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칼럼] 룰이 지켜지는 경제정책

얼마전 한 미국대학 초정으로 학부생들에게 한국경제에 대한 강의를 했다. 자료를 정리하다 보니 우리나라가 본격적인 근대경제의 틀을 갖추고 성장한 것이 불과 40여 년에 불과하며 그 동안 얼마나 폭발적으로 성장했는가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강의하려고 노력을 했지만 강의 준비와 강의 과정에서 일종의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긍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우리 경제의 많은 문제들 조차 필연적으로 거쳐야만 했던 성장통(成長痛·growing pain)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1959년 우리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81달러에 수출은 2,000만 달러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40여년동안 국민 소득은 125배, 수출은 750배 가량 증가했다. 게다가 무선전화 이용자는 전체인구 4,700만명 중 3,000만명을 넘어서고 DSL, 케이블모뎀 등 광대역통신 이용자는 800만을 넘고 있다.

삼성전자는 소니나 모토로라 같은 다국적 우량기업을 시장가치나 실적에 있어서 추월하고 있고 문제가 많던 금융부문에서도 국민은행은 아시아 금융의 모델로 비즈니스 위크에 등장했다.

1948년 찰스 헬믹이라는 미국의 장군이 "한국은 기술적인 훈련을 받은 인력이나 경험을 가진 사람이 전무하므로 절대로 높은 생활수준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라고 전망한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놀라운 발전상이다.

한국전쟁으로 국토는 잿더미로 변하고 그나마 부족하던 산업기반은 완전히 무너졌다. 53년부터 62년까지의 연평균 GDP 셩장률은 0.7%에 그쳤으므로 진정한 성장은 그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

초기의경제성장은 전략 교과서로 치면 그야말로 정답에 해당하는, 선택과 집중을 통한 자원배분의 진수를 보여준다. 처음에는 수출로 방향으르 잡았고 그 다음은 몇몇 중요한 산업섹터를 선정하여 소수의 가능성 있는 기업에 힘을 모아주었다. 물론 정부가 금융 및 재무자원을 통제하는 상황이었기에 가능했다.

초기의 성공요인은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 요소로 바뀌었다. 재벌에 집중된 자원과 취약한 중소기업 기반, 정경유착과 그로 인한 부패의 고리, 노동자의희생 위헤 만들어진 국부(國富) 등을 들 수 있다.

당연히 이러한 문제점을 고치기 위한 노력들이 뒤따랐다. 그러나 한번 힘을 가지게 된 재벌들은 더 이상 정부의 통제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고비용 정치구조로 기업에 기대지 않을 수 없게 된 정부 역시 강력하게 변화의 드라이브를 걸 수도 없었다.

민주화와 개방의 바람을 타고 임금은 급상승했고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인생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노동윤리도 약해지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개방화와 자국보호주의적인 성향에 직면한 상황에서 경쟁력은 약한 채 규보만 키운 기업들, 성급하게 선진국 대열에 들었다며 샴페인을 터트린 정부, 오랜 관치금융으로 인한 금융부분의 경쟁력 저하, 배가 불러지면서 과소비와 사치로 눈을 돌린 국민...

여러가지 복합적인 문제로 성장 일변도의 경제는 97년 거품이 터졌다. 하지만 한국은 기록적인 시간에 IMF 구제금융을 졸업하고 현재 재성장의 상승무드를 타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시점에서 경쟁적이고 긍정적이던 요소들이 환경이 변하면서부정적인 요소로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 가지 눈에 띄는 변화라면 과거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한국의 기업들을 국가가 주도적으로 이끌며 키웠다면 지금은 문제가 많은 정부 때문에 오히려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가 짐이 되고 있고 기업들로 인하여 국가의이름이 빛이 나는 시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문제는 정부가 시대변화에 걸맞는 리더십을 발휘하고 적절한 인프라를 제공할 수 있느냐로 좁혀진다. 경쟁력이 없는 기업은 신속하게 도태되고 경쟁력이 있는 기업은 혜택받는 아주 상식적인 환경과 룰(rule)이 있고 그것들이 지켜지는 사회 그리고 규제는 지나치게 하지않되 그것을 어기는 경우에는살벌한 처벌이 기다리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것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정치부터 깨끗해져야 한다. 미국에서 일곱 번째로 큰 회사였던 엔론이 문제가 생기고 석 달만이란 단기간에 파산을 한 것은 미국의 저력을 보여준 사건이다. 우리가 대우나 하이닉스를 처리하는것과 상반되는 광경이다.

또한 공급과잉의 건설업 등 경잭력 없는 기업들의 구조조정을 지연시켜 생성과 잠재력이 높은 부문으로 자원이 흘러가는것을 막은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이 오랜 경제침체를 겪는 것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몇 년 뒤에는 미국 학생들의 눈이 더욱 휘둥그레지는 강의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언수 고려대 교수(경영학)

입력시간 2002/05/13 11:30


주간한국