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巨匠] 시인 김지하

화해의 큰 걸음 뗀 구도자

지난 시절 시인의 전언은 팍팍한 황톳길 위의 삶들에게 한줄기 폭포였다. 그러나 지금 뜨거운 길거리에도, 광장의 함성에도, 삼삼오오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주점에도 그는 없다. 시대와 불화한 자의 뜨거운 감성을 언어로 벼려내던 시인은 어디로 갔나. 그 타는 목마름은.

문인들이 잘 모이는 일산의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감물 들인 모시옷을 걸치고 조금은 구부정한 몸짓으로 김지하(61)는 악수를 청한다. 잘 구획 지어진 일산시 장항동의 50평짜리 오피스텔에 사는 그에게서는 그러나 10년째 살고 있어도 이 지역 특유의 깔끔함이 몸에 잘 배어 들지 않는다. 인근의 정발산 꼭대기까지 산행에 들이는 짬이 매일 한 시간이다.

“별로 나가지 않고 집에 있는데, 일하니 좋아요. 요즘 가장 관심 있는 거요? 전 동국대 총장 이지관 스님이 번역ㆍ해제하고 가산불교문화재단에서 펴낸 ‘비문(碑文) 연구’, 학고재에서 낸 유흥준의 ‘완당 평전’을 파들고 있어요.” 삼국시대 이후 고승들의 비문에 새겨진 글을 다시 풀어 엮는 작업이다. 고도의 고고학적 지식을 필요로 하는 금석학이다.


생명,평화,조화의 세상을 갈망

난초 치고 시도 물론 쓴다. 특히 4월 말 쌓여 있던 짐꾸러미를 정리하다 미발표 원고 100여 편을 발견한 일은 뜻밖의 횡재였다. 청년시절 써 두었다 새카맣게 잊어 버리고 있던 시였다. 과거의 궤적을 비롯해 이후 그의 삶에 들이닥친 푸른 시간들에 그는 행복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출 수 없다.

“사이버네틱 에콜로지(cybernetic ecology)라고 할까요. 석 달 전 경희대 강연에서 내가 처음으로 공식화했던 말인데, 앞으로 계속 천착해 가야 할 주제죠.” 시인의 여정은 이제 인터넷 망과 생태학이 결합된 세계까지 왔다. 가상 공간과 생태학의 연결 지점을 그는 주목하고 있다. 3월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여성문화회, 유기농소비자공동체 한살림, 녹색연합 등 환경 단체를 규합, ‘생명문화운동네트워크’를 만든 것은 그 전주곡인지도 모른다.

“환경 운동, 도농 직거래 운동, 관련 문화 운동 등이 생명사상과 관련을 맺지 못한다면 결국은 중산층 소비운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간과 자연이 화해하는 정신 운동으로 순화돼야 하는 거죠”. 율려(律呂) 문화 운동 등 우리 고유의 사상과 서양의 진보적 환경론을 합친 철학 운동 등을 합쳐 낸 신철학 운동이 그 실천 덕목이다. “노래 부르기, 화초 재배 등 주부가 동참할 수 있는 길도 열려 있습니다.”

시인은 세 가지 원칙으로 세계를 보고 있다. “생명, 평화, 조화죠.” 이 잣대는 동시대의 변화와 요구는 물론 뉴욕 타임스와 슈피겔 등 언론을 통해 서구의 변화를 쭉 체크해 온 그가 추출한 결론이다. 그는 심화되는 빈부격차, 인간의 내면적 황폐, 민족 분쟁 등으로 21세기 인류는 신음하고 있다고 보고있다.

“천문학적 헤지 펀드가 휘젓는 세계는 아예 카지노판이 됐죠. 피에르 부르디외 등 유럽 지식인들이 부르짖었던 반세계화 운동마저 쇠퇴했어요.” 북극의 붕괴와 라니냐 및 엘니뇨 등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상 이변, 생태계 오염, 지북과 자북의 괴리 심화 등으로 그가 본 지구는 안위조차 의심스럽다. 이 같은 의식에서 비롯된 그의 생태철학은 동과 서를 아우르되 동에 무게 중심이 가 있다.

