크’가 4월 30일 문을 닫았다. ‘오감도’ ‘대학다방’ ‘밀다원’ 등은 이미 수년 전 자취를 감췄다. 스타벅스, 자바커피, TGI 프라이데이, 배스킨라빈스 등 외국계 체인의 거대한 상업문화 공세 속에 누적된 적자를 견디지 못한 토종 명소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가는 것이다. 마지막 남은 곳이 1956년부터 46년간 명륜동 94번지를 지켜온 ‘학림(學林)’다방이다.

학림이 변신하고 있다. 세계 최대 커피 체인인 스타벅스 등에 맞서 전통의 맥을 잇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시작했다. ‘커피 전쟁’이다. 신선한 커피의 ‘맛’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학림은 얼마 전 인근주택을 개조해 5평 정도의 공간을 마련, 일본으로부터 대형 기계를 들여 다 원두를 직접 가공하는 ‘커피공방’을 만들었다. 직접 수입한 생원두를 볶아 만든 학림의 커피에는 에스프레스의 진한 향이 가득히 살아 있다.

학림 커피를 잊지 못하는 중년들을 위해 원두 판매 사업도 시작했다. 온라인 커피전문점 ‘eZonCafe’의 개설 작업도 한창 진행중이다. 현대식 로고와 홈페이지를 만들고 체인점 구상도 가시화하고 있다.

학림은 최근 서울 삼성동 코엑스몰의 한 북 카페에 학림 브랜드의 점포 제안서를 보냈다. 외국계 점포가 대학로를 점령한 데 맞서 상업 문화의 중심지에 전통 명소를 심어놓겠다는 맞불 공략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 예술계 인사들의 사랑방

학림의 저력은 무엇보다 46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옛 전통에 있다. 낡은 나무테이블과 천 소파, 고전음악 LP가 빼곡히 들어선 서른 평 남짓한 공간은 세월을 반추하는 힘이 있다. 하루 종일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앉아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철학과 문학과 젊음을 토론하던 문학사랑방의 옛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청준 김승옥 김지하 박태순 등 한국문학사의 거목들을 비롯해 금난새 임헌정 김민기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대학 강의실보다 학림을 즐겨 찾았고,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씨가 1999년 귀국하자마자 공항에서 제일 먼저 이곳으로 달려왔다.

문학평론가 황동일씨는 “하루가 다르게 욕망의 옷을 갈아입는 세속을 굽어보며 우리에겐 아직 지키고 반추해야 할 어떤 것이 있노라고 묵묵히 속삭이는 저 홀로 고고한 섬 속의 왕국”이라고 학림을 평했다.


■ 학림다방 다섯 번째 주인 이충열씨
"고객들의 추억 영원히 남기겠다"

학림의 다섯번째 주인으로 17년간 대학로를 지켜온 이충열 사장(47)은 몇 년 전부터 학림 지인들의 도움을 얻어 브라질 콜롬비아 등 세계 유명 산지의 원두를 들여와 가장 맛있는 커피를 배합하는 연구에 매달려왔다. “하루 20잔을 넘게 커피를 마신 적이 많았어요.

눈이 충혈되고 머리 속이 혼미해질 정도였지만, 제대로 된 커피 맛을 찾아야 학림의 전통도 지켜질 수 있다는 신념으로 버틸 수 있었죠.”

1975년 서울대가 떠나고 83년 지하철 공사로 학림 건물마저 헐린 뒤에 이 사장은 주위의 권유로 서른의 나이에 학림을 떠맡았다. 이후 대학시절 이곳을 드나들며 찍어놓은 사진들을 열쇠로 학림을 복원하는데 온갖 정성을 쏟았다. IMF이후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어져 적자에 허덕일 때도 그는 “학림을 찾는 사람들이 좋기 때문에 학림에 남겠다”고 했다.

이 사장이 가장 아끼는 보물은 옛 고객들의 흔적이 배인 낡은 미농지 묶음. 그 속에 알알이 적힌 메모들에는 학림을 찾았던 중년들의 추억과 고뇌가 담겨 있다. 학림을 ‘서울대 문리대 제25강의실’로 불렀던 세대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 사연들을 묶어 책으로 펴내는 것의 그의 바람이다.

이 사장은 “학림의 역사는 개인이 쌓아올린 것이 아니다”라며 “학림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진짜 주인”이라고 말했다.

배현정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2/05/10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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