지구와 인간을 공존케 할 첫째 덕목, 생명 사상에서부터 그는 서양철학을 초월한다. 동양, 더 정확히는 동북아의 사상적 전통에 와서야 안식을 찾는다. “이 지역의 철학적 깊이는 금욕주의(stoicism)-니체-베르그송-들뢰즈의 계보로 이어지는 서양적 생명철학보다 뿌리가 깊어요. 동이족(東夷族)의 특성인 호생 불살생(好生 不殺生), 접화군생(接化群生)이 바로 생철학이죠.“ 전자는 고문헌 ‘산해경’에, 후자는 최치원의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 근거하는 말이다.

여기서 그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최치원의 생명 사상을 한 수 높은 것으로 본다. 접화, 즉 ‘사랑으로 변화시킨다’는 말은 무기물까지 생명으로 보는 대승적 자세라는 것이다.

둘째 덕목, 평화 사상에서는 동북아가 한국으로 좁혀진다. 산해경의 ‘숙신조(愼愼條)’에서 동이족의 특성으로 말한 바 ‘호양부쟁(好讓不爭)’을 든다. 양보하기 좋아하고 싸우기 싫어한다는 뜻이다.

셋째, 조화의 정수는 태극 사상이다. 음과 양이 대립하지 않고 물고 물리며 생성과 소멸을 계속해 나가는 역동적 순환론이다. 원효사상, 화엄사상, 율곡사상, 미륵사상 등 우리 선지식들의 생각에서 그는 생명ㆍ평화ㆍ상생이라는 자신의 추구점을 보았던 것이다.

“아직도 좌파적 이야기를 합디다. 그 반대편에는 강남 졸부들이 돈 좀 있다고 폼잡고 있고.” 그는 이제 이것도 저것도 다 끌어 안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자본주의는 얼마나 좋은가. 사회주의적 복지제도와 충분히 조화될 수 있다면.” 투쟁이 아니라 통합과 조화의 세계로 나아갈 단초는 여기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남북분단과 생태 문제라는 한국적ㆍ세계적 문제의 해법이라는 말이다. 사이버와 생태학이 빚어 올릴 미래의 세계, 전지구적 신경망으로 얽혀질 지구에서의 삶을 그는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작 본인으로 보자면 휴대폰도 없고 컴퓨터도 잘 못하지만 엄청나게 변화해가고 있는 신세계의 패러다임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마치 1974년 인혁당 사건으로 수감, 감옥에서 금식 참선하던 꼭 100일째 되던 날, 신기하게도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던 1979년 상황도 그랬다. “인생무상. 안녕히 가십시오. 나도 곧 뒤따라 가겠습니다.” 그 세 마디 말은 1991년 꽃다운 목숨들이 불꽃이 돼 가던 이른바 분신정국 당시 그의 머리속을 스쳐간 생각이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무상한 일입니다. 나도 당신 생각과 꼭 같습니다.’


투쟁이 아닌 통합으로 나가야

그는 고민하고 고민했다. 스러져 가는 꽃들을 두고 어떻게 해야 좋을 것인지 서울대 정신과 이부영 박사와 상의했다. 정신과학도의 말은 단호했다. “자살하는 사람에게 명분을 세워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당시 모 신문에 실었던 시 ‘척분(滌焚)’은 그의 참절한 심경이 그대로 읽힌다. ‘스물이면/혹/나 또한 잘못 갔으리/가 뉘우쳤으리/품안에 와 있으라/옛 휘파람 불어주리니(중략)수이/삼도천(三途川) 건너라.’

강경대 치사 사건 1주일간 20만 여 명이 참여한 에 과 에 대한 시위와 이에 따른 정부의 강력한 대응으로 정국, 양측의 신경이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던 때, 그의 말은 충분히 오독될 법했고 실제로 그랬다. 그것은 분명 안타까움의 표시였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앙금의 골은 깊어만 가, 운동권은 대놓고 그를 훼절자로 몰아갔다. 그가 그들과 만났을까.

1999년의 일이다. 당시 문화운동을 하던 청년 10명이 그에게 연락을 해왔다. 가보니 그 속내가 만만치 않았다. “문화운동의 법통으로 선생님을 모시려하는데, 그 일이 걸린다. 어떤 식으로든 그에대해 변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미 “‘말’지에 그에 대해 후퇴와 양보의 발언을 하지 않았느냐”는 그의 말은 술자리로 이어졌다.

그런데 일순배 돌자 느닷없이 한 청년이 울기만 하는 것 아닌가. “대낮에 길 가는데 7년전에 분신한 선배가 나타나더니, 이제 어두운 데라면 어김없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자꾸 우느냐” 고 물으니, “꼭 내가 죽인 것만 같다”며 울먹이는 청년의 말에서 시인은 이들의 독특한 감성을 읽었다. “혁명적 동지애라기 보다는 인간적 사랑과 우정이 우선된 386세대 특유의 동지애였죠.” 그는 가슴이 아렸다.

“길게 보자. 우리가 가미가제냐. 거대한 동지애와 자신감을 가져라. 전략을 제대로 세워라. 자기 일에 자신을 가지라. 힘을 모아 이제는 문화운동을 하자”던 당시 그의 말은 비전이었고 곧 자신의 미래였다. 이번에 처음으로 털어놓은 이 일화는 그가 왜 붉은 혁명의 시인에서 푸른 생명의 시인으로 나아갔던가를 짚어 보는 데 중요한 단서이다. 감옥 창틀의 한움큼 공간에 싹틔운 민들레를 보고 생명에 눈떠 동학공부에 들어간 그 삶의 질량은 청년의 알 바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1970년 ‘오적(五賊)’을 발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된 것은 시작이었다. 4년 뒤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무기로 감형됐다. 그렇게 7년 동안 투옥ㆍ재투옥이 계속됐다. 몸은 허해갔으나 눈빛은 형형했다. 생활의 무게는 어느 순간부터 벽이 돼 왔다. 7년 계속된 영어의 시절은 바로 두 아들의 터울이다.

‘아내는 오래 전부터/날 우습게 알기 시작했고/아이들마저 이제는/말대답이 느리다/아무런 노여움도 슬픔도 없이/머얼건 애들 눈자위 건너다 보는(후략)’(‘그 소, 애린6’) 자신을 느꼈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다. 그는 간구한다. ‘아직은 저를 데려가지 마십시오/아이들을 먹이고 키워야 합니다/아이들을 제 수명까진 데려가지 마십시오’(‘그 소, 애린27’).

인기 인터넷 소설 ‘Exceed Man’의 작가인 장남 원보(29), 록 뮤지션 세희(22)가 바로 그의 생명을 전수받은 두 아들이다. “술 담배 않고, 연애도 않는 괜찮은 애들이에요.” 자식 이야기라면 일단 자랑이 앞서는 영낙없는 이웃의 모습이다.


서정의 세계 농축된 8번째 시집 '화개'

되찾은 시들은 6월말께 도서출판 실천문학에서 발행될 8번째 시집 ‘화개(花開)’로 묶여진다. 강철 무지개 같던 그의 시세계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서정의 세계가 농축돼 있다. 그 싯구가 실릴 신작 시집 ‘화개’는 시인의 말을 빌면 피빛과 절망의 색채에서 솟아오르는 명상적 색채가 못 보던 경지를 펼칠 것이라 한다. “내 시에서 매우 밝은 이미지로 가득할 ‘화개’를 기대해 주세요”.

그는 주역의 제 16괘인 고괘(蠱卦)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독충으로 하여금 독충을 먹게 한다는 뜻을 가진 괘다. 그 구절은 유해 물질로 가득찬 이 시대를 정화할 이이제이(以夷除夷)의 비책으로 번역돼, 우리 시대에 나타날 것이다.

‘모를 건 당신/모르는 건 나’.

선문답이 아니다. ‘문학동네’ 6월호에 실릴 시 13편중 시인이 특히 아끼는 구절이다(‘당신’중에서). 선머슴애들처럼 그도 짝사랑을 했다. 환갑을 넘었건만 시인의 감성은 짝사랑의 본질을 단 두 마디로 길어 올린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내만은 몰랐으면 했다. “그 사실을 알면 아내는 좋아 않을테니까요.”

4ㆍ19 혁명이 실패하자 허탈한 마음을 안고 고향 목포로 내려가 있던 때였다.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도 혁명도 가고 말았던 때, 폐결핵마저 젊은 시인을 괴롭히던 때였다.

민중의 바다에서 더 새로운 민중의 바다로, 전설속의 흰 소(牛)를 찾아(尋) 여전히 시를 읊는 그는 길 위에서도 쉬지 않는 구도자다. 현실과 더 큰 화해의 길로 그는 나아가고 있다.

장병욱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2/05/10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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